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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9화 (49/85)

49화

*

연서가 도끼눈으로 태헌을 쏘아보며 말했다.

“두 분 방해되지 않게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앉아서 대기하면 되겠네. 여기 최수현 씨도 이해할 거야.”

“…그래요, 앉으실래요?”

수현이 휘몰아치는 갈등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연서에게 물었다.

“그럴 순, 아뇨. 아닙니다.”

들어오다가 휴게실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태헌 옆에 앉으라고?

미친 짓이다. 이것만은 절대로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수현은 피해자였다. 태헌에게 섹스파트너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수현에게 중요하든 아니든, 연서가 이 자리까지 따라 나온 건 수현을 기만하는 행위였다.

“이사님께서 요즘 농담이 짓궂으십니다. 연락이 오면 찾아뵙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그의 미친 소리를 농담으로 치부한 연서는 뒤로 돌아섰다.

“전에, 선상 파티에서 뵀었는데. 기억나시죠?”

수현의 살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피어오른다. 또각또각. 일부러 힘준 구둣발 소리가 먹먹하게 귓속을 뭉그러뜨렸다.

태헌의 맞선을 직접 보게 되다니. 이런 건 너무 잔인했다. 마음이 하도 너덜거려 더 아플 일은 없을 정도로 심장이 미어졌다. 좋아하는 남자의 맞선. 그리고 그걸 지켜봐야 하는 신세. 전부 끔찍해서 이명까지 들리는 듯했다.

연서는 휴게실로 들어가 쓰디쓴 커피를 홀짝이며, 숙취라도 떨쳐내길 바랐다.

지금쯤 식사 중이겠지.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공들여 다져둔 담담함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연서는 뜨끈해지는 눈시울을 무시한 채, 눈꺼풀을 내리 닫았다.

식사로 끝날 줄 알았던 태헌의 맞선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맞선 상대에게 무도하게 굴 줄 알았는데 태헌은 평범하게 행동했다.

식사를 마친 그가 호텔 라운지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수현을 에스코트했다. 군더더기 없는 매너가 수현의 마음에 쏙 든 것 같았다.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긴 그녀의 귓불이 붉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오른 뒤에 연서가 뒤따라 탔다. 그 후에도 앞서 걸어가는 두 사람의 꽁무니를 쓸쓸하게 뒤쫓아야 했다.

이번엔 라운지 VIP룸에서 커피를 마시는 수현과 태헌의 모습이 연서의 자리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룸은 하필 테이블이 두 개였다. 가벽을 하나 사이에 두긴 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선명하게 보고 들렸다.

태헌은 곧잘 수현의 말에 대답했고, 그녀는 잘 웃는 편이었다. 하긴 연예인 뺨치는 태헌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웃음이 나겠지.

연서는 몇 번째인지 모를 커피를 위장에 쏟아부었다.

그렇다고 수현이 그에 비해 밀려 보이지도 않았다. 외적으로 예뻤고 몸매도 좋았다. 그러나 수현에겐 외모란 가진 것 중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녀를 꾸미는 수식어와 재산은 별처럼 많았다.

맞선 후보가 기재된 서류를 볼 때만 해도 이토록 마음이 아프진 않았는데, 점점 더 견디기 괴로웠다.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외워도 괜찮아지질 않았다. 큰일이었다.

자칫하다간, 누가 말만 걸어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연서는 애꿎은 입술만 씹어댔다.

지옥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드디어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하고 나오는데 수현이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태헌 씨, 모처럼인데 다른 일정 없으면 한잔 더 하실래요?”

“낮술엔 취미 없는데.”

“그럼 밤까지 마시면 되죠.”

노골적인 플러팅이었다. 태헌이 연서가 있는 뒤쪽을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

“뒤의 일정이 어떻게 되지?”

수현의 눈길도 함께 와 닿았다. 연서에게도 대답을 잘해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주말엔 급한 일이 아니면 일정을 빼둔다. 오늘은 맞선이 있어 하루가 통으로 비어 있었고.

변명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수현의 경계심 어린 눈빛에서 연서는 제 발이 저려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 바쁜 일은 없습니다.”

연서의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이렇게 말해도 태헌이라면 거절할 줄 알았다.

“그렇다는데, 한잔하죠.”

하지만 태헌은 연서의 기대감을 저 밑까지 처박아주었다. 하긴, 이런 곳까지 따라오라 심술부리는 사람인데 더한 짓이라고 못 할까.

그는 배려라고 했으나 연서에겐 벌이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태헌은 태연했다.

“그럼 비서님은 이만 돌아가셔도 되지 않을까요? 급한 일이 생기면 전화로 하셔도 되잖아요. 여태 연락 없는 것 보니 괜찮을 것 같은데?”

수현이 연서를 보며 물었다.

“안 되나요?”

연서는 곧장 대답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수현이 태헌의 팔을 슬쩍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풍만한 상체가 그의 팔에 노골적으로 파묻히는 걸 볼 수 없어 연서가 고개를 내렸다.

“이사님,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러곤 도망치듯 달아났다. 연서를 바라보는 수현의 눈빛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날카로웠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하긴. 태헌의 주변을 조금만 조사해도 요즘 어울리고 있는 상대가 연서란 걸 모를 리 없다. 간병인 출신의 비서. 하지만 비서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어쭙잖은 존재.

태헌과의 기울어진 관계를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연서는 너무나 창피했다. 스스로가 너무도 창피해서…….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땐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흐윽…….”

