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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57화 (57/85)

57화

*

불 꺼진 오피스텔이 태헌의 걸음에 맞춰 하나씩 점등되었다. 태헌은 현관과 복도, 주방을 지나 거실과 침실까지 걸어갔다.

연서가 지내던 공간엔 아직 미미하게 그녀의 향이 남아 있었다. 침실에서는 특히나 연서의 머릿결에서 나던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그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태헌은 업무가 끝나면 레지던스가 아닌 이곳으로 향했다.

처음엔 버틸 만한, 이내 잊혀질 만한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연서가 보고 싶다는 염원은 색이 짙어졌다.

그녀를 품에 안고 싶단 원초적인 갈망은 태헌의 모든 시간을 뒤흔들었다. 물감 번지듯 빠르게, 태헌은 무언가에 잠겨가고 있었다.

태헌은 샤워한 뒤 침실에 긴 몸을 묻었다. 손등을 이마에 얹고 잠이 오지 않은 밤을 고독하게 버텼다.

수시로 날아드는 연서의 말간 얼굴과 맑은 목소리가 그를 더욱 힘겹게 했다.

「이사님은 음식 뭐 좋아하세요? 저는 고기 좋아해요. 특히 치킨.」

「이사님, 저 다리가 풀렸나 봐요. 안아주세요.」

「그만, 그만해…. 흣, 이 나쁜!」

이곳 침대 위에서 연서가 했던 말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나 죽은 가슴을 난도질했다.

“하…….”

설렘에 잠긴 다갈색 눈을, 뛰는 박동을 숨기지 않던 솔직한 마음을, 복숭아처럼 붉어진 뺨으로 예쁘게도 살랑거리던 연서를 이제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돌아섰고, 그 이유는 태헌이었다. 그의 방식이 독이 되어 연서를 몰아낸 거다.

「냄새, 다른 여자 향수 냄새나잖아요.」

「아뇨. 이런 건 보호가 아니라 감시예요.」

「…여기에 그 사람, 데려오셨잖아요.」

「왜 그러셨는지 탓하지 않을게요. 대신 현호, 제자리로 돌려놓으세요.」

「그럼요? 그런 짓을 벌이시고도 저한테 떳떳하신가요?」

「이사님은요, 비열해요.」

「이사님은 원래 나쁜 사람인데, 그걸 제 탓하는….」

연서는 순진했고 순수했으며 현명했다. 태헌에게서 벗어난 건 어쨌든 그녀에겐 옳은 방향이었다.

「사람 마음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짓밟을 수가 있는지……. 저는요, 이사님이 무서워요. 자꾸 상처를 주니까.」

연서를 다치게 하지 않을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감히 한국까지 떠나버린 연서를 힘으로라도 데려와 눈앞에 둔다면 괴롭게 들끓는 심정이 해소될까.

「…좋아해요. 그렇지 않으면 미쳤다고 이렇게까지 하겠어요?」

그리운 목소리, 뺨, 입술. 너.

하, 올라붙은 아래를 보다 바지를 내리고 단단한 것을 쥐었다. 핏줄 돋은 손등이 열감을 쥔 채 운동했다.

보고 싶다. 안고 싶다. 원하고 있다.

…돌이키고 싶다.

연서를 그렇게 보낸 것에 대해. 그녀의 세계를 망가뜨리기 위해 서슴지 않던 비열한 짓을 후회했다.

그녀를, 한연서를 좋아한다.

좋아해.

태어나 누굴 이리 좋아해 본 적 없는 괴물 같은 놈이라 알지 못했다.

연서의 살갗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어렵지 않게 절정에 도달했다. 표출하는 진액이 뚝뚝 미련을 흘렸다.

“하, 한연서…….”

그녀를 유일하게, 좋아한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누군가 칼로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다.

태헌의 욕심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토록 과오를 저질러놓고선 연서를 되찾을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

이혁의 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태헌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외부 행사를 마친 이혁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

먼저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일어나 그의 귀가를 맞이했다. 그 가운데서 태헌은 감정 없이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본가의 음식은 대부분 싱겁고 심심한 건강식이었다. 선예의 취향이 반영된 상차림이 오늘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테이블을 훑은 태헌은 연서가 좋아할 만한 게 하나도 없단 생각을 하다가 자조하듯 웃었다.

또 한연서 생각.

“먹자.”

이혁이 무뚝뚝하게 말을 꺼내자 선예와 태선, 태선의 남편 정운이 수저를 들었다.

태헌은 물로 목을 축였다. 식욕은 없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수면욕과 식욕이 동시에 증발했다.

그 상실한 에너지는 연서를 그리워하는 것에 쏟고 있었고.

“태헌이 너는, 살이 좀 빠진 것 같구나.”

이혁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아들의 상태를 물었다.

체중 변화까지 신경 쓸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이혁이 보기에도 태헌의 상태가 눈에 띄게 달려진 것뿐.

5㎏이나 빠진 태헌은 보는 사람마다 인상이 더 날카로워졌다는 말로 염려를 표했다.

“예.”

“요즘 해외 마케팅 문제로 바쁘다더니.”

“생신상에서 할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니 상관 마시란 정떨어지는 대답을 하곤 수저를 들려다가 내려놓았다. 선예가 눈살을 찌푸렸다. 태헌의 태도를 불편하게 여긴단 신호였다.

