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해신의 길쭉한 눈매가 커다래졌다.
“세상에. 이럴 때가 아니라.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아요?”
“말했듯이 이 자리에 명분이 중요하니, 좀 버텨 보죠.”
여기까지 나온 이상, 해야 할 일은 마무리 짓고 가야 옳았다.
“진짜, 나쁜 남자구나?”
“개새끼인 거 알고 나온 줄 알았는데.”
해신이 웃다가 그가 쥔 핸드폰을 눈짓했다.
“그런 것치고 핸드폰을 너무 많이 보시는 거 알려나?”
태헌이 눈썹을 찌푸렸다.
“식사 다했으면 자리 옮깁시다.”
“다음 코스도 전의 맞선녀랑 같은 곳일까요?”
태헌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쳤다.
“그러지 말고 병원으로 가요. 나도 따라갈게요.”
“그쪽이, 왜.”
“명분 필요하잖아요? 전의 그 최수현 씨랑 같은 장소에서 차까지 마셨다간 내가 좀 우스워지기도 하고요.”
해신이 높은 프라이드를 자랑하듯 턱을 바로 들며 말을 이었다.
“그분 이사님 비서라면서요. 함께 문병 갔다는 핑계라도 있어야, 우리 아버지한테 면이 서니까. 우리 아버지는 이사님한테 여자 있는 거 모르시거든요.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거 같은데?”
해신이 먼저 앞서서 태헌을 지나갔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고민하던 태헌에게 사실 복잡한 생각은 사치였다. 내내 연서에게로 향하고 싶었으니.
태헌은 주저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옆자리에 해신을 태웠다는 자각도 없이 연서의 안위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조그마한 몸으로 수술 따위를 받은 걸 탄식하며 병실 문을 여는 순간에까지 고뇌했다.
그래, 이 마음이 성욕일 리가 없다. 성욕이라면 이렇게 너에게 가는 걸음이 무거울 리가 없었다.
달려가고 싶었으나 멈춰 서고 싶기도 했다.
나는 확인하고 싶은 건가, 확인을 거부하는 건가.
그러는 동안에도 태헌의 몸은 극점을 향해 끌려가듯 연서를 찾았다. 태헌의 걸음이 성큼성큼 재빨랐다.
침대에 누운 연서의 발끝부터 보였다. 그리고 야트막하게 솟은 이불.
연서가 그의 세계를 차츰차츰 물들이며 들이닥친다.
범람한 감정을 맞닥뜨린 태헌의 온 세포가 그녀를 향해 전율했다.
이 순간이 박제되듯 선명했다.
한연서가, 우태헌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순간이었다.
놀란 눈으로 태헌을 보는 연서의 얼굴이 살짝 부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도 아팠다. 태헌의 사해엔 오롯이 연서뿐이었다.
애초에 그녀 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는 깨달음이 시꺼먼 재가 된 심장 위로 내려앉았다.
혹, 이렇게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라면.
새로운 가정은 그를 흔들리게 하였다. 태헌은 그딴 걸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온통 초조하고 괴롭고 유치해지는, 한 사람에 목매어 비합리적이고 효율적이지 못한…….
이런 감정이 누군가 말하는 사랑이라면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길이 하나뿐인 것처럼, 태헌은 계속해서 그녀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걷든 결국 연서에게로 닿을 것이란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하나 쉽사리 갈 수는 없었다.
연서를 바라는 이 마음이 이상하고 또 괴로워서…….
태헌은 제동을 걸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한연서로 가득 차버린 걸 실감하며 그가 입을 뗐다.
“몸은, 어때.”
사람을 반쯤 아니, 전부 뒤흔들어 놓은 연서를 경계해야 했다.
*
연서는 마취에 깨어나자마자 들이닥치는 어지럼증과 복통에 신음했다. 간호사란 사람이 제 몸에 닥친 병도 모르고 바보같이 참았다니.
그녀의 몸에는 소변줄과 피 주머니, 링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복막염 때문에 회복이 꽤 더딜 거란 소리를 듣고 회복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병실로 올라왔다.
현영이 안내한 병실은 최고급 VIP실이었다. 이토록 분수에 넘치는 병실을 선사해준 태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퉁퉁 부은 몰골을 보이기 싫으면서도 정작 그가 없으니 마음이 쓰렸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태헌과 통화한 뒤 고작 4시간밖에 지나 있지 않았다.
“연서 씨, 주무시면 안 됩니다.”
연서가 눈을 감자 잠자는 거로 생각했는지 현영이 말렸다. 전신마취를 했기 때문에 몇 시간은 깨어 있어야 했다. 자발적인 호흡을 도와 폐 기능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네. 안 잘 거예요.”
“그럼 눈을 뜨셔야…….”
“뜬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시고 눈동자가 보이게 크게 뜨십시오.”
뜨끔한 연서가 눈에 힘을 주며 몰려오는 잠을 이겨내려고 애쓸 때였다. 드드륵. 병실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병실 구조상 문과 침대까지 보이지 않고 조금 거리가 있었다.
누구지? 궁금해하는 동시에 태헌일까, 아닐까 기대와 두려움을 함께 품었다.
찾아온 이는 태헌이었다. 그의 모습에 화색을 띤 것도 잠시, 그의 뒤에 다른 여성이 함께 있었다.