이런 사이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조금의 행복이라도 좋았다. 조금의 애정이라도 기꺼웠다. 그것에 기대어 불행을 외면하려 했던 아둔한 선택을 비난받은 것 같았다.

연서 혼자만의 마음이었다. 결국 태헌이 세운 벽에 부딪혀 접히게 될 사랑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은 점점 더 힘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를 좋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실감 났다. 6개월이란 시간을 채우지 못할 것 같았다.

태헌이 사는 세계를 피부로 느끼고 나자 더 자신이 없어진 거다. 당장 이렇게 힘든데, 내일은 괜찮아질까.

아니 더 비참해질 것이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 중 5분이 행복하다면 나머지 55분은 불행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다.

이 사랑을 과소평가했다.

“흐윽…….”

어쩌면 외사랑을 그만둬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

태헌이 맞선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도 몇 번, 먼 곳까지 날아온 상대와 선을 본 적 있었다. 강 회장의 지시였으나, 태헌의 심드렁한 반응에 약혼은 번번이 물거품이 되었다.

몇 번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 수현의 지루한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품은 결혼 생활에 대한 환상에는 동조하지 못했으나, 이해하는 척은 해줄 수 있었다.

연서가 먼저 돌아가고 나자 술자리는 더욱 지겨워졌다. 안절부절못하며 뒤따라오던 연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모든 게 시시했다.

어젯밤엔, 연서의 귀가를 기다릴 생각으로 일을 마치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적어도 늦은 새벽에는 들어올 줄 알았는데, 연서는 긴 시간 소식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잠깐 졸았음에도 연서가 돌아올 기미가 없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영은 언니와 살고 있으니 그 집에서 외박할 리는 없고. 혹여 백현호의 집에 기어들어 갔으려나.

실소가 흘렀다. 연서가 누구와 자든 어디서 뭘 하든,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의 향방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제 것에 대한 소유욕이라고 치부하기엔 과했다. 그녈 향한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정리되지 않고 혼선을 빚었다. 날이 밝았을 땐, 연서를 맞선 자리까지 데리고 나올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맞선 내내 연서를 곁에 두고 그녀의 위치를 새겨주고 싶었다. 잔인한 방법만이 연서에게 강한 깨달음을 줄 거란 계산이었다.

연서는 패잔병처럼 두 사람의 뒤를 따르며 죽상을 지었다. 그러다 견디지 못하겠는지, 결국 태헌을 두고 도망치듯 떠났다.

식사만 해도 되는 일인데 차를 마시고, 술자리까지 이어갔다. 연서를 상처 주기 위한 수단이란 걸, 태헌은 인정했다. 유치하고 저급하게 연서를 자극했다.

“이만 일어나죠.”

“벌써요?”

수현이 은근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이대로 호텔 방으로 직행해준다면 쾌재를 부르겠지. 하지만 태헌의 머릿속엔 처음부터 최수현이란 여자가 없었다.

태헌은 붙잡는 수현을 기사에게 맡긴 후, 택시를 타고 연서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집보다 연서의 오피스텔을 더 자주 찾았다.

날을 샌 터라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거실에서 연서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연서를 벌주었으니 마음이 가뿐해야 하는데, 되레 불쾌한 태헌과 상반되게 흘러나오는 연서의 웃음이 티 없이 맑았다.

“아 정말? 진짜 그렇대?”

태헌의 보폭이 일정하게 그녀에게로 좁혀가고 있었다. 연서는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그래. 현호 너도.”

또 백현호다. 멀리 치우길 잘했지.

태헌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태헌을 발견한 연서가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로 허리를 세워 앉았다.

다리를 한쪽 소파 헤드레스트에 걸치고 방만한 자세로 뒹굴거리던 연서는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어…. 현호야, 나 잠깐. 나중에 통화할게. 응. 응. 그래.”

전처럼 핸드폰을 뺏어 멀리 던지지 않은 것만으로 태헌은 인내를 다했다. 지난번, 핸드폰을 던진 걸 사과하라던 연서의 발칙한 모습이 어딘가 깊게 박혀 자꾸 떠올랐기에 이번엔 억눌렀다.

태헌이 어두워진 액정을 보며 조소했다.

“각별한가 봐?”

“어떻게 벌써 오신 거예요?”

“왜. 최수현이랑 떡이라도 치고 와야 했을까?”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세요?”

태헌이 눈썹을 구겼다. 연서에게 우태헌은 질문만 남는 존재인 듯하다.

연서는 태헌의 행동에 늘 의문을 가졌고, 그걸 숨기지 않았다. 이게 우태헌인데, 마치 연서는 그를 부정하는 것처럼…….

“맞선은 잘하셨어요?”

“어련히.”

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곤 헤드레스트를 짚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연서의 턱을 쥐고 입을 맞추려는데 작은 두 손이 그를 밀어냈다.

“씻고 오세요.”

태헌의 입꼬리가 진하게 곡선을 만들었다.

“이건 또 무슨 취급이지?”

태헌은 지금 당장 연서를 가지고 싶었다. 새벽 내내, 날이 밝도록 밖을 떠돌기 바쁜 그녀를 기다리며 속이 시커메졌다.

급기야 연서의 세상을 전부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의지할 곳이 태헌의 품밖에 없도록, 연서가 아는 모두를 치워버리고 싶었다.

다시금 태헌이 키스를 시도했고, 연서가 발로 그의 배를 밀어냈다.

태헌이 짓씹듯이 탁한 목소리를 흘렸다.

“이게 아니지. 넌 받으라고 하면, 받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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