62화
어쨌든 아이 아빠는 태헌이란 걸 간과했다. 부양의 의지가 있다면 그에게도 권리가 있긴 했다.
태헌에게도 아이의 존재가 연서만큼이나 설레고 놀라운, 반짝이는 생명일 수 있단 걸 생각지 못했다.
그는 못된 사람이었으니까, 아이에게도 못되게 굴 거라고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핏줄에게는 애틋할 수 있는 건데.
“이사님 아이 맞아요.”
연서가 조그맣게, 그의 자리를 인정했다. 태헌의 손끝이 잘게 떨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당연히 연서가 키울 터지만, 독단적인 결정이긴 했다. 어쩌면 태헌과 충분한 대화가 필요한 문제였다. 연서가 품은 아이지만, 그에게도 얼마간의 권리는 있을 터였다.
이제 깨달았으니 태헌이 요구할 권리를 포기시켜야 했다. 연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는 어디에 있어요?”
“두고 왔어.”
“그럼 어디라도 들어가서 얘기해요.”
“잡아.”
태헌이 손을 내밀었으나 연서가 거절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주변의 카페였다. 평일 오전의 개인 카페는 조용했다. 연서도 차분한 공기를 맞닥뜨리자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태헌이 카운터에서 따뜻한 유자차와 딸기 케이크를 주문해 직접 가져왔다. 태헌의 몫으론 아이스 커피가 놓였지만, 마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가만히 연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짙고 탁한, 검은 숲처럼 위험이 도사리는 눈동자라서 그를 똑바로 마주하기 어려웠다. 또다시 미아가 되어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연서는 마다하지 않고 유자차를 마셨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힐 겸 케이크도 먹었다.
헤어진 남자와 마주 앉아 케이크를 떠먹는 행위가 생각보다 자연스러워 연서는 속으로 쓴웃음 지었다.
호르몬이란 건 대단했다. 자존심보다 입덧이 우선 되어 케이크를 싹싹 긁어먹었다.
“더 시킬까.”
“곧 점심 먹을 시간이라 그만 먹을래요. 잘 먹었어요.”
“점심 함께 먹든가. 너 좋아하는 거로.”
점심을 먹자고?
“떡볶이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사님은 그런 거 싫어하시잖아요.”
“아쉬운 쪽이 맞춰야지.”
전의 우태헌이 어디 갔나 싶게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떡볶이면 돼? 어디서 먹을래.”
그가 직접 검색이라도 할 요량인 듯 핸드폰을 찾았다.
태헌과 밥을 먹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기꺼이 떡볶이에 입을 대겠단 태헌을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연서와 떡볶이를 먹는 것보다 고급 음식을 대접받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태헌이 잠시 한숨 쉬었다. 그러곤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아이를 너랑 함께 키우고 싶은데.”
아이를 함께 키운다는 건 부부가 하는 일이었다.
부부라니, 태헌과? 말도 안 됐다.
다만 연서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한 태헌의 세계엔, 그저 아이만 함께 키우는 관계라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었다.
스폰과 섹스 파트너처럼, 비이상적인 관계가 아무렇지 않은 사람.
“혼자 키우는 거 쉽지 않을 거야. 여러모로 고충이 많을 거고.”
“알아요. 하지만 헤어진 마당에 아이를 어떻게 이사님이랑 같이 키워요. 말이 안 되잖아요.”
연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돌아오면 돼. 좋은 환경에서 크는 편이 아이한테도 좋겠지.”
연서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존재를 눈치챘다. 태헌은 아직도 연서를 소유물 따위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란 말을 하는 거다.
“혹시 아이의 존재에 대해, 이사님 집안 분들도 아세요?”
“그게 상관있나?”
“질문에 답해주세요.”
“알든 모르든, 그 사람들 네가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야.”
선예와 태선을 다시 볼 일 없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다만 아이를 함께 키우자고 하고선 다시 볼 일 없다는 건, 역시 연서와 이상한 관계를 만들겠단 소리였다.
아이만 함께 키우는 그런 사이.
그럼 설마 사생아를 만들겠다는 걸까.
아이를 숨겨 키우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구든 너에게 그딴 짓을 하면, 그땐.”
미간을 좁힌 태헌이 입을 닫았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연서는 크게 심호흡했다. 태헌의 그림자 아래에 가두어 아이를 키울 순 없었다.
“우리 아이 사생아 만들 생각 없어요.”
“사생아?”
되묻는 태헌의 표정이 화난 것처럼 날카로웠다.
“같이 키우자는 게 결국 그런 거잖아요. 어딘가 숨어서 이사님 세컨드로 남아달란 거. 그러니 이사님 가족분들 볼 일 없다는 거고요. 아니에요?”
“하…….”
태헌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언뜻 욕설이 들린 것 같아서 연서가 배를 어루만졌다.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까.”
그의 음성이 낮디낮았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나 싶어 차라리 반가웠다.
“그러세요.”
“너와 결혼하고 싶어.”
정적이 흘렀다. 태헌이 물방울이 맺힌 아이스 커피를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빈 잔이 테이블 위에 놓일 때까지도 연서는 굳어 있었다.
아니야. 이건 또 안심시키려는 수작일 거야.
