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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58화 (58/85)
  • 58화

    *

    혼전 임신으로 인한 결혼으로 선예는 부단히도 이혁을 미워했고 증오했다. 지금도 이혁과 선예의 사이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태헌의 냉철하고 정 없는 면모는 이혁을 닮았다. 그래서 선예는 제 꿈을 꺾은 이혁을 닮은 태헌에게 더 모질게 굴었다.

    “사랑, 이요. 아버지도 그런 걸 하셨습니까.”

    사랑, 어색한 단어가 혀끝에 들러붙었다.

    이혁이 먼 곳을 보며 잠깐 웃었다.

    “그러니 아직 살 붙이고 살지 않아?”

    “의미 있습니까? 한쪽은 원망을, 한쪽은 사랑을.”

    “네 엄마가 날 탐탁지 않아 하는 건 사실이지만, 온전한 증오는 아닐 거다. 어디 아이 하나 살리겠다고 내 곁에 남아줄 사람이겠어.”

    혼전 임신이 선예의 발목을 붙잡았단 말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선예라면 모정 대신 자신을 택했을 법했다.

    아이를 포기하는 더 현명한 선택을 하지 않고서 왜, 이혁의 곁에 남은 건가.

    결국 애정이 섞인 증오. 애증이었단 건가.

    이혁에게 미처 닿지 못한 증오를 태헌에게 쏟아부은 것이고.

    방관자인 이혁과 아들을 증오한 모친. 태헌은 이제 와 그들의 사랑에 이용당했단 더러운 기분에 매몰되었다.

    “너는, 그 아이 사랑하지 않아?”

    그러나 그다음 이어지는 말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리가 얼얼해졌다.

    “사랑이요.”

    사랑. 상투적이고 흔히 남발하는 마음의 무게.

    그러나 태헌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누구든 둘러댈 수 있는 가벼운 말이기도 했으니.

    “그래, 그 아가씨를 사랑하는지. 확신이 안 서?”

    “글쎄요. 그런 정의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필요 없습니다.”

    “네가 아니라 그 아가씨에겐 필요했을 거다.”

    연서가 사랑한단 정의를 필요로 했을 거라고.

    쓴 약을 강제로 삼킨 것처럼 입 안이 떫어졌다.

    태헌이 깊게 잠긴 눈으로 뒤돌아섰다. 그대로 본가를 빠져나왔다.

    서두르지 않고 돌계단을 내려와 운전대를 잡았다.

    “하…….”

    사랑. 그걸 정말 바랐나?

    문득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잔상처럼 떠올랐다.

    「이사님은 제가 원하는 걸 절대 줄 수 없어요.」

    설마, 연서야.

    무지했었다. 태헌은 이제야 모든 고리가 풀린 것처럼 머릿속이 명쾌했다.

    갑자기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의 심장엔 사랑이 머물러 있었다.

    머릿결을 물결처럼 흩트리며 그네 앞에서 웃던 한연서는, 처음부터 사랑이었다.

    그래서, 예뻐서. 네가 특별해서 그렇게 모질게 몰아붙이고 관심을 주고 안달을 냈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은 사랑이 아닐 것이다.

    이건 사랑이었다.

    이제 태헌에게 사랑은 흔해 빠진. 언제든 수거할 수 있는 불완전한 단어가 아니었다.

    완전무결하고 충만한 가치였다.

    연서가 원하는 게 이거라면 태헌은 이미 주고 있었다.

    “사랑해.”

    쥐어짜듯 나온 목소리가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같은 통증이 가슴을 덮쳤다. 운전대를 힘껏 움켜쥐었다.

    “…사랑해.”

    시험하듯 낱말이 흩어졌다. 화마에 휩싸인 것처럼 흉통이 일었다.

    “사랑해.”

    넘치고 넘쳐 결국 흘러나와버린 때 지난 고백이었다.

    이 마음의 주인인 연서가 곁에 없었다.

    그때라도, 말했어야 했다.

    연서가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가 싫다고, 솔직하게 매달렸던 날.

    날 좋아하지 않냐며, 추궁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말했어야 했다.

    너를 사랑해서 내몰았다고, 유치하고 서툰 사랑을 고백했어야 했다.

    연서가 배가 아프다며 전화한 날도 곧장 달려갔어야 했다.

    수술을 마친 그녀의 곁에서 사실은 손을 잡아주고 싶었고 너의 보호자가 되어 내게 의지하도록…….

    강원도 여름밤, 너를 백현호에게 빼앗긴 것처럼 가슴이 식어버린 그 시간.

    연서가 돌아오길 오만하게 기다릴 게 아니라, 2차선 도로를 건너 담을 뛰어넘어야 했다.

    용서를 구했어야 했다.

    태헌이 차게 식어버린 손으로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네. 이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신 비서가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요즘 태헌의 태도가 이상하니, 갑작스러운 전화에 긴장한 기색이었다.

    “한연서,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연서의 세계를 망가뜨려야 그녀가 제 것이 되는 게 아니었다.

    사랑한단 말을 꺼내 놓아야, 너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원하는지 고백해야 네가 떠나지 않았던 건데.

    이 쉽고도 간단한 이치를 깨닫는 게 느렸다.

    「네가 끝내자고 한 거야. 후회하지 마.」

    병원에서의 마지막, 연서에게 했던 모진 말이 그에게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관계를 이별로 몰아넣은 건 태헌이었고 그는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사랑을 알지 못하게 태어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날이었다.

    처절하게 후회했다.

    *

    결근한 지 닷새째. 태헌은 오피스텔에서 재택근무 중이었다.

