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연서가 손등으로 입술을 막고 씨근덕거렸다.
“…새.”
“뭐, 새끼?”
“냄새, 다른 여자 향수 냄새나잖아요.”
태헌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제가 다른 남자 향수 냄새 묻히고 이사님한테 안기면 좋겠어요?”
연서의 되바라진 질문에 태헌이 실소했다.
“다른 새끼랑 아침까지 어울리는 건, 이해해 줄 일이고?”
“현호 말하는 거예요? 이사님은 현호가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안 들다 뿐일까.”
비위까지 상했다.
“제가 이성 친구를 만나는 게 용납 안 되는 거예요?”
“알면서 왜 바득바득 고집이야.”
“저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뭐?”
“질투하는 것처럼……. 그러면 제가 착각하잖아요.”
좋아해? 내가 한연서를?
성적 끌림 안에 이성적 끌림도 포함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이 말하는 사랑, 그런 걸 말하는 거라면 태헌은 아마 평생 그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을 터였다.
감정 없는 괴물, 부모가 붙인 이름엔 이유가 있었고 태헌도 그 이름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만큼 그의 감정은 메말라 있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사막처럼 건조하고 황량했다. 그 안에 연서가 들어온 것만으로도 이변이었다.
“바라지 마, 그런 건.”
태헌이 읊조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그에게 적정선 이상의 감정이란 다시 태어나야만 거머쥘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태헌이 뒤돌아 욕실이 있는 침실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연서의 앞에 섰다.
“그러는 넌 어떤데. 내가, 좋나.”
태헌이 그동안의 눈치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날아든 창에 맞은 것처럼 연서가 굳어버렸다.
“어떠냐고 물었어.”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렀고 태헌이 그답지 않게 조갈증에 걸린 것처럼 물었다.
“대답해 봐.”
“…하면요?”
“조금 더 예뻐할지도 모르지.”
연서의 눈꺼풀이 자잘하게 떨렸다. 그녀가 와락 미간을 구겼다.
“이사님이 매번 이렇게 못되게 구는데 좋아하겠어요? 빚 때문이에요. 제가 을이니까…….”
연서가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다가 말았다. 축 처진 연서의 어깨가 유독 작아 보였다.
손에 쥐고 흔들기 좋은 장난감, 인형. 그런 것에 빗대어 생각하기엔 이 인형은 말대꾸가 많았고 건방졌다.
태헌은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옷을 벗었다. 셔츠를 풀고 파스너를 열었다.
그는 옷을 벗으며 연서와 맞춘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살갗에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작지 않게 울렸고 어느덧 그는 온전한 나신이 되었다.
잘 짜인 몸에 눈을 오래 두지 못하고 연서가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시선을 회피했다.
“잘 생각해 봐.”
“…….”
“내 맞선에 동요한 게 전부 빚 때문이야?”
“…네.”
“그럴 리가.”
태헌이 조소했다.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내자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꾸역꾸역 부정한다.
그래, 솔직하게 모질게 굴어도 꺾이지 않고 다른 새끼랑 희희낙락하고 있는 연서를 더 괴롭히고 싶었다.
“이리 와야지.”
연서의 세상은 태헌이 생각하는 것보다 견고했다. 연서의 시간을 아무리 흔들어놔도 그녀는 틈틈이 친구들과 연락했고, 밤새워 잘도 만났다.
계획 이탈. 컨트롤 실패.
“그 잘난 빚 때문에 내 뜻에 따르는 거라며. 그럼 기어야지.”
연서가 주저주저하다가 소파를 내려왔다. 어쩌다 보니 정말 기듯이 다가왔다. 연서는 해야 할 일을 아는 것처럼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태헌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손으로 그러쥐며 제게로 당겼다.
지루하고 무료한 세상이 한연서로 인해 시끄러워졌다. 한 부분 알록달록해진 곳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새 핸드폰을 사 주고 사적인 연락을 금지하고, 맞선 자리에 끌고 나가 처지를 각인시켜주는 유치한 짓거리까지 하며 연서를 제 울타리에 가두려 했다.
알록달록한 한연서는 언젠간 잿빛이 되어 사라질 테니, 그 전까지 적당히 어울리면 되는 건데.
별거 아니었는데. 왜 별거 아닌 너한테 목을 매는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주제에, 날 좋아하고.
연서의 마음은 진즉 눈치챘다. 그녀의 눈에 승빈이 없단 걸 알아챘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연서는 그를 좋아한단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연서가 버겁게 흐느꼈다.
“거짓말을, 하면 못쓰겠지?”
태헌이 낮게 욕설하며 신음을 뱉었다. 머리칼을 놓아주자 연서가 기침하며 쓰러졌다.
그녀의 구석구석을 점령한 흔적에 정복감이 차올랐다.
“…해요.”
한 발 뺐는데도 가라앉지 않는 정염은 무식할 정도였다. 태헌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뭐?”
“…좋아해요. 그렇지 않으면 미쳤다고 이렇게까지 하겠어요?”
연서가 젖은 뺨을 문지르며 울먹였다.
“그런데, 다른 여자 향수 냄새는 싫어요.”
태헌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도 상처 받아요. 아프다고요. 아파…….”
연서가 눈물을 터뜨렸다. 그게 생각보다 짜릿했다.
태헌이 무릎을 구부려 연서와 눈을 맞췄다. 연서의 눈물 젖은 뺨에 그의 손끝이 닿았다. 그녀가 주먹으로 태헌의 어깨를 힘없이 내려쳤다.
“씨이.”
“욕은 어디서 배웠어.”
“자기도 하면서.”
