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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56화 (56/85)
  • 56화

    *

    맞는 말이지만, 현호에게 부담을 줄 순 없었다.

    “그리고 대만행 무산됐거든? 당분간 스케줄 붕 떠. 당분간 나랑 같이 지내. 또 고시원 같은 데 잡지 말고. 어?”

    대만행 무산. 태헌이 다시 손을 썼구나.

    헤어진 마당에 나 몰라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뭐가 다행이야. 현호에게 폐 끼치게 되었는데.

    연서가 잠시 고민하다가 이것만 숨기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현호야, 네 대만행 말이야. 그거 그 사람 짓이야. 그래서 미안. 미안해…….”

    “뭐?”

    현호의 새치름한 눈매가 뾰족하게 찢어졌다.

    “너랑 친한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그래서 그랬대.”

    “미친.”

    “그래서 헤어질 때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부탁했어. 나 때문에 정말 미안해.”

    “그거 완전 또라이 아니냐.”

    연서가 고개를 숙이자 현호가 커피를 꺼내 연서의 앞에 들이밀었다.

    “인생 공부했다고 치고, 점심이나 먹자. 뭐 먹을래? 짐 가져올 거 있냐?”

    “…정말 미안해.”

    “아, 닭살 돋게 그만해라. 고시원도 없고 이제 어쩌려고.”

    “천천히 생각해야지.”

    “그래, 필요한 건 이 오빠가 다 사 준다. 가자.”

    현호가 핸들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에 힘이 꽉 들어가 있어서 죄스러워졌다.

    “현호야, 그 전에 들를 데가 있어.”

    “어디?”

    연서가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명함엔 우태선,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선생님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갈래.”

    연서는 차근차근 태선의 번호를 누르고 심호흡했다.

    -네.

    “저 한연서입니다.”

    *

    7월 말의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그리고 한여름의 강원도는 폭염을 직통으로 맞은 여름을 나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연서는 지금 현호와 함께 강원도로 긴 휴가를 왔다. 현호의 지인 소개로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에서 신세 진 지 일주일이었다. 말만 민박이지 일반 가정집을 통으로 빌려 그야말로 호의호식 중이었다.

    마당에 서면 지평선이 보였고, 2차선 도로를 건너면 바로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사람이 드문 자그마한 해수욕장엔 관광객과 동네 사람의 비율이 반반이었다.

    연서는 마당의 평상에 서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생기 넘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 괴로움이 흐려졌다.

    방 세 개, 욕실, 주방과 거실로 이뤄진 집에선 꽤 할 일이 많았다. 먹고 치우고 청소에 마당 관리까지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늦은 밤, 연서는 내일 마실 매실차를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둔 후 현호가 있는 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고롱고롱. 미약한 코골이를 하며 현호가 잠들어 있었다. 맥주 5캔을 내리 마시더니 뻗었다.

    연서는 슬리퍼를 끌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 외따로이 켜진 전구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의지해 움직였다.

    해수욕장 쪽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흐릿한 조명을 제외하면 굉장히 어두운 편이었다.

    간신히 몇 미터 앞 사람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는 흐린 시야 속에서 연서는 익숙하게 움직여 평상으로 다가갔다.

    “하아…….”

    그러곤 소금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를 폐부에 깊게 들이마셨다. 좋다. 후텁지근한 더위도, 끈적거리는 바람도 전부 마음에 들었다.

    현호의 말대로 여기 쭉 눌러앉을까.

    떠나기 전, 태선의 도움을 받아 강 여사를 면회했다. 태선도 면회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연락했는데 그녀는 선뜻 연서의 청을 들어주었다.

    오랜만에 본 강 여사는 전보다 더 야위었다. 안정을 찾았으나 의식을 회복하기 어려우실 것 같단 설명을 들으며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곤 잠깐 여행을 갈 거라고, 잠자는 강 여사에게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떠나왔다. 나날이 수척해지는 강 여사의 얼굴이 얼룩처럼 남아 있다.

    강 여사의 소식에 빠르게 반응하려면 서울에서 지내는 게 옳았지만, 이보다 더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마음을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는 미련으로부터.

    그의 기억으로부터.

    우태헌의 모든 것으로부터.

    “…….”

    해수욕장 쪽을 바라보던 연서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낮은 담벼락 너머, 2차선 도로 건너에 익숙한 차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연서의 여전히 심장을 거머쥔 남자가 있었다.

    태헌이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상일까?

    환상으로 치부하기엔 언제나처럼 선명하고 강렬한 존재감이 가슴을 덮쳐왔다. 돌부리에 걸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 엄습했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태헌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연서를 보고만 있었다.

    큰 소리를 낸다면 충분히 말소리가 들릴 수 있는 거리인데도 침묵만이 자욱했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립고 보고 싶은, 떨칠 수 없는 과거를 지니고서 언젠간 희미해지길 바라는 미련한 도피를 그가 몰랐으면 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부터 태헌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저 냉정한 남자가 완벽히 돌아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찾아왔을까.

    연서가 어지러움을 느끼며 발을 조금 움직였다.