태헌도 웬만하면 오늘 같은 날엔 화목한 가족 놀음에 맞춰 주려 하지만, 지금 상태론 그럴 여력이 없었다.

누구 기분을 살피고 제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계산하는 게 잘 되지 않았다. 본연의 날카로움과 재수 없는 성격만 더 돌출되는 일상이 되풀이되었다.

“그러게. 태헌이 너 턱 선으로 사람도 찌르겠다.”

태선이 축축 처지는 분위기를 띄우고자 애써 우스갯소리를 꺼냈다.

“그 아가씨 지금 한국에 없다고 하더구나. 어떻게, 헤어진 거니?”

잠잠한, 아니 잠잠한 척하던 수면 위로 선예가 방만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 파동이 하도 아파 태헌이 피식 웃었다.

“다들 제 연애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관여하지 말란 말이 말 같지… 않나.”

태헌이 물잔을 느리게 훑었다. 그 눈치를 보던 태선이 냉큼 말꼬리를 물었다.

“태헌아, 차라리 잘된 거야. 연서 씨도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할 거야. 너도 좋은 상대랑 결혼해야지. 이만 마음 추슬러. 응?”

“두 사람 모두.”

태헌이 화를 삭이듯 말을 끊은 뒤 눈을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용하게 물만 마시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짙고 흉흉한, 짐승 같은 눈이었다.

그전엔 금욕적이고 도시적인 느낌이 지배적이었다면 요즘 태헌은 야생마처럼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 변화를 이제야 인지한 가족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함부로 연서 이름 꺼내지 마세요.”

“태헌아. 너 정말…!”

“우태선, 기고만장해?”

“처남, 누나한테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좀….”

정운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가 태선에게 허벅지를 붙들리곤 헛기침했다.

“내버려 둔 건 피곤해서지, 용서했다고 착각하지 마.”

태헌이 미끈하게 입술을 올려 웃자 태선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떼었다. 동생이지만 이럴 때마다 산짐승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태헌아, 너도 너지만, 연서 씨 생각해서…….”

“남 생각할 틈이 있었나? 매형이 싸놓은 똥 치우려면 바쁠 텐데. 용지 매각 세금 문제로 말이 많던데. 국세청 조사 막으시느라 부사장님도 꽤 곤란하시고.”

정운과 이혁을 번갈아 눈짓한 태헌이 진물이 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드릴 기분은 아니지만, 망치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됐네요.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태헌이 짧게 고개를 숙여 이혁에게 인사했다.

이혁도 대충 사태는 알 터다. 선예가 종알종알 떠들어대며 태헌이 좀 어떻게 해보라고 달달 볶아 댔을 테니.

“태헌이는 잠깐, 나 좀 보자.”

이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이대로 돌아설 작정이었으나 태헌은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 태선이 이마를 짚으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태헌이 쟤 이상해. 여태 보던 그런 흐름이 아니야. 한연서 씨 어떻게든 찾으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왜…… 저러지?”

선예는 말이 없었다. 예상과는 다른 태헌의 반응에 그녀도 놀라고 당황한 상태였다.

적당히 하다가 헤어질 사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애니 그런 파트너가 필요할 수도 있겠고.

그래서 맞선을 추진하면서도 연서에게 미안함은 없었다. 태헌은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고 짊어진 게 많았다.

기업을 위해, 그룹을 위해 선두에 선 우두머리가 될 인재이니 결혼을 사업적 도구로 이용할 터였다. 태헌도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태헌의 지금 모습은 사랑에 실패한 보통의 남자처럼 볼품없었다. 선예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태선에게 물었다.

“아까 그건 무슨 말이니? 용서하느니 마느니 했던 거 말이야.”

“사실 내가 도와줬거든요. 연서 씨 캐나다로 가는 거.”

“그게 무슨 소리니?”

“태헌이 쟤 완전히 눈 돈 것 같아서 연서 씨 보호하려고 그랬죠.”

“우태선, 왜 그런 말을 이제 하는 거야?”

“연서 씨 발목 잡히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냥 잡히는 게 나았겠어. 저러다 태헌이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일단 조용히 하고 있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알겠니?”

가득 찬 식탁 위로 씁쓸한 한숨만 남았다. 그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걱정할 건 연서가 아니라 태헌이었다.

*

이혁이 향한 곳은 뒷마당이 보이는 발코니였다. 8월의 막바지에 접어든 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초여름에 만나 지금까지. 한 계절을 연서로 물들이고 말았다.

시꺼멓고 지독하게.

“한 대 피워라.”

이혁이 담뱃갑을 태헌에게 보였다. 태헌이 고개 저었다.

“끊었습니다.”

언제부터였더라. 담배를 끊은 건 한국에 와서, 그러니까 연서를 안고부터였던 듯했다.

담배 냄새를 풍기며 연서를 안는 게 꺼려져 한 대 두 대, 줄여가던 게 어느덧 금연이 되었다.

지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고 있는 것이 마치 재회에 대한 기대처럼 여겨져 쓴웃음이 났다.

“요즘 많이 힘들어 보인다.”

“아버지 걱정 살 만큼은 아닙니다.”

“그래도 언젠간 해야지 생각은 했다만, 말하려니 어색하구나.”

잠시 뜸 들인 이혁이 메케한 담배 연기를 허공에 흩뿌렸다. 전보다 짙어진 부친의 주름이 태헌의 눈에 들어왔다.

“너희 어머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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