폭발 직전까지 들끓었던 더러운 기분이 차분해졌다. 솜방망이처럼 휘두르는 손을 잡아 목에 두르게 하고 연서를 안아 들었다.
곧장 침실로 향하며, 그 잠깐을 인내하지 못하고 입술을 겹쳐 물었다. 문지르고 얽고 빨아들이며 흐느낌을 죄 마셔버렸다. 연서가 저로 인해 울고 괴로워하는 게 이토록 흥분되고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나.
“하, 처 천천히…….”
티셔츠 속으로 파고든 그가 거침없이 그녀를 희롱했다. 연서 또한 나신으로 만들어 커다란 몸으로 완전히 감쌌다.
눈밭 같은 피부에 흔적을 남기며 달콤한 체취를 만끽했다. 홀린 게 분명했다.
맥을 못 추고 입술로 손끝으로 그녀를 가지기 급급했다. 연서가 허리를 띄우며 태헌을 재촉했다. 피임기구를 찾아 씌우면서 입술을 맞추고 빠듯해하는 그녀를 파고들었다.
“좁아, 힘 빼야지.”
“으응……!”
턱을 젖히고 가늘게 떠는 연서는 강한 쾌감에 시달려 제대로 된 언어를 만들지 못했다. 쩌릿하게 솟구치는 쾌락의 전율은 태헌에게도 찾아들었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미는 대로, 당기는 대로 그녀가 흔들렸다.
“이사님…….”
“이름.”
“태, 태헌…….”
연서가 자신을 정말 좋아하는 걸 알자, 더욱 광인이 되어갔다.
연서의 몸을 가르고 거칠게 흔들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향수 냄새를 지우지 않고 일그러지는 연서의 표정을 보며 희열했다.
이게 뭘까.
“너 대체 뭐야.”
모르겠다. 울고 빌며 이제 못 하겠다는 연서를 성에 찰 때까지 가졌다.
몸을 뒤집어 제 얼굴 위로 주저앉히곤 허리를 잡아 고정했다. 게걸스레 탐하며 길게 우는 연서를 봐주지 않고 들쑤셔 놓았다.
바르르 낭창한 허리가 떨리며 연서의 비명이 사방으로 튀었다. 태헌이 젖은 얼굴을 닦고 제 혀를 핥으며 노골적으로 자지러지는 은밀을 감상했다.
“아, 안 돼. 보지 마요….”
“너도 보잖아.”
“그게, 가, 같아요?”
“다를 게 뭐야. 실컷 보든가.”
연서를 더 몰아붙인다면, 언젠가 깨져버리겠지.
하지만 정녕 그걸 바라나?
연서가 티 없이 웃는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반, 우태헌을 제외하곤 기댈 곳 없이 만들고 싶은 마음이 반.
양립한 감정 속에서 태헌이 연서의 등을 보며 다시금 그녀를 채웠다.
힘을 잃고 시트로 축축 처박히는 그녀의 허리를 세워 스퍼트를 올렸다. 어쨌건 한연서가 매달리는 건 태헌이어야 했다.
*
눈꺼풀이 따가웠다. 온몸엔 태헌을 받은 흔적이 가득한데 마음이 황폐했다. 그에게 안기면 안길수록 비어가는 기분이다.
어젠 그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들켰고 울기까지 했다. 애써 현호와 통화하며 괜찮은 척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실패했다.
“매력 없어.”
연서는 중얼거리며 체한 것처럼 답답한 윗배를 쓸었다. 숙취라고 생각했는데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탈이 난 것 같다.
토요일부터 시작된 복통은 월요일인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병원에 다녀온 뒤에 좀 쉬어야겠다. 연서는 하루 계획을 정리하며 슈트를 갖춰 입고 방에서 나오는 태헌에게 말했다.
“이사님, 오늘은 좀 쉬고 싶어요.”
“피곤해?”
“네.”
“아픈 거야?”
태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조금 웃겼다. 주말 내내 사람을 실컷 괴롭혀댄 주제에 아프냐니.
“아프면 같이 있어 주실 거예요?”
순간 시야가 핑 돌아 연서가 눈을 감으며 앉아 있던 소파를 꾹 쥐었다. 진정된 후 눈을 뜨자, 태헌은 이미 재킷을 입고 있었다.
“괜찮아질 때까지 며칠 쉬든가.”
레지던스를 채우는 데 혈안이었던 태헌은 휴가를 손쉽게 허락했다.
“제가 며칠씩이나 쉬면 이사님의 레지던스는 텅텅 빈 채로 방치될 텐데요?”
반항하는 뜻을 담아 대꾸했음에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연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보이는 태헌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많이 힘들면 김현영 비서 불러. 병원을 가든 윤 교수를 부르든. 나보단 그쪽이 빠르고 편리할 테니까.”
심술이 나서 그의 단단한 허리를 더 꽉 껴안았다. 태헌이 그대로 걸어가자 연서가 질질 끌려갔다. 구두를 앞에 두고 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다음 맞선이 수요일이었지?”
맞선. 연서를 현실로 돌려놓는 말이었다. 순간 피가 차게 식어버렸다. 태헌과 오로지 둘뿐이었던 주말이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네.”
“식사는 같은 곳으로 하지. 나쁘지 않던데.”
“네.”
“다녀와서 연락할게.”
“출장, 잘 다녀오세요.”
태헌은 화요일 저녁까지 지방 출장이 잡혀 있었다.
태헌이 허리에 감긴 연서의 손을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 구두를 신고 밖으로 나가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연서를 봐주지 않았다.
쾅.
현관이 닫혔다. 연서는 천천히 제 심장 위로 손을 댔다.
“아 정말 큰일이야. 점점 더 아파지고 있어.”
울듯이 웃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