뜬금없는 청혼이었다. 이미 헤어진 사이에 결혼하자니.
가뜩이나 감정 기복이 심한 연서의 머릿속이 과도한 정보를 받아들이며 치열하게 회전했다. 뜨끈해진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하…….”
아니야. 그는 아이가 필요한 거다.
결벽적인 사람이니 다른 사람과 몸을 섞어 후계자를 두는 것보다 이편이 빠르다고 계산했을 거다. 그게 우태헌이니까.
그간 괜찮아진 줄 알았던 마음이 지끈거렸다. 이대로라면 또다시 거대한 어둠에 삼켜질 것만 같았다.
“결혼해. 아이와 너, 전부 필요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연서가 가방을 찾으려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팔꿈치에 걸린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졌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괜찮나?”
태헌이 일어나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재빠른 속도였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연서의 팔을 잡았다. 그러곤 실핏줄이 비치는 팔을 조심스레 털어냈다.
“찔린 데 없어?”
“…….”
“참지 말고 아픈 데 있으면 말해.”
“괜찮아요. 다친 곳 없으니….”
연서가 말을 하다 멈추었다. 태헌의 손등이 온통 찰과상투성이였다. 내리뜬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태헌의 카라 안쪽, 목덜미 부근에 길게 남은 붉은 상흔.
연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카라 깃을 벌렸다. 연서의 팔과 발을 살피느라 여념 없던 태헌이 그제야 멈칫했다.
“이게, 뭐예요?”
“…다친 데 없는 거지?”
“이게 뭐예요? 무슨 상처예요?”
“별것 아니야.”
태헌이 일어나는 순간에, 빗자루를 든 직원이 나타났다. 연서는 더 캐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깨진 찻잔 값을 지불하는 동안에 연서는 유심히 커다란 뒷모습을 관찰했다.
이상해.
“김현영 비서가 나보나 낫겠지? 차 불러 줄 테니까 타고 가.”
“…그럴게요.”
싫다고 뿌리칠 여력이 없었다. 진이 빠져서인 것도 있지만 그것보단 목에 길에 남은 상흔이 마치… 목을 맨 것처럼…. 심장이 불길하게 내려앉았다.
그럴 리가 없지. 임신했더니 상상력도 풍부해지나 봐.
함께 떡볶이를 먹자던 태헌은 갑자기 연서를 집으로 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게 꼭 목에 난 상처를 숨기려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과민한 반응일 터였다.
“찻길이야. 뒤로.”
인도 아래로 내려가려는 연서의 허리를 잡아 그가 길 안쪽에 세웠다. 닿은 부근이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태헌과 나란히 서서 차를 기다렸다.
“조금 더 있다가 나올 걸 그랬네. 다리 아프면, 안아줄까.”
그가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이상했다. 너무 이상하고 먹먹한 것이 가슴에 얹힌 것 같아서…….
연서는 그의 손등을 재빨리 살폈다. 그러자 태헌이 그 시선을 눈치채고 손바닥을 뒤집었다.
“할머님 면회하고 싶거든 연락해. 번호 지운 거면 다시 찍어주고.”
“알아요, 번호.”
“언제든 전화해. 아무 때나 상관없으니까.”
“선생님은 괜찮으시죠?”
강 여사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태선이 연락하기로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었다. 태선이 면회하러 올 건지 물어본 적이 있긴 했으나 답하지 않았다. 일본에 있던 때였다.
“그대로야. 네가 오면 좋아하시겠지.”
“…그럼 나중에 찾아뵐게요.”
연서는 다시금 흘긋 태헌의 목 카라를 살폈다. 아래쪽에선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뭔가에 졸린 것처럼 스친 것처럼 붉게 번진 상처.
응급실 실습 때 목을 맨 환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검푸른 멍과는 색이 미묘하게 달랐으나 상흔 모양이 비슷했다.
아니야. 왜 그런 짓을 했겠어.
저 남자가 왜. 뭐가 힘들어서.
잠시 뒤 현영이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인사한 그녀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으나 그동안 어디서 지냈는지, 어떻게 된 일인지 묻지 않는 현영의 태도는 태헌이 고용한 사람다웠다.
필요 이상 정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겠지.
“홑몸 아니니까 잘 모시고, 집까지 안전히 부탁합니다.”
“네, 이사님.”
임신한 걸 아주 광고를 하고 있다. 미혼모를 결심했을 때, 당당해질 거라고 마음먹긴 했으나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자 난감했다.
“임신 축하드립니다.”
“…….”
축하라니. 처음 받는 축하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연서가 머뭇댔다. 그사이 태헌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해서 뒷좌석에 올랐다.
문을 잡은 태헌이 고개를 숙였다.
“아프면 연락하고 아까 그 얘기 천천히 생각해봐. 진심이야.”
“…이상해요.”
“알아.”
태헌이 꼭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처럼, 그렇게 보인 건 착각이겠지.
연서는 가려진 태헌의 목덜미 부근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지금 확실히 말하는 것이 맞다. 또다시 태헌을 만나 오늘 같은 대치를 할 것이 아니라면 얘기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지금 대답해도 되죠?”
“…….”
“못 들은 거로 할게요.”
그와 결혼이라니. 섹스 파트너가 되고 스폰을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