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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3화 (43/85)

43화

*

출장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강 여사가 수술대에 올랐다는 소식에도 쉽사리 귀국할 수 없을 만큼 일이 꼬일 대로 꼬였다.

태헌은 귀국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해 강 여사의 얼굴을 봤다.

회사에 들러 회의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8시. 늦다면 늦고 아직이라면 아직인 시간이었다.

어떻게 할까.

그간 연서에게 붙여둔 자석은 유용하게 정보를 물어왔다. 연서의 동선은 지루하리만치 단조로웠다. 병원, 집, 편의점. 가끔 마트. 그게 다였다.

연서는 알아주는 이도 없는데 병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처음엔 24시간, 그다음엔 면회 시간에 맞춰서, 그다음에 면회 시간을 피해서 병원을 방문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기다려도 강 여사의 면회는 할 수 없단 사실을 깨닫고 체념한 거겠지.

희한했다. 그런 연서의 모습을 그려보면 답답하고 짜증 나야 마땅한데. 비효율적이고 감정적인 행위에 염증을 느껴야 하는데 연서가 딱하게 느껴졌다.

조금 귀엽기도 하고.

태헌이 손을 써 주면 연서도 어렵지 않게 면회할 수 있겠으나 그런 배려는 나중으로 미뤘다. 귀국하면 함께 갈 생각이었다. 그럼 빚지기 싫어하는 연서가 어떻게 나오려나.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여태 연서는 그가 주는 것을 거부하는 행태로 받았다. 태헌이 빚을 갚아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5천만 원짜리 수표를 돌려주겠다고 오기를 부렸다.

또 편히 지내라고 내어준 오피스텔엔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몇 평짜리 고시원 방구석엔 왜 자꾸 기어들어 가는지. 불편하기만 할 텐데.

태헌은 운전대를 잡고 연서의 고시원이 있는 동네로 향했다. 골목골목을 느리게 달려 고시원 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주차했다.

그때였다. 그 자식, 연서의 소꿉친구 백현호가 고시원 앞에 나타났다.

담배를 빼 물고 비딱하게 선 채 전화하는 자세가 양아치처럼 건들거린다. 눌러쓴 모자 아래로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꽤 갸름했다. 객관적으로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모델이자 셀럽인 백현호는 요즘 국내에서 인기몰이 중이었다. 알아보는 이가 더러 있을 거란 뜻이다.

연서가 과연 그와 어울려줄까 싶은 의문이 들었으나, 괜한 기우였다. 고시원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연서는 나타나자마자 밝게 웃었다.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듯 태헌에겐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편안한 모습으로 현호와 투닥거렸다. 똑같은 모자를 쓰고 한 세트처럼 아옹다옹하는 게 친분을 과시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태헌은 핸들을 감아쥔 손가락을 느긋하게 두드렸다. 저 사이에 끼어드는 일이 문득 추저분하게 느껴져 차를 돌렸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여독을 풀 겸 술을 한잔했다. 자정을 넘은 시간인데 연서는 아직도 삼겹살집이란 보고를 받았다.

태헌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 없는 연서는 어쩌면 그보다 더 원리주의자였다. 태헌이 하루에 한 번 전화하면 반갑다는 듯 받아주긴 하였으나 그게 다였다.

주고받는 조건이 있는 연애란 걸 연서는 너무나 잘 알았다. 언젠가 그녀의 눈동자 속에 우승빈이 아닌, 자신을 발견했던 날.

그때부터 시작된 기대감은 어느샌가 퇴색했다.

한연서가 우태헌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면? 그저 착각이었다면?

태헌은 제게 호감 느끼는 여자들이 어떤 표정과 태도를 보이는지 잘 알았다. 연서에게도 그 비슷한 기운을 읽었다고 자신했는데 떨어져 지내는 동안 그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자 불쾌해지고 있다. 태헌은 이 기분 나쁜 초조함을 종결하고자 원인인 연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시에 연서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태헌의 집에서 거리가 있어 속력을 내야 했다.

태헌은 도착하자마자 욕실을 열고 물을 가득 채웠다. 술에 취한 것 같으니 제대로 깨워주려고.

한 시간 뒤, 연서가 오피스텔 벨을 눌렀다. 태헌이 문을 직접 열자, 후텁지근한 밤공기를 한가득 묻힌 연서의 발간 뺨이 보였다.

오피스텔 키는 들고 다니지 않는 듯 연서의 손엔 핸드폰 하나뿐이었다.

3주간의 출장 내내, 태헌이 한시도 잊지 않았던 여자.

연서가 그를 올려다보곤 곤란하다는 듯 어쭙잖게 웃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목 안쪽부터 열이 끓어올랐다.

“늦었네.”

“술 취한 거 싫어하셔서 깰 겸, 조금 돌아다녔어요.”

괜한 말을 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 새끼랑 이 시간까지 돌아다닌 한연서. 술이 떡이 된 것도 괜찮으니 바로 오라고 할 것을.

“저도 빨리 오고 싶었는데……. 근데 언제 오신 거예요? 미리 말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데리러 갔을 것을.

태헌은 후회라는 어울리지 않은 감정에 잠식되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전처럼 연서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연서의 말투가 말랑하고 유연했다.

시선을 맞추면서도 부끄러워하며 슬쩍슬쩍 다른 곳을 보았다. 여전히 태헌을 원하고 있단 증거였다. 그걸 확인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누구와 마셨는지 묻지 않았고, 무엇하다 왔는지 묻지 않았다. 갈급한 입맞춤을 했다.

현관을 벗어날 여력 없이 입을 맞추며 티셔츠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살결을 어루만지자 연서가 턱을 돌리며 태헌을 피했다.

