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자동차가 시원하게 질주하는데도 느리게만 느껴졌다.
“이사님, 여기서부턴 걸어가셔야 합니다. 이거 받으십시오.”
신 비서가 손수 쓴 메모를 태헌에게 건넸다. 간략한 약도였다.
“여기부턴 혼자 가죠.”
“저, 이사님.”
“말해요.”
“그렇다고 사람을 해치시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신 비서가 걱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뒷좌석을 돌아보고 있었다. 전에 사채업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백현호를 죽여 놓을까, 걱정이라도 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신 비서가 보고 있다가 내 머리를 후려치든가.”
“네?”
안절부절못하는 신 비서를 뒤로하고 태헌이 차에서 내렸다. 시답잖은 실랑이를 할 여유가 없었다.
태헌이 까마득한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걸 달동네라고 하나. 계단을 오를수록 폐가의 빈도가 높아졌다. 곳곳에서 리모델링을 마친 새집이 눈에 띄기도 했다.
묘한 광경이었다. 계단을 오르다 골목에 접어든 태헌이 녹슨 초록색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엉성한 대문과 담 너머로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달린 집이 보였다. 낡은 마루와 옆으로 밀리는 녹은 새시, 그리고 주방으로 향하는 작은 철문.
오래된 집은 사람이 살 만한 데가 못 되었다. 설마 거주 목적으로 온 건 아니겠지, 불편한 생각이 똬리를 틀었다.
“현호야! 휴지 산 거 어디 뒀어?”
돌연 들려오는 연서의 목소리에 태헌이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연서다, 정말 한연서였다.
한 달 넘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연서가 바로 그의 앞에 있었다.
몇 걸음 안에, 곧 닿을 거리에.
“휴지? 작은방인가? 거기 뒀을 듯?”
“와…… 먼지 진짜 많다. 이거 언제 치우지?”
“연서야, 그냥 사람 쓰자. 이건 안 돼.”
끼이익. 부엌문이 열리고 연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늙은 나무 뒤에 서 있던 태헌은 연서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극렬히 거대해진 사랑을 실감한 터다.
머릿결이 물결처럼 하늘거리는 한연서. 예쁘게 눈을 휘어 웃는 한연서.
얇은 반소매 티셔츠에 물이 빠진 짧은 청바지, 조금 춥지 않을까 걱정되는 모습으로 연서가 조그마한 마당으로 나왔다.
쿰쿰한 흙냄새가 느껴지는 마당이 걱정거리인 양 그녀가 한숨 쉬었다.
“여기도 난리구나.”
심장이 조각조각 갈리는 것처럼 흉통이 일었다. 겨우겨우 버티던 것이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려선.
두 다리가 알 수 없는 암흑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그는 매몰되어 가고 있었다.
생긋생긋 잘도 웃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연서를 보자 거대한 벽을 마주한 듯 아득해졌다.
착각했던 거다. 연서가 자신처럼 외로운 몰골로 저를 기다릴 거로 생각했다.
찾아오길 오길 기다리고 있을 줄만 알았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태헌은 담벼락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나둘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의 뺨과 턱을 적셨다.
태헌이 돌아섰다. 지금 돌아서야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겠단 생각이었다. 지금 연서에겐 태헌이 필요치 않았다.
그 순간 녹슨 대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당신, 맞죠?”
허스키한 목소리로 태헌을 부른 건 현호였다.
태헌이 무감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현호가 한 손에 쥐고 있던 접힌 우산을 내밀었다.
“받아요. 비 많이 오는데.”
“…연서는.”
“네. 잘 지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마음 잘 잡고 잘 사는 애 흔들지 마시고, 찾으려고도 하지 마시고.”
“찾는 걸 알았나.”
“뭐 덕분에 연서 속이면서 뺑이 좀 쳤죠. 그러니까. 이제 형님은 형님네 세상 가서 사세요. 우리 불쌍한 연서 괴롭히지 마시라고요.”
척척 걸어온 현호가 태헌의 손에 억지로 우산을 들렸다. 그러곤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연서한텐 이런 사람이 필요할지 모른다. 인간적이고 따뜻한 강 여사 같은 사람.
태헌은 자신의 부족함을 처절하게 느꼈다. 하지만 이게 우태헌이었다.
비인간적이고 오만한, 군림밖에 모르는 기계적인 인간.
다시 태어나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을 텐데.
그는 자신이 우태헌인 게 저주스러웠다.
*
오래 방치한 집은 손볼 곳이 많았다. 낡고 고장 난 것뿐 아니라 청소할 거리가 산더미였다.
한꺼번에 많이 하진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치우는 중이었다. 전문업자를 불러 수도와 보일러, 화장실을 손보고 나니 그래도 사람 사는 집처럼 변했다.
연서는 반질반질하게 닦아 둔 마룻바닥에 앉아 사과를 깨물었다. 아삭하고 달콤한 가을 사과에서 향긋한 즙이 터져 나왔다.
다리를 달랑거리며 흙밭이 조그마하게 난, 마당을 바라보았다.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 틈새를 비집은 이끼 같은 잡초가 꼭 저 같아서 옅은 웃음이 났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태헌을 떠났다. 어떻게든 숨 쉬어 보겠다고 그를 등졌다.
