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연서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받으란 뜻을 품고 종이가방을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걸어가 소파에 앉은 태헌은 종이가방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애초에 커프스링크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사람처럼.
얄미워 눈가가 뜨끈해졌으나 이런 순간에도 태헌을 마주하는 게 들떠서 따지길 그만뒀다.
“그럼 내일 맞선 시간 맞춰서 연락 다시 드릴게요.”
태헌의 맞선이 정해졌다. 연서는 착실히 제 몫을 다했고 국회의원 외동딸인 최수현을 첫 순위로 꼽았다.
사실 연서에겐 태헌과 결합했을 때 사업적 이득이 큰 후보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이미 선별되어 올라온 후보이기에 결점은 없을 터. 그래서 그냥 무작위로 선출했다.
세 명의 최종 후보 중 가장 빠르게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첫 순위가 된 것이고.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병원?”
태헌의 도움을 받아 한 번 더 중환자실을 찾은 뒤로는 병원에 거의 가질 못했다.
태헌이 제 레지던스에 필요한 물건을 사두라며 연서를 계속 호출해댔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태헌의 개인 비서가 아니라 거래상이나 상인, 쇼핑대행자 등으로 불려야 마땅한 것 같았다.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서 밥 먹으러 갈 거예요.”
“이리 와서 앉아.”
태헌이 고개를 까딱여 제 무릎을 눈짓했다. 연서가 머뭇거리다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 압도적이었다. 눈썹을 약간 덮은 머리칼과 짙은 눈썹. 수려한 콧날까지.
솔직한 심정으론 그를 보고만 있어도 온종일 쌓인 앙금이 스르르 풀렸다. 한숨이 났다가도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태헌의 어깨를 짚고 무릎에 앉으려 하자, 그가 연서의 H라인 스커트를 허리춤까지 걷어 올렸다.
놀란 연서가 움츠러들었다. 맨다리에 에어컨 냉기가 섬뜩하게 달라붙었다.
“누, 누가 오면 어떻게 해요.”
연서가 불안하게 끙끙대자, 태헌이 통통한 살집을 잡고서 그대로 내려 앉혔다.
“부수고 들어오면 모를까. 아무도 못 와.”
얇은 한 장의 옷 너머로 태헌의 슈트 질감이 느껴졌다. 이미 몸집이 커진 열감은 원하는 바를 숨기지 않았다.
태헌은 블라우스 단추를 단숨에 풀곤 답답하게 감춰두었던 말랑한 무덤을 유린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자극점이 잘게 흔들렸다. 튀어 나가려는 연서의 신음이 그의 입술에 먹혔다.
입술과 블라우스 안쪽, 은밀한 곳까지 태헌이 밀려들었다. 달아오른 연서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혀를 받으며 끙끙댔다.
태헌의 손에 길든 몸은 작은 자극에도 금방 열이 올랐다.
여기서 하는 건 아니겠지.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연서가 아득한 갈등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네. 우태헌입니다.”
연서가 잠시 숨을 내쉬는 사이 그가 전화를 받았다. 믿기지 않아 헛것을 들었나 의심했다.
“아뇨. 말씀하시죠.”
태헌은 무심한 투로 전화를 이어갔다. 사람을 반쯤, 아니 그보다 더 벗겨두곤 아무렇지 않게…….
연서는 뜨끈한 숨을 내쉬며 그가 통화를 마치길 기다렸다. 그러나 태헌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며, 사태가 심각해지는 기조가 보였다.
인형처럼 그의 무릎에 얌전히 앉아 있던 연서는 천천히 속옷을 바로 하고 블라우스 단추를 잠갔다. 일어나 스커트를 정돈하고 흐트러진 머릿결까지 정돈했을 때 태헌이 전화를 끊었다.
연서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와서 앉아, 다시.”
“아니요. 이사님 바쁘실 텐데 일하세요. 저도 약속 있고요.”
“이건 어쩌고 간다는 거야.”
태헌이 흉흉한 제 배꼽 아래를 눈짓하며 성마르게 물었다.
그의 무심함은 수시로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연서는 그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지금도 그러했다. 갈급하게 입맞춤을 하다가도 그는 순식간에 온도를 잃었다.
한순간에 연서를 잊을 수 있는 그런 사람.
“친구들이 기다려요.”
“백현호랑 꽤 사이가 좋나 봐.”
“가족 같은 사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래서 돈도 빌려주고?”
연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뒷조사 한번 제대로 하셨나 보다.
“이사님, 부탁인데 현호에 대해선 나쁘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순간 태헌의 목울대가 날카롭게 움직였다. 연서는 뒤로 돌았다. 오늘은 이만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랑에도 체력이 있나 보다. 기력을 다 소진하자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으니.
“한연서.”
연서는 그녀를 부르는 짙은 음성에도 발목 잡히지 않으려 도망치듯 사무실을 벗어났다.
*
택시에서 내리는 연서의 걸음걸이가 불안정했다. 연서는 속부터 올라오는 술 내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과음을 후회했다.
