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경기도의 한 산부인과.
연서는 혹시 태헌이 사람을 붙였을까 봐, 병원에 오는 동안 뒤를 몇 번이나 돌아봤다. 다행히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괜한 긴장이었단 생각에 한숨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현호는 그동안 밀린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여념이 없어, 오늘은 연서 혼자였다.
일부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산부인과로 내원하고 있었다.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태헌 혹은, 그의 가족들이 알면 좋지 않으리란 생각이었다.
이곳 병원은 예약해도 기본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연서는 접수를 마치고 자리를 찾다가 포기하고 한쪽 벽에 섰다.
평일 낮인데도 아내와 함께 온 남편 보호자들이 꽤 됐다. 그들까지 벤치를 차지하니 남은 자리가 없었다.
아직 배가 나온 것도 아니라 양보를 바라는 것도 힘들었다. 연서는 등을 벽에 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란거리는 커플들이 괜히 눈에 들어왔다. 배 속의 아이는 아빠를 모르고 자라겠지.
그 사실이 미안하고 아팠다.
임신 사실을 안 건 한국에 돌아와서였다. 월경이 워낙 불규칙한 편이라 그 전엔 의심하지 못했다. 몸살이겠거니, 체한 거겠거니 안일하게 여겼다.
태헌과의 마지막 관계에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사정하지 않아 임신이라고 생각 못 했다.
그러다 영 미심쩍어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약국에서 테스트기를 샀고, 두 줄을 보았다. 병원을 찾았을 땐 아이는 벌써 10주가 넘어 있었다.
작은 곰돌이 같던 아이. 엄마조차 존재를 몰라줬던 생명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임신 초기인 만큼 주마다 내원했고 오늘은 세 번째 방문으로 아이는 어느덧 12주 5일이었다.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양보받는 산모를 보며 남모를 부러움에 미소 짓고 있던 연서는 아차 싶어 고개를 저었다.
아가야, 엄마 안 부러웠어.
그러니까 우리 아가는 이런 속상한 감정 느끼면 안 돼.
다리가 아파 이리저리 움직이며 지루한 시간을 견뎠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화장실에 가볼까 생각하던 차에 연서의 차례가 되었다.
“한연서 님, 들어오세요.”
연서가 얼른 벽에서 등을 떼며 진료실 앞으로 향했다.
“뒤에 계신 분은 남편분이세요?”
“네?”
무심코 뒤돌아본 연서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거짓말.
바로 뒤에 태헌이 있었다. 눈에 익지 않은 캐주얼 슈트를 입은 태헌이 연서의 뒤에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산부인과 병동 한복판에 그가 나타날 확률은 몇이나 될까.
“보호자 맞습니다.”
태헌이 낮은 목소리로 연서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우연은 아니란 소리였다.
“함께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상냥하게 안내했으나 연서는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사님이 여길 어떻게 오신 거예요?”
연서의 말끝에 황당함과 두려움이 자잘하게 묻어났다.
“일단 들어가.”
태헌은 자연스럽게 연서의 등을 받쳤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떨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태헌이 아이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단 얘기였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무슨 짓을 하려고 이래요? 싫어요, 안 가요.”
“무슨 짓?”
“아이는 내가 키울 거예요. 아이 지울 생각 없어요.”
“지우다니.”
“아이한테 손 하나 까닥해봐요. 가만히 안 있어.”
연서가 가방으로 배를 가리며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태헌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지만 아이만은 지켜야 한단 생각이 팽배해진 연서에겐 그 변화를 기민하게 해석할 여력이 없었다. 잠시 굳어 있던 태헌이 고갤 숙여 나직하게 말했다.
“긴장 풀어. 그래도 아빠인데 함부로 해칠 생각부터 하겠어.”
“한연서 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의아하게 묻는 간호사의 눈짓에 태헌이 대신 대답했다.
“들어갑니다.”
아빠. 그 단어가 주는 기묘한 어감을 곱씹던 연서는 반강제적으로 안으로 떠밀렸다.
“복부 초음파 하실 거니까 이쪽으로 누우세요.”
“침대가 높은데 누울 수 있겠어?”
“네. 알아서 할게요.”
연서가 매섭게 대꾸했으나 태헌은 뒤에 딱 붙어 그녀가 침대에 눕는 걸 지켜보았다.
간호사가 바지를 약간 내리고 아랫배에 수건을 끼우는 장면을 그가 바라보는 게, 연서는 문득 창피해졌다.
“내 아이예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재차 방어적으로 피력했다.
“산모가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데 바지를 너무 내리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 하는 거야?
뭐라고 하는 거야?
연서가 도끼눈을 뜨는데, 준비가 다 됐단 소리와 함께 의사가 들어왔다. 여자 의사는 상냥하게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고 팔다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전보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태헌이 의사에게 아이를 지울 수 있느냔 질문을 할까 봐 두려워 계속 촉각을 세워야 했다.
“12주가 넘어서 오늘은 1차 기형아 검사를 할 건데, 초음파상으로 확인할 수 있으세요.”
연서는 여러모로 긴장한 채 흙빛 화면을 바라보았다.
“목 투명대, 뇌 모양, 코뼈 모두 정상입니다. 오늘 채혈하시고 돌아가세요. 이제 철분제 챙겨 드시고요.”
“네.”