그리고 연서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여전히 아프고 괴로웠지만 강렬한 사랑을 해볼 수 있었단 위안을 남긴 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 들면 높은 하늘이 보였다. 캐나다와 필리핀, 일본처럼 좋은 풍경은 아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연서야, 밥 먹자.」
「연서야, 콩나물 간 좀 볼래?」
이 집 부엌 안쪽에서 상냥하고 따뜻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먹먹한 감상에 젖을 때가 있었다.
이 집은 사채업자가 압취해 매매에 내놓았는데, 팔리지 않고 있던 걸 현호가 다시 매입했다. 현호에겐 계속 미안한 일뿐이었다. 내후년쯤, 몸 좀 추스르면 그때부턴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아야지.
현호는 천천히 갚으라고, 힘들면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무시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빚은 갚아야 하는 성미기도 했다. 현호에게 문식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엄마의 생각만 나면 좋으련만, 술 취한 문식이 행패를 부리던 모습이 집 안 곳곳에 오염처럼 남아 있다.
연서는 먹던 사과를 내려놓고 조심히 제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다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응. 현호야.”
-나 좀 늦을 듯하다. 회식 튀려다가 걸려버렸네.
“혼자 있을 수 있다니까.”
현호는 제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으나, 언제까지 그의 집에 얹혀 지낼 수 없단 생각이었다. 현호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연서가 너무 가까이 있으면 방해가 되었다.
-왜 혼자냐? 이제 둘이지.
“그러네. 자격 없을 뻔했어.”
-갈 때 뭐 사갈까?
“그럼 멜론 아이스크림. 그거 먹고 싶어.”
-밥을 잘 먹어야 하는 건데. 쯧. 아 부른다. 들어갈 때 전화할게.
“응.”
현호는 거의 매일 연서의 집으로 퇴근했다. 이럴 바엔 현호의 집에서 지내는 게 나을까 싶기도 하다가 그에게 의존하는 게 버릇돼선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집에 들어가 새 이불을 덮고 묘한 흙냄새를 맡으며 잠들었다.
일어나니 시계가 저녁 7시 10분을 가리켰다. 저녁을 먹어야 할까.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려면 뭐라도 먹는 게 도움이 될 텐데.
연서는 고민하다가 방 밖으로 나왔다. 마루에 앉아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녁 7시가 되면 그 사람이 왔다. 모르는 체하고 있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멀리 멀리 달아나서 덜어내야 했을 만큼 우태헌은 한연서의 인생에 너무나 큰 자국을 남겼다.
왜 찾아온 걸까. 어떻게 여기 있는 아는 걸까.
섹스하고 싶어져서 찾은 거냐고, 돌아가라고 쏘아대고 싶은데 말을 섞었다간 칠칠찮게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여전히 나약한 모습을 들킬까 봐, 선뜻 나서기 꺼려졌다.
그에게 거듭 상처 받을까 봐.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모진 말로 상처 입히려는 이유일까 봐.
아니, 그러려면 벌써 그랬을 남자려나.
태헌이 선사하는 어쭙잖은 동정에 마음이 흔들려 그와 또다시 얽혀들까 봐. 온전히 거두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불씨처럼 되살아날까 봐.
우태헌을 두 번 사랑하고 괜찮을 자신이 없었다. 빈껍데기만 남을 뻔한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건 온전히 다른 존재였으니.
오늘은 없는 걸까. 하긴, 매일 오는 것도 이상하지.
연서는 대문 너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우습다. 뭘 확인하려던 걸까.
연서는 지갑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조심조심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저녁거리로 콩나물을 사고 현호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 힘들어 아이스크림도 샀다.
검은 봉투를 들고 올라오다가 잠깐 허리를 폈다. 순간 눈앞의 계단이 흐릿하게 보였다. 빈혈일까. 아직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어.
연서가 휘청이며 비틀거리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 감사, 합니다.”
이마를 짚고 숨을 쌕쌕 내쉬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올려다본 곳에 태헌이 있었다.
손을 뻗은 그는 아주 가까웠다. 그 사실 하나로 연서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태헌과 어울리지 않은 주황색 침침한 가로등 아래에서 그가 부쩍 까칠해진 낯을 드러냈다.
도드라진 턱 선과 눈매가 태헌인 듯 태헌이 아닌 듯했다. 여전히 그는 커다랬으나 전체적으로 조금 살이 빠진 것 같았다.
연서가 숨을 흩트리며 말했다.
“놔 주, 세요.”
손목을 비틀었다.
“위험해. 올라오면 놓을게.”
그의 말투가 누그러진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이겠지.
또 이런 식으로 사람을 현혹해서 마음을 놓게 한 뒤에 아무렇지 않게 짓밟으려는 수작일 거야.
현호와 지영이를 위험하게 할 거야.
냉철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태헌은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한연서라는 인간을 방해 없이 안기 위해서라면 그게 누구라도 해칠 사람이었다.
태헌은 연서가 온전히 골목으로 들어간 뒤에야 손을 놔주었다.
“여긴 왜 오셨어요?”
생각보단 메마른 음성으로 물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몸은 괜찮아?”
“이제 저희 볼일 없는 거로 알아요.”
“잘 지낸 거지. 그래 보이긴 하다만.”
그래 보인다는 말이 꼭 비웃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