걱정하는 현호와 지영 앞에선 취하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냉방이 시원한 택시에 오르자 취기가 해일처럼 올라왔다. 하긴 날이 새도록, 장장 아침 10시가 넘도록 술판을 벌였으니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호와 지영도 거의 네 발로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이 연서의 귀가를 챙기긴 어려웠다.
현호가 곧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말만 안 했어도 이렇게 달리진 않았을 텐데.
몇 시간 전 현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나 곧 한국 떠나.」
「뭐?」
「대만에서 좋은 제의가 들어왔거든. 2년 정도 거기서 활동할 듯.」
연서는 쨍하게 뜬 해를 피하려 눈두덩을 가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보.”
현호의 눈에서 주저함을 읽었다. 꼭 가야 하는지 묻자 현호가 한탄하듯 말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대표가 까라면 까야지. 그리고 다녀오면 모델뿐만 아니라 연기 쪽으로도 필모 생기는 거니까 손해는 아니야.」
종종 한국에 들어올 거란 말에도 연서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현호가 군대 갈 때도 이렇게까지 걱정이 안 되었는데.
내가 누굴 걱정할 팔자는 아니지만 먼 땅으로 떠난다니 걱정과 착잡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연서는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층수가 변해가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젠 호화스러운 오피스텔이 익숙해지고 있다.
그게 조금은 두려웠다. 이곳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전보다 더 처량해질 게 뻔했다. 실은 현호를 핑계 삼아 진탕 취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놓인 구두를 본 연서가 걸음을 빨리했다.
태헌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재킷을 벗은 그가 암 레스트에 걸친 팔 위로 머리를 괴고 있었다.
연서가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술에 취해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이사님이 지금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세요?”
분명 1시간 전에 태헌에게 전화해 맞선 장소를 다시 일렀다. 지금은 11시 15분. 12시 맞선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귀가가 늦네.”
“술 마시다가……. 그건 그렇고 이사님은 지금 여기 계실 때가 아니잖아요.”
“준비해.”
“준비?”
연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술기운에 휘청거리며 테이블을 짚었다. 그 모양을 태헌이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네가 기획한 맞선인데, 어떻게 되는지 직접 봐야지?”
“저, 저더러 맞선을 따라와라 이 말이세요?”
아니길 바라며 물었다.
“바로 준비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태헌은 이견 따윈 받지 않겠다는 건조한 시선으로 연서를 응시했다. 연서가 비틀거리다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얼굴에서 떼 냈다.
“저 취했어요, 이사님. 괜히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그건 한연서 씨가 감당할 몫이고. 내 일정엔 비서가 맞춰야지.”
이런 태헌에게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다. 연서가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씩씩거렸다.
“그럼 미리 말해 주셨으면 좋았잖아요.”
“40분 남았네. 오늘 불발되면 다시 약속 잡는 것도 너란 것 잊지 말고.”
한번 마음을 정하면 바꾸지 않을 남자란 걸 안다. 입술을 씹은 연서가 욕실로 향했다.
*
조용한 룸을 선호할 줄 알았는데, 상대측은 맞선 장소로 호텔에 입점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원했다.
주말 점심이라 사람이 많았다. 태헌이 안으로 들어가자 차츰차츰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혹시 이걸 노린 걸까. 태헌의 맞선 상대라는 딱지는 혹여 결혼이 불발되더라도 유용하게 이용할 패가 될지 몰랐다.
그만큼 우태헌은 잘난 사람이었고 누구나 탐내는 남편감이었고 기업인이었다.
연서는 숙취해소제를 먹었음에도 뱃멀미를 하는 것 같은 괴로움을 이겨내고 태헌을 자리로 안내했다.
12시 10분. 결국 약속 시간엔 늦었고 상대는 이미 자리에 나와 있었다.
칸막이가 있는 창가 자리를 향해 연서가 손을 뻗었다.
“상대분 먼저 와 계시네요. 저쪽이에요.”
태헌이 지체 없이 그리로 다가가자, 창밖을 보던 수현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긴 시간 공들인 태가 나는 머리 세팅과 화장, 옷차림이 맞선 보단 전장에 나가는 것처럼 사뭇 비장해 보였다.
연서가 창립기념 파티에 끌려갔을 때만큼이나 치장에 힘쓴 모습이었다. 아니, 수현에겐 이런 게 일상일 터다. 그 거리감에 연서가 속으로 쓰게 웃으며 두 사람을 관람자처럼 지켜보았다.
“우태헌입니다.”
“최수현입니다. 전에도 몇 번 뵌 적 있죠?”
태헌이 고개를 까딱이며 의자를 뺐다. 연서를 발견한 수현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무언의 질문에 태헌이 착석하며 말했다.
“비서입니다. 급하게 연락받을 데가 있어서 대기할 건데, 불편합니까.”
수현은 찰나 스친 당혹감을 지우고 미소를 좀 더 진하게 만들어냈다.
“사람 세워두는 게 미안해서 그러죠.”
“그럼 앉으라고 해도 되고.”
“네?”
수현이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연서 또한 질겁해 입술을 깨물었다. 연서에게 직접 빼주기라도 하려는 듯 태헌의 손에 의자 등받이가 닿아 있었다.
“그러지 말고 앉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