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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4화 (44/85)

44화

*

커다란 침대를 뒹굴다 눈을 떴다. 연서는 멀지 않은 곳에서 나는 소리를 따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으…….”

낯익은 둔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병자처럼 비틀거리며 침실을 빠져나가 거실에 도착했다.

어젯밤의 격정은 말끔하게 지운 얼굴로 태헌이 재킷에 팔을 넣고 있었다.

어제완 다른 슈트가 어디서 났는지 궁금했으나 묻지 않기로 했다. 오피스텔의 옷장에는 이미 연서 몫의 새 옷이 빼곡했으므로 그의 옷이 한두 벌 더 갖춰져 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가는 거예요?”

연서가 벽에 기댄 채 물었다.

엉덩이만 간신히 덮은 티셔츠 아래로 뻗은 흰 다리는 얼룩덜룩한 색으로 뒤덮였다. 그리로 닿은 태헌의 시선이 열기 없이 건조했다.

디지털 시계를 확인하는 그는 바빠 보였다.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할머님 면회를 할까 하는데.”

“며, 면회요? 선생님 면회??”

지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간 맞으면 함께 가고.”

“좋아요. 너무 좋아요.”

태헌이 다가왔다. 연서는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의 재킷 끝을 슬쩍 잡았다.

“정말 저도 갈 수 있는 거죠?”

“그래. 식사 보낼 테니 먹고 좀 더 자.”

“나가 봐야 해요. 병원에 들렀다가 친구랑 밥 먹기로 했어요.”

“친구?”

“현호라고 불 아니, 소꿉친구요. 어제도 제가 밥 사려고 했는데 취해서 돈을 못 낸 거 있죠. 현호가 장례식 때 많이 도와줬거든요.”

“그래서.”

“점심에 만나려고요.”

“저녁에 면회할 건데 병원은 굳이 갈 거 있나. 뭐 하러 힘을 빼려 들어.”

“저도 알아요. 효율적이지 못한 거.”

“알면, 따라야지?”

태헌의 무심함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있었다. 그 거리감이 싫어서 연서는 계속 그의 재킷 끝을 쥐고 있었다.

훌쩍 가버리면 외로워지기에. 이런 남자에게 온정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출장 기간 섭섭하게 삭아간 마음을 조금은 토로해도 되지 않을까.

안부만 묻는 하루 한 번의 통화가 사실은 부족했다고 말하면 태헌은 귀찮아할까.

“이사님은 그렇게 마음이 딱딱 효율적으로 움직이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안 그래요. 병원에 가야 마음이 놓이는걸요.”

“그럼 같이 질질 짜면서 할머니 병원 앞에서 죽치고 있을까? 그래?”

“비꼬지 마세요.”

연서가 입술을 실룩이다 다물었다.

“밤새 잠 못 자고 섹스했어.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뭘 하겠단 거야. 체력 관리해 놔야지. 그래야 너 좋아하는 선생님 만날 기회가 왔을 때 멀쩡한 꼴 보이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이 다 맞았다.

“네. 이사님은 틀린 적이 없으시죠.”

“30분 안에 아침 식사 들일 거야. 김현영 비서가 가지고 올 거고, 그거 먹고 쉬어.”

태헌이 마무리하듯 돌아가 손목에 시계를 채웠다. 여전히 쌀쌀한 대응에 마음이 욱신댔다.

연서는 비틀비틀 달려가 뒤로 향한 태헌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럼 이사님도 쉬면 안 되나……?”

연서가 바람의 끝을 흐리며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냄새. 시원하고 깔끔한, 묵직한 남자의 향이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사람을, 적당히 쑤셔놔야지.”

허리에 감긴 연서의 팔을 떼어낸 태헌이 뒤돌았다. 그의 안광에 탁한 이채가 스쳤다.

“너를 어떻게 할까.”

“예뻐해 주세요. 못되게 하지 마시고요.”

연서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설마 건방지다고 여자를 패고 그러진 않을 테니 적정선 안에선 조금 스스럼없어도 될 거란 계산이 있었다.

“어지간히 기어올라야지.”

한숨을 깊게 내쉰 그가 연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태헌이 돌아갈 거란 걸 알았다. 그래도 입을 맞춰 주었으니까 만족해야겠지.

“회사 잘 다녀오세요.”

“그러지.”

태헌이 비딱하게 대답한 후 돌아섰다. 쾅. 문이 닫히고 도어록이 작동했다.

연서는 간지러운 키스가 닿았던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혀뿌리까지 훑는 진한 키스가 아닌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게 더 위험한 것 같다고, 연서는 주먹을 말아쥐며 떨리는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

태헌의 말대로 외출할 몸 상태가 아니었다. 연서는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깼다.

2시?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현호와는 오늘 점심에 만나자는 약속을 해두었다. 아직까지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자 현호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나 오늘 못 나갈 것 같다.

“목소리가 이상한데……. 혹시 감기야?”

-글쎄. 온몸이 아프네. 열도 나는 것 같고.

“약은 먹었어? 열은 재본 거야?”

-아니. 손 하나 까딱 못 하겠어. 어제 수영장에서 촬영했는데 그거 때문인가…….

숨소리가 좋지 않았다. 현호의 상태가 심각한 것 같았다.

“집이지? 금방 갈게.”

