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비서-53화 (53/85)
  • 53화

    *

    연서가 머쓱하게 안을 가리켰다.

    과분한 VIP 병실을 가로지르며 연서는 제 발 저렸다. 태헌의 비호 아래 누리는 호사가 태선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몸은 좀 어때요?”

    태선이 소파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연서도 그 맞은편에 링거대를 끌고 앉았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괜찮아요. 앉아요. 환자한테 대접 바라고 온 거 아니니까요.”

    엉덩이를 띄웠던 연서가 고민하다가 어쩌질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좋아졌다곤 하나 직접 허리를 숙여 차를 꺼내고 물을 끓일 정도는 아니었다.

    “네. 그럼 앉을게요.”

    “우리 전에 본 적 있는데, 혹시 기억해요?”

    “아뇨. 죄송합니다.”

    “할머니 입원했던 국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죠?”

    “네.”

    “그때 스치듯 본 것 같아요. 연서 씨는 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네요. 워낙 가족이 많아야죠.”

    연서가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예의상 나누는 인사말에 집중이 잘 되는 건 아니었다.

    헤어지라고 하겠지?

    선예가 한 번 찾아온 바 있었기에, 태선의 방문이 어떤 목적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올 것이 또 왔단 생각과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한 감정이 먹구름처럼 드리웠다.

    “아픈 사람 앉혀두고 길게 말하면 그것도 폐니까, 본론부터 말할게요.”

    “네.”

    “혹시 태헌이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나한테 연락해요.”

    태선이 명함 한 장을 꺼내 연서 앞에 두며 말을 이었다.

    “내 연락처예요.”

    말랑한 재질의 명함이 햇빛에 반사되어 흐릿했다. 유명 로펌의 로고가 보일 듯 말 듯 해 눈을 살짝 찡그렸다.

    “…헤어지란 말씀인 거죠?”

    “연서 씨가 헤어지고 싶을 때, 태헌이한테서 벗어나고 싶을 때 도움을 주고 싶어요.”

    연서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헤어지고 싶을 때, 변호사님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두 사람도 언젠간 끝을 맞이하겠죠. 그때 태헌이가 어떻게 나올지. 사실 장담하기가 무서워요. 태헌이가 여자를 만난 건 연서 씨가 처음이란 건 알고 있어요?”

    그간 만난 여자가 많았다고 해도, 없었다고 해도 어울리는 남자였다. 연서는 그럴 법하단 감상을 메마른 눈으로 내놓았다.

    “아뇨.”

    “태헌이에게 처음이잖아요. 연서 씨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때가 되어 정리할 땐, 연서 씨가 다칠 거란 게 내 생각이고요.”

    태헌의 소유욕이 일방적인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헤어질 때가 된다면 태헌은 가차없이 연서를 버릴 터였다.

    무감하고 담백하게,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것처럼 연서를 놓을 사람이었다.

    “죄송하지만, 이런 비슷한 얘기 전에 교수님과도 나눴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란, 그런 부탁 어린 눈동자로 태선을 바라보았다.

    “반대로 연서 씨가 먼저 헤어지고 싶으면요?”

    순간, 지금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만약에 연서 씨가 헤어지고 싶다고 하면, 그 녀석이 쉽게 놔줄 것 같아요?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쪽인데?”

    태헌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단, 그러니까 연서가 다칠 수도 있단 뜻이었다. 연서는 쉽사리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태헌과 헤어질 마음이 없다고 말해야 했다. 선예에게 그랬듯 당돌하게 대꾸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선뜻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연서는 제 손가락을 괴롭히듯 움켜쥐었다.

    정말 이대로 태헌과 계속 만나도 괜찮을까, 자신이 없었다. 연서는 흔들리고 있었다.

    맞선 같은 일이 또다시 생기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시간이 흐를수록 연서는 이보다 더한 상처를 입을 테고, 나날이 지쳐갈 터다. 그런 사랑은 싫었다.

    그러나 태헌을 끊어낼 자신이 없어 이만 정리하란 방어 신호를 애써 무시했다.

    “태헌이는 갖지 못하면 망가뜨리는 녀석이에요. 제가 탐내던 프로젝트가 남의 손으로 넘어가면 죄다 물 먹이는 건 일도 아니죠.”

    “이사님이 저한테 그렇게까지 하시진 않을 거예요.”

    “글쎄, 연서 씨 친구 중에 백현호 씨라고 있죠?”

    “변호사님이…. 현호를 어떻게 아세요?”

    “곧 멀리 떠난다면서. 그거 태헌이 짓인 건 알아요?”

    뭐?

    “태헌이가 이런 성격이에요. 아마도 연서 씨가 기댈 곳을 전부 없애버릴 거예요. 다음번엔 다른 친구가 되지 않겠어요?”

    “대체 이사님이 왜…….”

    “말했잖아요. 연서 씨가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까탈스러운 인간이 처음 만나는 여자인데, 그 의미가 얼마나 크겠어요?”

    현호가 떠나게 된 게 태헌의 짓이라고?

    당장 확인해야겠단 생각과 태헌이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뒤섞였다.

    “연서 씨는 걔 감당 못 해요. 가족들도 두 손 두 발 다 든 지 20년 넘었고요. 태헌이 끝을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명함 받아둬요.”

    마음이 아팠다. 가시덤불을 삼킨 것처럼 심장부터 목, 머릿속까지 불쾌한 열기가 번졌다.