얼굴이 낯익어 곰곰이 생각하자, 그녀가 오늘 태헌과 맞선을 보기로 한 여성 한수 중공업 회장의 손녀. 이해신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나이는 연서보다 두 살 위로 그녀는 도시적인 이미지였다. 푸른색 슈트는 하의가 바지로 이뤄졌고 팔은 반쯤 걷어 올려 시원한 성격을 대변하는 양상이었다.
스타트업 회사의 대표인 그녀의 직함이 해신과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왜 둘이 함께 온 거지?
무엇보다 낯선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당황스러워 연서가 시트를 그러쥐어 몸을 덮었다.
“몸은 어때.”
연서는 눈동자를 흔들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차라리 맞선에 힘써야 했다. 해신과 함께 나타난 건 연서를 두 번 상처 입히는 행태였다.
연서를 비웃겠단 뜻 같았다. 너무 비참해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수술은 잘됐다고 하니까 회복에 힘쓰고,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네. 김 비서님께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당신은 그 여자와 얼른 떠나버리라고, 연서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를 외면했다.
“처음 뵙네요. 반가워요. 이해신이라고 해요. 태헌 씨 비서님이 수술하셨다고 해서 같이 왔는데……. 내가 실례했나요?”
“아닙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속도 없이 태헌의 맞선 상대에게 감사하단 말까지 하고 나자 더욱 초라해졌다.
해신이 가져온 과일 바구니를 현영이 받았다. 저런 걸 사 올 정신이 있었다는 것과 태헌이 그걸 방조한 사실은 괴로울 뿐이었다.
“문병은 괜찮으니 두 분은, 그만 가셔도 될 것 같아요.”
연서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서 울먹이듯 말했다. 시트를 그러쥔 두 손이 창백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링거줄에 피가 역류했다. 연서의 속도 그러했다.
붉은 피를 토할 것처럼 속이 아리고 아팠다. 비단 수술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빤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태헌의 무심함이 가시 같았다.
또 난감하게 미소 짓는 해신이 제 처지를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제발 가 주세요, 이사님. 이해신 씨도 부탁드립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실수했어요. 사실 조금 괘씸했거든.”
“네?”
“감정 없어요. 쾌차하길 바랄게요.”
해신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해신이 먼저 나가고도 태헌은 부동자세였다.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 어른거렸으나 충격이 큰 연서에겐 그런 걸 읽어낼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얼른 나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프면 참지 말고 바로 의료진 호출해.”
“…가세요.”
연서의 목소리가 그에게 채 닿기도 전에 태헌이 등을 돌렸다.
태헌이 나가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렸다. 연서는 열감이 느껴지는 이마를 짚으며 시트를 좀 더 끌어 올렸다.
“김 비서님도 나가서 좀 쉬세요.”
“그래도 곁에 있어야죠.”
“안 잘게요.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
“네. 그럼 20분 뒤에 들어오겠습니다.”
현영이 눈치껏 자리를 비워주자, 혼자 남은 쓸쓸한 적막이 찾아왔다.
수술 부위보다 심장 부근이 더 아팠다. 가스를 주입해 팽팽하게 부분 복부가 심장을 터뜨릴 것처럼 조여왔다.
꼭 그 사람과 같이 와야 했을까.
이런 내게서 태헌이 얻고 싶은 건 무엇이었을까.
굴종을 얻어내고 싶었던 거라면, 이미 그는 가졌다. 연서가 그를 좋아한단 마음을 들켰을 때부터 태헌은 갑이었다.
그리고 태헌은 연서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알면서 시작했으니 그에게 따질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혼자 다 감수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래도 이건…….
“너무, 아파.”
행복하지 않아.
그렇다면 끝내야 하지 않을까. 그의 곁에서 상처 없이 웃을 수만은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괴롭다.
앞으로도 계속 상처뿐인 사랑을 해야 한다면 연서는 자신이 없었다. 끝내는 건 태헌이라고 했지만, 연서는 동의한 적이 없었다.
창밖으로 투신하고 싶은, 그 정도로 괴로운 날이었다. 우는 것조차 힘에 겨워 멍한 눈으로 사랑의 매듭을 손수 찾아 나섰다.
*
가스가 차오른 복부와 어깨에 시큰한 통증이 가시지 않았으나 연서는 며칠 전보다 후련해진 기분으로 병실 내부를 오가며 운동했다. 몸에 줄줄이 연결된 관을 제거하고 나니 몸이 확실히 가뿐해졌다.
회복을 위한다는 핑계로 복도로 나가볼까, 싶었다. 그 후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태헌을 생각하다가 얼른 지워내고선 병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처음 보는 여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선물용인 듯 붉은색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차분한 이미지였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높은 구두, 잘 말아 내린 긴 머리에서 태헌의 처음 맞선 상대와 비슷한 분위기가 났다.
하지만 천천히 연서와 눈을 맞추는 자세엔 풋풋함보다 노련함이 묻어났다. 연서는 대번에 긴장했다. 어쩐지 좋지 않은 일로 찾아온 손님 같았다.
“연락 없이 불쑥 찾아왔네요. 한연서 씨 맞죠?”
“네. 맞습니다.”
“난 우태선이에요.”
태선이 손을 내밀었다. 태헌의 누나였다니,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연서가 말끔한 태헌의 손끝을 잡았다. 뜨끈한 열감이 머무는 손이 괜히 민망해 일찍 손을 뺐다.
“한연서라고 합니다.”
“들어가도 되죠?”
태선이 눈을 접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