연서는 태헌를 경계하면서 아이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지난 1주일간 시간이 얼마나 안 갔는지. 빨리 아이를 만나고 싶어 가슴을 졸였다.
입체 초음파를 찍을 땐 와, 하고 탄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사람의 형상을 갖춰가는 작은 생명은 매번 감탄을 불러왔다.
“임신 초기는 지났으니 부부관계는 하셔도 되고요.”
태헌을 보며 의사가 싱긋 웃는 탓에 현실로 돌아왔다. 입을 뻐끔대는 연서와 다르게 태헌은 본연의 평이한 투였다.
“다른 주의할 점은 없습니까.”
“잘 드시고 잘 쉬시고 좋은 생각 많이 하시면 돼요. 물론 아빠가 많이 도와주셔야겠죠?”
“유념하죠.”
태헌이 잡아주는 손을 마다하고 싶었으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약간 어지러웠다. 진료실에 나와 채혈실 앞으로 향했다. 이쪽 복도도 자리가 없어 서서 대기해야 할 듯싶었다.
그 순간 태헌이 앞서갔다. 뭘 하려나 싶었는데…….
“자리 좀 양보해주시죠.”
“네?”
“그쪽이 임신하셨나?”
“아…….”
태헌이 그렇게 위압적으로 30대 남자를 내쫓았다.
“연서야, 앉아.”
연서야라니.
뭘 잘못 먹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난 자리에 연서가 앉았다. 벽 쪽으로 물러난 30대 남자가 흘긋 태헌을 보다가 헛기침을 한다.
태헌은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정면을 보고 서 있었다. 막막한 시간이 흘렀다.
“한연서 님.”
“네.”
“들어오세요.”
연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헌이 그 뒤를 따랐다. 실랑이할 기운이 없어 말없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왼팔 주시고요.”
연서의 핏줄이 잘 잡히지 않아 주삿바늘이 두 번째로 살갗을 찔렀을 때 태헌이 낮게 물었다.
“임신한 사람을 상대로 실습합니까.”
“…….”
“조용히 좀 있어요.”
연서가 재빨리 그의 입을 막은 뒤 새빨개진 귀를 어루만졌다.
태헌은 말없이 수납을 대신하고 연서와 함께 약국에 들러 철분제를 샀다. 택시를 타기 위해 큰길로 나가려던 연서가 뒤돌았다.
“어디까지 따라올 거예요?”
“괜찮으면 잠깐 얘기하고 싶은데.”
“혹시, 아이 달라는 말 하려는 거면 싫어요.”
태헌의 태도가 생각과 달랐다. 그는 의사에게 임신 기간 동안 유의할 점을 묻거나 연서의 진찰을 도왔다.
그렇다는 건, 태헌도 아이를 욕심낸다는 뜻이 아닐까.
세원가의 핏줄이니 데려가겠다는, 그런 끔찍한 말이라면…….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연서는 아까부터 울고 싶은 서글픈 마음을 꾹 누르고 다시금 말했다.
“아이는 제가 키울 거예요. 내가 품었잖아.”
태헌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채도 옅은 동공을 보였다.
“대체 임신한 건 어떻게 안 거예요? 또 사람을 붙인 건가요?”
“네가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또 다른 곳으로 갈까 봐.”
슬랙스와 셔츠 재킷뿐인 캐주얼 슈트와 평소보다 연한 향수, 그리고 미미하게 느껴지는 술 냄새까지.
그의 표정과 더불어 오늘 태헌은 정말 이상했다. 태헌의 존재감과 위압감은 변함이 없는데,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처음 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
“미안해. 미안하단 말을 먼저 해야 했는데.”
태헌이 제 눈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해. 너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사과라니. 무얼?
사람을 붙여서? 현호를 다치게 해서?
맞선을 봐서?
사랑해주지 못해서?
“연서야.”
태헌이 뭐라도 되는 양 다정하게 부르자 오기가 치밀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불쾌해요.”
“아이를 데려가겠단 게 아니라, 혼자 아이를 키울 생각인지 궁금한 건데.”
“누가 뭐라고 해도 키울 거예요.”
“나와 함께 키울 생각은.”
태헌의 눈동자에서 진한 상념이 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그는 어딘가 아픈 사람 같았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황폐해 보이기도 했다.
오만하고 고고한 분위기는 남아 있었으나 입을 열 때면 독한 그가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그때 생긴 것 같은데. 억지로, 그날.”
“…….”
“그래선 안 됐는데. 아이가 생긴 건 좋은데……. 너한텐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내 아이 맞지?”
태헌이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고 있단 걸, 연서는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이전 같지 않던 그의 태도를 되감아 보느라 태헌이 초조해하고 있단 걸 이제 깨달았다.
연서가 차게 식은 손을 말아쥐었다.
“이사님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아이를 함께 키우다니, 말도 안 돼요. 경제적 지원을 말하는 거라면 거절할게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아이는……. 백현호랑 상관없지?”
연서가 와락 눈썹을 구겼다.
“이사님.”
“알아, 아는데……. 하, 아기가 있다고 그러니까. 실감이 안 나고. 네가 혼자 키우려는 거잖아……. 그게…….”
태헌이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태헌은 반쯤 정신이 나간 것만 같았다.
“네 입으로 내 아이라고 말해주면 안 될까.”
“…뭐라고요?”
“심장 소리가 생각보다 크고 건강해서, 그래서 기분이 묘해.”
태헌이 잘생긴 눈가를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