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비서-60화 (60/85)
  • 60화

    *

    이런 허물어져 가는 집구석밖에 돌아올 곳이 없는 자신을 지적하는 것 같아서 또 아팠다. 자격지심이래도 하는 수 없었다. 그는 연서를 더욱 가난하게 했다.

    “우리 헤어졌고, 빚은 다 갚았어요. 이렇게 다시 보는 거 껄끄러워요.”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태헌의 묵직한 저음이 연서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를 천천히 뜯어보는 날 선 눈빛이 그녀의 비밀을 알아챌 것만 같았다.

    “아뇨. 저는 할 얘기 없어요.”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올래.”

    선선했던 바람이 돌풍처럼 불어와 연서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돌아오라니, 너무도 그다운, 그래서 마음이 아픈 말이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 애원이 담긴 것처럼 들렸다면, 당연한 착각이겠지.

    잠자리를 못 잊어 찾아왔겠지. 태헌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태헌이라면 다른 상대쯤은 금방 찾아낼 수 있을 터다.

    그저, 익숙한 향락을 못 잊은 것뿐이다. 그는 효율을 따지는 사람이니 곧 새 사람을 만나는 게 더 편리하단 걸 깨닫겠지.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한연서.”

    “부탁인데,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연서가 힘겹게 진심을 토해냈다.

    “이렇게 사는 걸 봤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해.”

    “이렇게요?”

    “내 말은…….”

    “모르셨어요? 이게 제가 사는 모습이에요. 그리고 이사님이 여길 또 찾아오시면, 저는 마지막 발 디딜 곳까지 잃겠죠. 이사님은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지만…….”

    “네 오피스텔 그대로 있어.”

    역시나 그는 몰랐다. 연서의 가난한 자존심을, 그것이나마 지켜야 하는 그녀의 고단한 삶을.

    “제가 사는 집은 여기예요.”

    “이 동네 위험해. 거처만 옮겨. 그래야 내가 마음이….”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한 번 더 찾아오면 신고할 거예요.”

    태헌에겐 같잖은 협박이겠지만, 연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으름장이었다. 연서는 힘이 없었으므로 태헌이 억지로 끌고 간다고 해도 반항할 길이 없었다.

    그걸 알기에 더욱 가시를 세울 수밖에.

    연서는 그대로 태헌을 지나쳐 일부러 씩씩하게 걸었다. 혹시 붙들릴까, 끌려가게 될까 걱정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봉투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배를 감싸 쥐었다. 아릿한 통증이 아랫배를 스쳤다. 아기집이 튼튼해지고 있단 방증이었다.

    태헌을 만나 가장 마음이 아팠던 날 생긴 아이, 그래서 더 애틋했다. 연서가 살아갈 힘이 되어줄 생명이 그녀의 안에 깃들었다.

    “엄마가, 지켜줄게.”

    넌 꼭 지켜줄 거야. 연서가 흐리게 웃었다.

    그 사람이 널 해치지 못하게, 방해물 취급당하지 않게 지킬 거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태헌은 어떻게 나올까.

    역시나 수술대로 끌고 갈까.

    연서의 눈물이 하얀 뺨을 가득 적셨다.

    *

    산부인과 기록과 초음파 사진이 태헌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연서의 행방을 수소문할 때 의료 기록까지 염두에 두었다. 그랬더니 신 비서가 이런 걸 가져왔다.

    산부인과. 아이의 초음파. 그녀가 임신했다.

    백현호 애는 아니겠지. 날짜만 따지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박한 가설이었다. 연서는 평생 가족처럼 여겨온 현호와 쉽게 잠자리를 가질 성격이 못 되었다.

    사진에 11주 5일이란 날짜가 찍혀 있다. 사람 형상이 제법 잡힌, 그렇지만 몇 센티 되지 않은 생명이 연서의 몸 안에 자리 잡았다는 게 영 믿기질 않는다.

    여태 지우지 않았다면 혼자 키울 생각이란 뜻이었다.