“이사님, 잠깐 씻고…….”

“하고 씻어.”

“안 돼요. 심하단 말이에요. 뛰느라 땀도 났어요.”

“그럼, 같이해.”

태헌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긴 다리가 고민 없이 욕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욕조 턱에 앉혀두자 연서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였다. 그럴 때마다 태헌에게 슬쩍슬쩍 부딪혔다.

“술 아직 안 깼네.”

“아닌데. 다 깼는데…….”

“평소에도 이래? 안 취했다고 우기면서 사람한테 달라붙어?”

연서가 입술을 제 손등으로 누르며 난감해했다. 술기운을 이겨내려고 하는데 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인사불성이 됐으면 안지 못했을 텐데 연서는 몸을 이따금 흔들 뿐, 태헌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확하게 하고 있었다.

그녀가 티셔츠를 끌어 올리려는 태헌의 팔을 밀어냈다.

“이사님, 저 혼자 씻을래요. 그럴래요.”

태헌이 잠시 물러났다. 혼자 씻다 넘어질 정도는 아닌데 거절당하니 속이 썼다.

“천천히, 해요.”

조급했단 걸 인정하자 짐승처럼 이곳까지 몰아붙인 짓이 얼마나 그답지 않았는지 상기되었다.

“씻어.”

연서가 발간 뺨을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나갈게요.”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가 타닥타닥 태헌의 인내심을 두드렸다.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 같기고,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한 소음이 그의 무지근한 박동과 함께 박자를 탔다.

물소리가 그치자 침대에 앉아 있던 태헌이 벌떡 일어났다. 흉흉한 분신이 벌써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런 건 비이성적이란 걸 알면서도 굳이 냉정해지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사님……. 저 다 했어요.”

훈기가 쏟아지는 문틈 사이로 연서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을 입고 나온 연서는 이다음을 준비한 것처럼 허술했다,

끝이 구부러진 젖은 머리칼은 태헌에게만 허락한 유연함처럼 아슬아슬했고 빨간 입술이, 윤기 나는 피부가, 채 여미지 않은 가운이 그에게만 허락된 틈처럼 유혹적이었다.

“이제 잠깐은 없어.”

“네.”

태헌은 이번에도 문 앞에 선 연서에게 이리로 오라고 하지 않았다. 직접 움직였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턱을 틀어 입술을 맞추고 자연스럽게 허리를 휘감아 농도를 조절했다. 아니 조절하려고 했다.

서서히 속도를 높여야 하는데 처음부터 최대 속력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침대에 눕히는 순간에만 가까스로 조심스레 다뤘다.

“으읏!”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하는데 왜 도망이야. 비틀지 마. 다쳐.”

가르고 파고들어 흔드는 행위에 주저함을 비운 채로 내달렸다.

미치겠는 건.

“이사님 좋, 좋아요…….”

버거워하면서도 울면서도 태헌을 밀어내지 않고 꽉 껴안는 연서의 반응이었다. 연서보다 느린 템포 절정에 오르는 태헌인데, 이번에 비슷하게 폭발했다.

고작 한 번으론 성에 안 찼다. 눈을 가물거리는 연서를 깨웠다.

“아직 안 끝났는데.”

태헌이 몸을 돌려 배 위로 연서를 올렸다. 바짝 엎드려 숨을 헐떡이던 연서가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태헌이 꼬리뼈 주변의 말랑한 살 무덤을 손아귀 가득 쥐었다.

“다른 데도 여기만큼 찌워 봐.”

마르기만 한 몸이면 차라리 낫겠는데, 연서의 나체는 사람을 돌아버리게 할 만큼 이중적이었다. 어느 곳은 하늘하늘했고 어느 곳은 육감적이었다.

“이 자세…….”

“힘들어?”

“깊어서…….”

“그러라고, 하는 거지.”

태헌이 짓궂게 허리를 쳐올리자 연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네가 해봐. 난 조절이 안 되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태헌이 재촉하듯 통통한 살갗을 쥐고 뭉근하게 치대자 연서가 허리를 세웠다.

그것만으로 사정의 기운이 치밀어 태헌은 욕지기를 삼켜야 했다.

“잘 못할 것 같아요.”

“기대 크게 안 해. 뭐든 좋으니까, 연서야.”

그가 잠긴 목소리를 내뱉을 때마다 연서가 반응한다는 것을, 이어진 부분으로 알 수 있었다.

“힘들면 앞뒤로만 움직여.”

연서가 그의 배를 짚고 천천히 율동했다. 미숙하고 서툴기 짝이 없었으나, 태헌을 환장하게 하기 충분했다.

출장 기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느끼던 갈증이 점점 지독해졌다. 몸을 섞을수록 해갈과 목마름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태헌이 결국 참지 못하고 마구 그녀를 흔들었다. 연서의 울음이, 가냘픈 몸짓이. 결국엔 그를 향해 날아드는 나비 같은 애처로움이 진한 만족감을 낳았다.

“눈 떠. 아직 멀었어.”

하지만 그만큼 더, 그녀를 원하게 되었다.

연서 또한 그랬다. 거칠게 몰아붙이는데도 붉은 살갗이 아프지도 않은지 그에 맞추려 노력했다.

“더 달라는 거지. 받을 순 있고?”

어디까지 기어오를지 궁금하다. 괴롭히고 싶었다.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는 해답을 찾으려 헤매는 개 같은 기분.

이 불쾌한 갈망이 과연 성욕일까.

태헌이 의문을 가진 채 낮은 신음을 쏟아냈다.

“연서야, 뒤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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