    “야! 여기서 뭐 하냐. 청승 떨다 또 모기 물린다.”

    자다 깬 듯 현호의 목소리가 등을 두드렸다. 연서의 작은 어깨에 현호의 팔이 올라왔다.

    “들어가자. 들어가. 내일 읍내 가서 장 보려면 빨리 자야지.”

    현호에 의해 등이 돌려세워졌다. 그러나 연서는 뒤돌아볼 수 없었다. 사실은 한 번만 더 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태헌에게 여지없이 들킬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이유로 찾아왔든 이제 끝이었다. 현호가 돈을 마련했고 다음 주 중으로 현영을 통해 태헌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빚을 갚으면 그럼 정말 그와 끝인 거다.

    “현호야, 나 잘게.”

    “어. 그래라.”

    연서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숨을 쉴 수 없어서, 가슴이 아파서, 울었다.

    참고 참았던 아픔이 터져 나와 뺨을 적시고 무릎을 적셨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허우적거리며 질식당하고 있었다. 그와의 모든 기억은 물보라처럼 연서를 물고 늘어졌다.

    그에게 달려가지 않기 위해 입술이 파래지도록 깨물었다.

    *

    늦은 밤에 찾은 강원도 한적한 동네는 고요하고 적적했다.

    “이사님, 도착했습니다.”

    태헌이 차창에서 시선을 거두고 차에서 내렸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연서를 보러 이곳을 찾은 건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퇴근길에 문득 연서 생각이 났고 그래서 달려왔다.

    열흘 전쯤이었다. 감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경호팀이 잠깐 체계를 다잡는 사이, 연서가 병원에서 도망쳤다.

    연서가 사라졌단 소리에 하던 업무를 팽개치고 병원으로 직접 달려갔다. 그러나 연서는 유유히 강 여사의 면회를 마친 뒤 현호와 떠나버렸다.

    철두철미한 도주였다. 연서가 그렇게까지 멀어지고 싶다면 그녀를 놓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는 여태 연서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태헌은 관계의 끝을 인정하지 못했다.

    태헌이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런 곳에서 나를, 잊어 보려고?

    괘씸함에 한숨 짓는 사이 누군가 집 안에서 나왔다. 애쓰지 않아도 작달막한 인영이 연서란 걸 인지했다.

    길게 푼 머리칼.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부드러운 머릿결.

    손에 감아쥐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면 저릿한 충족감이 차오르던 연서의 숨결.

    뜨거운 갈망이 혈관을 타고 솟구쳤다.

    동시에 연서가 태헌을 발견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돌아온다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태헌은 고고히 고개를 쳐들고서 연서를 기다렸다.

    그러나 연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현호가 나타났고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자취를 감추었다.

    두 사람이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은 게 아니란 것쯤은 안다. 하지만 연서가 기댈 곳으로 태헌이 아닌 타인을 택했단 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 네 선택이 그렇다면.

    태헌이 바다를 한 번 바라보곤 차에 몸을 실었다.

    “가죠.”

    룸미러를 흘긋 바라본 기사가 운전대를 잡았다.

    “네.”

    물든 어둠 속으로 태헌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사님은 제가 원하는 걸 절대 줄 수 없어요.」

    그래서 한연서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뭐였을까.

    다정함? 맞선을 보지 않는 것? 백현호를 건들지 않는 것?

    태헌은 수수께끼를 헤아리며 눈을 감았다.

    *

    그간 태헌은 바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바삐 움직였다. 그 신 비서가 잔소리처럼 쏟을 만큼, 태헌은 정신없이 업무에 매달렸다.

    하루 두 시간 수면, 그리고 업무, 빠뜨리지 않는 운동까지. 접대를 위한 술자리까지 더 하면 태헌이 쓰러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이사님, 오늘도 한연서 씨 오피스텔로 들어가십니까?”

    “그러죠.”

    태헌이 묵직한 술 냄새를 떠안고 뒷좌석에 몸을 묻었다. 깊은 피로감이 그를 덮쳐왔다.

    그러나 잠들 수가 없었다. 수면제를 먹어야 할까, 정신과를 찾아야 할까. 의사를 찾아봐야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하겠단 생각이었다.

    시간이 상대적이란 의미가 이런 거였나. 태헌은 강원도에 다녀온 지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단 걸 깨달으며 자조했다.

    태헌은 자신의 문제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세상이 더 개 같아진 건 연서의 부재 때문이었다.

    “다음 주 스케줄은 조금 조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사님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십니다.”

    “조용히. 머리 울립니다.”

    “……한연서 씨, 오늘 공항에 가셨습니다.”

    고민하던 신 비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태헌이 감고 있던 눈을 뜨자 형형한 동공이 차 밖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품고 번뜩였다.

    “어딜 가?”

    “네. 얼마 전에 여권을 발급…….”

    “아니. 말하지 맙시다.”

    그녀가 어딜 가든 이제 눈을 떼야 할 때였다.

    잘 아는데, 아는데.

    쉽지가, 않아서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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