    연서를 찾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터라, 실상 회사에서 업무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내린 결정이었다.

    캐나다를 뒤지고 있으나 넓은 땅덩이에서 연서를 찾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찾았다 싶으면 그녀의 행방이 묘연해지기 일쑤였다.

    태선을 찾아가 족쳤으나 얻은 건 없었다. 태선이 연서에게 돈을 얼마간 빌려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단 시시한 정보만 입수했다.

    현호가 함께 갔으니 그의 돈으로 생활하고 있을 터. 연서가 사라진 날, 윤해를 통해 수억이 찍힌 통장을 건네받았을 때 얼마나 허탈하게 혀를 찼는지.

    그렇게까지 하는 연서가 그땐 미웠다. 현호 때문에 헤어지자, 말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제 안다. 태헌의 실수로, 그의 독단으로 연서는 달아난 거다.

    “여보세요.”

    태헌이 일어나 창가에 붙어서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는 그의 미간이 점차 좁아지다가 결국 이마를 짚는다.

    “좀 더 찾아보세요. 보수는 얼마든지 지급할 테니. 최대한 빨리.”

    핸드폰을 쥔 손이 무력하게 툭, 내려갔다. 태헌은 돌아와 노트북이 켜진 테이블에 앉았으나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신차 출시를 상무의 손에 넘긴 게 어제였다. 태헌이 몇 년 전부터 준비한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였으나 남의 손에 맡길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실상 어찌 되든 상관없어졌다. 태헌이 원하는 건 세원 자동차의 대표 자리가 아닌, 연서였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요즘은 부쩍 이런 시간이 많아졌다. 1분을 1시간처럼 아껴 쓰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던 그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수시로 멍청해지고 있었다.

    신 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보나 마나 업무 전화일 테지만 혹시 모를 마음에 핸드폰을 재빨리 귀에 붙였다.

    -이, 이사님! 찾았습니다. 필리핀에서 목격했답니다. 백현호 팬이 SNS 계정에,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봤다고 해요! 사진도 있는데 옆모습이 한연서 씨 맞는 것 같습니다.

    흥분한 신 비서의 목소리에 덩달아 체온이 올라간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항까지 한 시간이면 됩니다. 바로 출국 준비하죠.”

    -네?

    “내가 직접 갑니다.”

    *

    한 달 뒤.

    태헌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빠른 항공편을 구하기 위해 비즈니스석을 이용했다.

    대기 없이 바로 빠져나왔음에도 한 달간의 바쁜 여정으로 인해 신 비서의 얼굴엔 수심과 피곤이 한가득했다. 반면 한 발 앞서 걷는 태헌은 살이 조금 더 빠진 것 말곤 태평했다.

    하지만 이제 신 비서도 안다. 태헌이 평정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란 것을. 연서를 놓칠 때마다 그가 어떻게 어두워져 가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기에 태헌이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약 올리듯 해외를 빙빙 돌던 연서가 귀국했단 소식에 두 사람도 냉큼 한국으로 들어온 차였다.

    핸드폰이 울리자, 신 비서가 깜짝 놀라 얼른 전화를 받았다. 상대의 말을 전해 듣는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한 달 새 추레해진 몰골과 다르게 웃는 얼굴만은 기뻐 보여 겉보기엔 조금 미친 사람 같기도 했다.

    그 옆에서 무심하게 캐리어를 끌던 태헌이 걸음을 멈추고, 어서 말하라 눈짓했다.

    전화를 끊은 신 비서가 두 손을 앙증맞게 움켜쥐곤 말했다.

    “이사님, 찾았답니다!”

    “그 얘긴 이제 못 믿고. 확실한 건가?”

    “네! 이번엔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한연서 씨 나고 자란 집에 계시답니다.”

    나고 자란 집? 태헌이 빠르게 연서의 옛 주소를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거긴 왜 간 거지?”

    “네. 방금 김현영 씨가 두 눈으로 확인했다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준다고 했는데……. 어, 메시지가 왔습니다.”

    태헌이 재빠르게 신 비서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도착한 사진을 클릭하고 흐린 인영을 한껏 확대했다.

    허름한 담벼락 너머에 흐릿한 잔상이 귀신처럼 찍혀 있었다.

    “씨발. 이걸 누굴 보라고 찍어.”

    태헌이 거칠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연서가 확실했다. 콩알만 하게 찍힌 얼굴이지만,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화질이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흐린 인영에 그의 심장이 반응했으니,

    “서두르죠. 차는.”

    “대기 중입니다.”

    신 비서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대꾸했다. 태헌은 게이트를 빠져나와 준비된 차에 재빠르게 올랐다.

    기사가 운전대를 잡고 능숙하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지난 한 달간 연서를 찾기 위해 공항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몰랐다.

    연서는 세계 일주라도 계획한 건지 번번이 태헌보다 앞서서 움직였다. 캐나다에서 필리핀 그리고 일본으로 이동하더니 그 후에 아예 잠적해버렸다.

    백현호의 주변까지 뒤졌으나 이렇다 할 만한 연고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국에 들른 뒤 하루 후. 바로 일본으로 향한 뒤엔 아예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덕에 연서를 찾는데 애먹었다. 외국이란 점도 걸림돌이 되었다.

    또한 연서가 모르게, 또 태헌의 가족들 모르게 찾는 데 한계가 있었다. 선예나 태선이 또다시 연서에게 찾아가 개소리를 해대면 곤란하니 먼저 찾아야 했다.

    연서가 상처 받고 놀라지 않도록 태헌이 먼저 지켜야 했다. 이번엔 꼭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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