    아니면 백현호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려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견딜 수 없었다. 태헌은 초음파 사진을 쥐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오피스텔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이젠 연서의 향이 사라져버렸으나 태헌은 오피스텔을 벗어나지 못했다. 연서를 다시 만난 후부턴 업무엔 손도 못 대었다. 독한 술이 아니면 숨 쉬는 일조차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괴로웠다.

    코에 뜨끈한 것이 흘러나왔다. 욕실로 달려간 태헌은 찬물로 연거푸 세수했다.

    “하아…. 씨발.”

    거울 속에 시뻘게진 눈으로 거울을 쏘아보는 태헌이 있었다.

    내가 이런 얼굴이었나. 괴물 같은, 형상.

    그래, 그는 괴물일지 몰랐다.

    그래서 연서가 가버린 거야.

    태헌이 비틀비틀 욕실에서 빠져나와 거실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위스키를 병째 쥐었다.

    독한 위스키를 퍼부어도 잠이 잘 오질 않았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면 싶을 만큼 괴로워서…….

    소파에 기대앉은 태헌이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낮이 되었다가 밤이 되었다가. 사무치는 시간 속에서 태헌은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창밖의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다만 지금이 몇 시인지, 며칠이 되었는지. 모르게 되었다.

    이게 벌이라면 흐르는 시간이 의미가 없어진 태헌에겐 영원한 벌일지 몰랐다. 아까부터 누군가 현관을 두드리고 벨을 눌러대고 있었다.

    “시끄럽게.”

    욕설을 중얼거린 태헌이 널브러져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슬리퍼가 건조하게 대리석 바닥을 스친다.

    태헌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현관으로 나가자, 화면에 선예가 있었다.

    이 아줌마는 또 왜.

    태헌은 긴 바지만 입고 있음에도 상체를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포장에 힘쓰는 것이, 모든 것이 귀찮았다.

    열림 버튼을 눌러 불청객을 안으로 들였다.

    “세상에. 술 냄새.”

    선예가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공동 현관은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이 건물 내 거야. 그것도 몰랐니?”

    “아, 그러셨나.”

    병원과 가까운 데로 거처를 잡으랬더니 신 비서가 멍청하게 선예의 건물로….

    “태헌아 너 진짜 미친 거니? 회사는 왜 안 나가? 지금 임원진들 사이에서 말이 어떻게 도는 줄 알고 이러는 거야?”

    “개새끼들 짖는 게 무서워서 밖으로 끄집어내시게요.”

    선예가 태헌의 게으른 팔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기함했다.

    “너……. 태헌아, 이게 무슨……”

    “아니면 다 큰 아들 살림 간섭하러 오셨나.”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던 선예가 주방 앞에서 얼어붙었다. 얼마나 패악을 부렸는지 주방의 집기가 모조리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 깨져 있었다.

    “도둑이라도 든 게 아니면, 이걸 다 네가 그런 거야?”

    거실의 장식품도 마찬가지였다. 흉측한 파편이 되어 집 안 곳곳에서 날카롭게 도사렸다. 마치 요즘의 태헌 같았다.

    “집 구경 다 하셨으면 본론만 하세요. 피곤합니다.”

    “이 미친 자식이!”

    선예가 쿵쿵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꽉 닫힌 문을 활짝 열었다.

    여자 옷이 침실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마치 그것을 끌어 쥐고 있기라도 한 듯 구겨진 행태가 변태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침실은 양반이란 게 위안일까. 다시 돌아간 거실은 테이블 위 술병을 제외하고 멀쩡한 게 없었다.

    어질러진 바닥은 돼지우리만 못했다. 깨진 잔을 밟을까 선예는 뒤늦게 발을 오므렸다.

    바닥 군데군데에 핏자국까지 있었다. 선예가 빠르게 태헌의 몸을 훑었다. 어디 자해라도 했나 싶어서.

    아무런 상흔을 발견하지 못해 작게나마 안도했다.

