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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51화 (51/85)
  • 51화

    *

    침대 위에 새우등을 하고 끙끙대던 연서는 식은땀이 흠뻑 젖은 채 핸드폰을 찾았다. 체기에 이어 고열, 오른쪽 배의 복통. 혹시 충수염은 아닐까 하던 의심이 점차 확신이 되어갔다.

    동네 병원에서 받은 위장약이 도움이 되지 않은 걸 보아 심상치 않은 상황인 건 확실했다.

    현호는 출국하기 전에 잡지 촬영이 있다고 했고, 지영은 오늘 언니 웨딩 촬영을 도우러 간다고 했다.

    현영의 전화번호를 누르기 전, 고민하다가 태헌에게 먼저 통화를 연결했다. 수요일 10시. 2시간 후면 맞선 자리에 나갈 그지만, 혹시 몰라서 미련한 기대를 품고 신호음을 기다렸다.

    -무슨 일이야.

    연서를 반기는 기색은 어디에도 없이 딱딱한 투였다.

    “이사님…… 바쁘세요?”

    -회사야. 시간 맞춰서 이동할 거고, 오늘은 안 나와도 돼.

    “저도 가고 싶지 않아요.”

    -할 말은.

    “잠깐 오피스텔에 들르실 수 있어요?”

    -마무리하고 저녁쯤 가지. 지금 회의 중이야.

    “저……. 좀 아파요.”

    연서가 코를 찡그렸다. 참기엔 버거운 통증이 시시각각 작은 몸을 덮쳐왔다.

    -김현영 비서한테 연락 안 했어?

    “…네. 전에 같이 병원에 가긴 했어요.”

    -연락해서 다시 가 봐. 아픈 거 참는 것도 미련한 짓이야.

    “…네.”

    -다녀와서 다시 전화해.

    그가 먼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병은 참는 게 능사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혹시 오늘 아침에라도 태헌이 오피스텔로 와줄까 싶어 기다렸다.

    전화를 하고 현영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아 오피스텔로 왔다. 거실 바닥을 기는 연서를 발견한 현영이 놀라 달려왔다.

    “연서 씨!”

    “비서님, 저 아무래도 충수염 같아요. 다리 올릴 때마다 아파서…….”

    “추, 충수염이요? 괜찮으세요?”

    “맹장염이요. 터졌으면 어떻게 하죠……?”

    연서가 충혈된 눈을 깜빡이며 묻자, 현영이 기겁했다.

    “시, 식은땀 좀 봐! 세상에, 열도 납니다!”

    현영이 곧장 연서를 둘러업고 응급실로 뛰었다. 그녀는 경호팀 비서라서 그런지 힘든 기색 없이 재빠르게 이동했다.

    현영의 등에 업혀 사경을 헤매면서도 연서는, 이게 태헌의 등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속도 없는 생각을 했다.

    병명은 급성충수염이었다. 맹장이 터져 사태가 위중했다. 복막염까지 의심된다는 소견이었다.

    빠른 속도로 수술 준비가 진행되었다. 현영은 보호자가 되어 각종 서류에 사인했고, 연서에게 괜찮을 거라고 위로까지 해주었다.

    수술복을 입은 연서는 베드에 실려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숫자를 세라는 간호사의 말과 함께 기억이 끊겼다.

    *

    태헌은 출장을 떠나 있는 동안 전보다 더 많은 시간, 연서의 생각에 잠겼다. 신 비서가 목소리를 높여야 정신이 돌아올 만큼 생각에 골몰하는 일이 잦아졌다.

    골치가 아팠다. 그녀를 울리고 싶은 건지, 웃게 하고 싶은 건지 두 개의 불덩이가 의견을 내세우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우는 모습은 많이 봤다. 그의 아래에 깔려서, 혹은 상처 받아서 그녀는 쉽게 울었다. 그런데도 개운치 않았다.

    그렇다면, 한연서가 나를 보며 활짝 웃은 적이 있던가.

    답은 아니, 였다.

    어떻게 구슬려야 그렇게 웃어줄는지.

    백현호에게 하던 것처럼, 말갛게 웃어줄 건지.

    심도 높은 고민 끝에 태헌은 그녀가 웃는 모습을 꼭 봐야겠단 결론을 내렸다. 돌아오면 연서부터 찾으리라 다짐했는데, 일이 생겨 바로 회사로 향했다.

    긴급회의가 소집된 사안은 신제품 디자인 유출 건으로, 회사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다. 그러나 그조차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젠 오늘 잡힌 맞선이 껄끄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연서를 대동하고 맞선 자리에 나갈 때만 해도 즐거웠다. 하나 연서를 웃게 하고 싶단 결정을 내린 후라, 이 맞선이 쓸모없게만 느껴졌다.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 태헌의 부친 이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의 일로 전화했단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맞선 두어 번만 더 보라고, 이미 잡힌 약속만 지켜주면 어머니 쪽을 달래보겠단 일종의 거래를 제시하는 전화였다.

    어차피 비슷한 흐름에 맡기려던 차였으니 이혁의 의견에 반감은 없었다. 다만 선예가 이 이상 연서의 일에 관여한다면 태헌도 느긋하게 뒤로 물러서 있긴 힘들었다.

    잃을 게 많은 선예 쪽이었고 싸움을 시작하면 흙탕물은 그녀 쪽으로 튀게 될 것이다.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회의실에 들어서는데, 이번엔 연서에게 전화가 왔다. 태헌은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가로 향했다. 아직 어수선한 분위기라 간략한 통화라면 가능했다.

    -이사님 바쁘세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묵은 고뇌가 씻기는 착각이 일었다. 벌써 머리가 넋 나간 놈처럼 흐물거리고 있다.