    내가 정말 애꿎은 현호에게 폐를 끼친 걸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앞이 어지러웠으나 연서는 주먹을 꼭 쥐고 정신을 다잡았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사님에 대한 판단은 제가 내릴게요.”

    “연서 씨, 나는 연서 씨가 걱정되는 거예요.”

    “이사님 포기하신 지 10년도 넘었다고 하셨죠. 그럼 지금의 이사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거예요.”

    “정말,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고집이 있다고 해야 할지…….”

    “이사님과 저 오래 못 갈 사이라는 거 잘 알아요. 그래도 그때까진 그 사람, 저한테 사랑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를 해칠 그런 사람 말고요.”

    “그래도 태헌이한테 제대로 된 애정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입꼬리만 슬쩍 올려 웃은 태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헤어지라고 주는 거 아니고, 맛있는 거 먹고 회복 빨리하라는 뜻이에요. 이건 그냥 내 동생 같아서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요.”

    “저기……!”

    연서가 말리기 전에 태선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병실 문이 닫히고도 한참 동안, 연서는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태헌이 현호에게까지 몹쓸 짓을 했단 말이 거짓 같진 않았다. 태헌은 처음부터 만난 적도 없는 현호를 싫어했다. 현호가 이성 친구라서?

    아니, 상대가 지영이었어도 태헌은 같은 짓을 저질렀을지 몰랐다. 태선의 말대로, 태헌은 위험했다.

    이런 식으로 비뚤어진 소유욕을 표출하는 태헌은 시한폭탄처럼 위협적이었다.

    현호와 지영에게 그러지 말라고 부탁한다면, 과연 들어줄까?

    아니, 그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보상 없는 가난한 사랑을 하고 있단 증거였다.

    연서는 눈을 문질러 고인 물기를 지워냈다. 옥상에서 바람을 좀 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복도로 나오자, 누군가 이쪽을 흘긋 보더니 코너를 재빨리 틀어 몸을 숨겼다. 어딘가 낯이 익었다. 오피스텔 근처에서도, 신주 병원 근처에서도 몇 번 본 것 같은 얼굴.

    연서는 남자가 사라진 복도를 향해 링거대를 끌고 빠르게 걸었다.

    “저기요, 저기요! 누구세요?”

    비상구로 달아나려던 남자가 멈칫했다. 남자는 검은색 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키가 크고 건장한 체형이었다.

    마치 가드처럼…….

    “누구신데 자꾸 제 주변에서……. 맞죠? 전에도 주변에 있었죠?”

    연서가 강한 어조로 묻자 비상구 문을 열던 채로 남자가 뒤돌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더니 문틈으로 달아났다.

    “저기요!”

    연서가 빈 곳을 향해 소리쳤다. 문득 아찔한 추측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혹시, 저 사람도 태헌의 짓일까.

    태헌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붙였던 거였나. 현영을 통해 보고 받아 알고 있던 게 아니라, 사람을 심어서…….

    갑자기 숨이 막혔다. 연서가 목을 쥐고 느리게 심호흡했다. 내쉬어도, 내쉬어도 시뻘건 화마에 휩싸인 것처럼 속이 쓰리고 아팠다.

    *

    그날 밤, 태헌은 연서가 수술한 지 닷새 만에 병원을 찾아왔다. 이제 연서는 꽤 많이 호전되어 방수 패드를 붙이고 홀로 샤워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늦은 밤 병실로 들어온 태헌의 얼굴엔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은은한 미등 아래서 책을 읽고 있던 연서가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저 잊어버린 줄 알았어요.”

    “그러고 싶었지.”

    연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게 안 돼.”

    태헌이 넥타이를 잡아 내리며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연서가 누운 베드에 한쪽 팔을 짚었다.

    연서는 책을 내려놓고 태헌의 거칠한 뺨을 감쌌다. 이렇게까지 피곤해 보이는 그는 처음이었다.

    “연락 한 번도 안 하신 거 알죠?”

    “너는, 왜 안 했는데.”

    “바쁘다고 맨날 끊으라고 그러잖아요.”

    “그랬나.”

    “많이 바빴어요? 힘들어 보여요.”

    연서가 팔을 들어 태헌을 끌어안았다. 이 못되고 제멋대로인 안하무인이 가여워 보인다는 건 좋지 않았다.

    콩깍지가 제대로 씐 모양이지. 연서가 옅게 웃자 태헌이 그녀의 목덜미에 콧대를 묻으며 연서의 목뒤를 부드럽게 잡았다.

    남자의 진한 향기가 연서의 가슴으로 스몄다. 그러나 그리웠던 태헌의 향과 품이 그리 아늑하지만은 않았다.

    태헌의 존재에 반응하는 스스로가 실감 날수록 두려웠고, 외로움이 짙어질수록 함께 있는 게 무서웠다.

    행복이 아닌 좌절을 맛볼 것만 같아서. 그래서, 연서도 연락할 수가 없었다.

    연서는 손을 뻗어 태헌의 뒷머리를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어쩐지 오늘은 태헌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착하다, 우태헌. 착해져라. 착해져라.”

    “또 사람 우습게 만드네.”

    “그럼 좀 웃어 봐요. 맨날 눈썹은 구기고서 이리 와, 저리 가. 그런 말만 하고.”

    “그런데, 그게 싫지가 않아.”

    태헌이 얼굴을 떼어내고 시선을 맞추었다. 마침표를 알 수 없는 블랙홀처럼 태헌의 눈동자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네가 날 우습게 만드는데도, 나름 즐거워. 곤란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