연서는 대충 옷을 챙겨입고 현호의 집으로 뛰어갔다. 그의 매니저를 부른 뒤 열이 40도 가까이 오른 현호와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급성 편도염이란 진단과 함께 상태가 심각하니 입원 치료를 받으란 소견을 받았다. 특실에 현호를 입원시키고 나고 얼마나 지났을까. 휴가를 내고 지방에 내려가 있던 매니저가 도착했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었다. 열은 좀 내렸으나 현호는 여전히 근육통과 인후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연서는 저녁에 다시 오겠노라, 약속을 남긴 뒤 병원을 나섰다.

저녁에 강 여사의 면회가 있었기에 현호를 뒤로해야 했다. 강 여사가 수술한 후 한 번도 뵙지 못했기에 면회를 포기할 순 없었다.

연서는 늦지 않게 신주 병원 중환자실 앞 복도에 도착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태헌이 언제쯤 올까, 미리 전화라도 해야 하나 자잘한 생각이 몰려올 때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헌은 신 비서와 함께였다. 연서는 벤치에서 엉덩이를 띄워 신 비서에게 눈인사했다.

그러자 신 비서도 고개를 숙였다. 태헌의 시선이 연서에게 흘긋 닿았다가 떨어졌다.

“들어가지.”

면회복을 입고 준비한 후 신경계 중환자실에 입성했다. 개두술을 한 강 여사의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호흡기과 각종 장치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강 여사는 긴 여행을 떠난 것처럼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래도 언젠간 돌아오실 거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지금 이 모습을 보자 자신이 없어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녀가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보이기 때문일까.

연서가 주춤거리며 강 여사의 근처로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발이 쉬이 떼어지질 않았다.

그런 연서의 등을 밀어준 건 태헌의 손이었다. 괜찮다는 듯 그가 고갯짓했다.

“선생님.”

용기를 낸 연서는 핏기를 잃고 거멓게 죽은 손을 잡았다. 귀한 시간인데,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 같다.

희망을 드리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강 여사에게 독이 될까 봐, 말문이 막혀버렸다.

“할머님, 기다리는 사람 많습니다.”

그때 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평소와 같이 덤덤한 투였다.

“일어나셔야죠. 한연서가 지극정성입니다. 매일 병원에 죽치고 앉아선 고집을 부리는데, 일어나서 한마디 하세요.”

그의 태평함에 강 여사가 그래 아무 일 아니다, 하고 일어날 것만 같았다. 지금만큼은 태헌의 무심함이 위로가 되었다.

먹먹한 마음을 삼켜낸 연서는 강 여사의 귓가에 다가가 목소리를 쥐어짰다.

“할머니, 저 연서예요.”

눈물이 차올라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섣불리 빨리 나으란 말도, 일어나시란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사실은 선생님이 아닌 할머니라고 불러보고 싶었단 걸 그녀는 알까. 피도 섞이지 않은 주제에 그녀의 짐이 될까 늘 억누르던 마음이었다.

“…사랑해요.”

연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차라리 목숨을 끊어주길 바라는 환자를 적지 않게 봐왔다. 그래서 강 여사에게 차마 쾌차하란, 삶의 경계로 돌아오기 위해 사지를 태우는 고통을 참아내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품은 마음만 전했다. 그 누구보다 따뜻하게 연서를 안아주었던. 강인한 품과 올곧은 성품을 지닌 강 여사를 향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담아 말을 꺼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할머니.”

마음을 누르고 있는 죄송하단 말 대신, 연서는 감사를 택했다.

짧은 면회 시간은 끝이 났다. 태헌이 손을 써서 따로 얻은 면회 시간이었기에 더 뵙고 싶다고 떼쓰지 못했다. 돌아온 중환자실 복도가 전보다 더 삭막하게만 느껴졌다.

“항암 못 하고 바로 수술 들어간 거라 종양 크기도 많이 컸고 운동 담당하는 뇌 쪽이라 예후가 좋진 못해.”

태헌의 설명에 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해와 사람들의 말을 취합해 대충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깨어나신다고 한들 후유증이 있을 거고.”

“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이만 들어가.”

“네.”

연서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현호에게 가봐야 했다.

그 순간 복도 끝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 이사, 이 시간엔 웬일이야? 면회 시간도 아닌데.”

송현이었다. 그녀가 사람 둘을 대동하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태헌에게로 향했던 송현의 이목이 연서에게 닿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간병인 아가씨는 아직도 여기 있네. 승빈이 떠난 지 꽤 됐는데 같이 안 가는 거야?”

이런 때 뭐라고 대답하지? 연서는 질문하듯 태헌을 바라보았다.

“고모님은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엄마 담당의 만나러 왔다가 면회 시간 얼마 안 남아서 기다리려고. 참, 우 이사 선본다며?”

송현은 금세 연서에게서 관심을 끄곤 태헌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송현 같은 부류는 고용인을 먼지나 공기. 혹은 도구 정도로 여겼다. 그러니 연서가 태헌의 애인이 되었단 건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승빈의 약혼녀라고 했을 때 불쾌하게 수색하던 그 시선이 기억났다.

“고모님도 줄 세워 놓은 혼처가 여럿입니까?”

“정말 나도 추천해도 돼? 왜, 태헌이 너도 알지? 김 의원 딸인데…….”

이렇게 태헌의 결혼 상대로 거론되는 상대의 이력을 직접 들어야 하는 건 비참한 기분이었다. 태헌이 가만히 듣고 있는 것까지 더해 가진 마음이 좀 더 빈곤해졌다.

생각보다 더 그를 좋아하고 있구나. 연서는 아린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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