    -저……. 좀 아파요.

    아프단 말에 느긋하게 서 있던 허리가 꼿꼿해졌다. 태헌은 곧장 시간을 확인하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병원에 다녀왔던 거로 안다. 단순 위염인 줄 알았더니, 꽤 오래 간다.

    메모지를 뽑아, 현영에게 연락해 연서에게 올라가란 말을 남겼다. 몇 층 아래의 빈 오피스텔을 빌려 현영을 대기시키고 있단 건 연서가 모르는 일이었다.

    손짓으로 신 비서를 불러 메모지를 보였다. 대충 전화를 마무리했으나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태헌은 미간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그렇다고 임원 회의를 팽개치고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회의 시작하죠.”

    태헌은 보고받으며 신 비서를 기다렸다. 잠시 후 뒷문이 열리고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온 신 비서가 귓속말했다.

    “한연서 씨를 데리고 병원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허, 가슴에 빠듯한 공기가 들이닥쳤다.

    “고열과 복통이 있다고, 조금 다급한 투였습니다.”

    “경과 보고하도록 해요. 병원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고.”

    “네, 이사님.”

    회의는 계속되었고, 태헌은 안건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런 중에 신 비서를 통해 메모가 손에 들어왔다.

    [급성충수염을 동반한 복막염. 수술 시작.]

    눈두덩이 뜨거워졌다. 새빨간 불꽃이 눈앞에서 알랑댔다. 태헌은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모두가 빠져나간 회의실 안. 태헌은 잠깐 갈피를 잃은 사람처럼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사님, 지금 출발하셔야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는데, 어떻게. 이해신 씨 쪽에 기별 넣을까요?”

    신 비서는 태헌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처럼, 연서에게 갈 길을 마련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어차피 수술은 시간이 소요된다. 오늘 맞선을 미루면 또다시 약속을 잡아야 하고, 연서의 하얗고 말간 그 얼굴이 찌푸려지는 꼴을 또 봐야겠지.

    “그대로 진행하죠.”

    “네.”

    “한연서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놓치지 말고 10분에 한 번씩 내 번호로 직접 보고하도록 전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 비서가 운전기사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잠시 감았다. 속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임계점에 들이닥친 용암이 곧 터져버릴 것처럼 무언가 위험하게 도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맞선 상대 해신과 마주 앉아 식사 중이었다. 10분에 한 번꼴로 핸드폰을 확인하는 태헌의 행동은 해신의의 눈에도 매너 없게 비쳤을 터였다.

    그러나 해신까지 배려할 만큼 태헌의 머릿속이 여유 있지 않았다.

    “취향이 의외네요.”

    해신이 시끌벅적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식당이 맞선 장소로 어울리지 않단 소리였다.

    태헌이 맞선 장소를 바꾸지 않은 건, 연서에게 일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소를 바꾸면 연서가 또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녀를 골리는 건 이제 충분했다.

    “새로 장소를 물색하기엔 번거로워서, 편안한 장소로 안내했는데 별로입니까?”

    “역시 우 이사님, 노골적이시네. 전의 맞선녀와 만났던 장소란 걸 숨기지도 않으시고.”

    해신이 선선히 대답하며 오렌지 주스로 목을 축였다. 그러자 차가운 걸 잘 못 먹어서 따뜻한 코코아나 핫초코, 믹스 커필 따위를 작은 손에 쥐고 다니는 연서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태헌이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그러쥐었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혹시 따로 만난다는, 그 상대?”

    “소문이 꽤 파다한가 봅니다.”

    태헌이 피식 웃었다. 근사한 웃음에 해신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려왔다.

    그와의 결혼에 기대감이 아예 없다면 거짓이었다. 하지만 태헌의 불량한 처신을 본 뒤 해신은 이 결혼에 대한 희망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지웠다.

    하물며 재수 없는 남자는 참아도, 마음을 준 여자가 있는 남자는 남편감으로 매력 없었다. 해신이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걸요. 요즘 우태헌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더라, 그런 가십 이런 바닥에서 안줏거리니까.”

    “안줏거리로 얼마든 씹게 해줄 테니, 잠깐 양해 좀 구하죠.”

    태헌이 무감한 눈빛으로 해신을 등졌다. 그는 휴게실을 찾아 직접 현영에게 전화했다.

    수술이 잘 끝났단 보고를 받았으나 껄끄러움이 가시질 않았다. 현영에 이어 연서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보고 받기 위해 담당의를 연결했다.

    태헌은 시간을 꽤 지체한 뒤 자리에 돌아왔다. 실례했단 자각은 있지만 제가 개새끼란 걸 모르는 눈치는 아니니 굳이 해신에게 둘러대진 않았다.

    해신이 말끔하게 웃었다.

    “그녀는 잘 있다던가요?”

    “식사는 다 했습니까?”

    “어쩌죠? 적어도 한 시간 정돈 더 저와 더 어울리셔야, 맞선에 최선을 다했단 명분이 설 텐데요?”

    태헌이 지겨운 표정으로 착석했다.

    “저도 이런 자리 재미없어요. 만나는 애인도 있죠, 3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귀여워요.”

    태헌이 자리에 앉으며 찬물을 들이켰다. 계속 목이 탔다. 가슴이 시꺼먼 숯이 된 것 같다.

    연서가 무사하단 소리에도 직접 얼굴을 보지 않으면 꼭 어떻게 되어버릴 것처럼, 초조했다.

    “왜?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급성충수염이라고 하는데, 신경이 여간 쓰여야지.”

    태헌은 숨길 생각하지 않고 묵직한 한숨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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