    “……이건 또 뭐니? 태, 태헌아!”

    “소리 지르지 마시고. 그건 내려놓으시고.”

    태헌이 손을 뻗어 선예가 불쑥 집어 든 초음파 사진을 거둬갔다.

    아이를 둘이나 낳은 선예가 초음파 사진을 몰라볼 리 없었다. 조그마한 새 생명에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태헌이 어디 흘리고 다닐 성격은 아니었다.

    흘린 게 아니면, 일부러……?

    태헌이가 정말 한연서란 아이에게 미쳐서 이성을 상실한 건가?

    아니다. 일부러 임신을 시킨다는 건 태헌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수겠지. 그러나 실수도 태헌에겐 없는 단어였다. 선예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너 정말…!”

    선예는 점점 망가져 가는, 회사 일을 내팽개치고 막 나가는 아들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방법을 알지 못했다.

    윽박과 협박이 통할 나이도, 그럴 성격도 아니었다. 아니 한 번도 선예는 아들을 제 뜻대로 다뤄본 적이 없었다.

    선예가 침착함을 되찾고 물었다.

    “네 아이니?”

    “그럼 남의 애 끌어안고 이 지랄 떨고 있겠습니까.”

    “내가 정말, 이 일을 어떻게…….”

    “이제 속이 시원하실 것 같은데.”

    “…뭐?”

    “아들이 감정이 없어서 평생 마음 졸이셨잖습니까. 박 교수님이 우려했던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나 봅니다. 다른 쪽으로 개차반이 된 건 유감이지만.”

    “너, 너 그게 엄마한테 지금 할 말이야?”

    “내키시는 대로 말하는 분이잖아요. 왜, 지금에서야 천륜이 중요해지셨습니까.”

    선예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제 잘못을 지적하는 태헌의 태도 때문은 아니었다.

    완벽에 가까웠던 태헌이 처참하게 무너진 이유에 그녀의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헌에게 인간적인 면이 있긴 있었단 사실에 다행이라 위안하면서도 이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으려다 보니 막막했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는 선예를 보던 태헌이 지겹게 한숨 쉬었다.

    “그럼 아이는 어쩔 거니? 설마 그 아가씨가 안 보여주겠다니?”

    “염치도 없이.”

    태헌이 비식거렸다. 연서를 몰아내는 데 일조한 선예는 태헌만큼이나 염치가 없었다. 그가 모친 앞에 바로 섰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하죠. 두 번 다시 연서한테 관여하지 마세요. 등신 같으나마 이름 석 자 남은 아들마저 잃고 싶지 않으면 그래야 할 겁니다.”

    “나 사과하러 온 거야.”

    “그럼 마음 받겠습니다. 돌아가세요.”

    초췌하고 술에 전 꼴이지만, 태헌의 말투는 흔들림 없이 또박또박했다. 정신이 남아 있단 소리였다.

    선예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이 이상 긁었다간 사태를 더 악화시킬 거란 판단을 내린 것이다.

    불청객을 문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 태헌이 돌아섰다. 침실로 돌아가 문을 닫곤 연서의 옷가지 위로 쓰러졌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서 괴롭다.

    차라리 기억을 잃고 싶다가 그럼 연서를 잊는 게 되니 불가하단 판단을 내린다.

    그럼 이대로 죽고 싶다.

    영혼이나마 마음껏 너를 볼 수 있게.

    네가 예쁘게 웃는 모습, 네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 볼 수 있을 테지.

    그렇게 바람처럼 흘러 햇살 같은 너에게 닿고 싶다.

    너는 햇살이었고 나는 그런 널 지워버린 어둠이었으니 내가 없어야 너는 행복한 건데.

    태헌은 일어나 약통을 열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주치의에게 받은 수면제였다. 효과가 없어 모아둔 건데 양이 꽤 되었다.

    약을 세다가 태헌이 느리게 웃었다.

    어떤 방법이든 좋으니 연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