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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2화 (42/85)

42화

*

장마가 끝났다.

태헌이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고, 연서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듯 조마조마하게 강 여사를 간호했다. 하루하루 기력을 잃어가던 강 여사는 점차 시력을 잃어갔다. 구토 증세도 나날이 심각해졌다.

머리를 깨뜨릴 듯한 두통은 진통제와 주삿바늘로도 해결하지 못했다. 상주하던 주치의가 고개를 저은 날, 강 여사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구급차 안에서 연서는 의식이 거의 없는 강 여사의 손을 잡고 울었다. 응급 상황이 되면 수술을 집도하기로 했다고, 자식들끼리 합의가 끝난 상황이라고 했다.

이 일에 태헌의 입김이 들어갔을까. 용인 집에서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길 원한 강 여사의 결정을 태헌은 헷갈려 했다. 소식을 들었다면 태헌도 마음이 복잡할 터다.

아침에 가까운 새벽이었다. 미국 시차를 빠르게 계산한 연서는 수술실 문이 닫힌 뒤 태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초조하게 통화 연결음을 기다렸다.

보통 하루에 한 번쯤 태헌에게서 연락이 왔다. 연서가 먼저 연락한 건 출장 열흘 만인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

태헌의 주변이 조용한 것 같았다.

“이사님.”

-할머님 얘기라면 들었어.

“선생님께서 많이 위독하시대요. 어려운 수술일 거래요. 많이요.”

-알아. 할 말이 그게 다야?

연서의 예상과 다르게 태헌은 무심하고 차가웠다. 그래도 속은 그게 아닐 거라고 애써 그를 두둔하며 연서가 질문했다.

“한국엔 언제 들어오세요?”

-일주일은 더 걸려.

“……바로 못 오는 거예요?”

-그래, 용건 따로 없으면 이만 끊지. 지금 좀 바빠서.

“네. 죄송해요.”

연서는 통화가 끊긴 뒤 젖은 눈을 아프게 깜빡였다. 허망하고 텅 빈 마음에 찬바람처럼 들이닥쳤다.

적어도 태헌이 강 여사의 안부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빨리 가겠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 밖에도 할머님을 잘 부탁한다든가 하는, 태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주 많았다.

실은 그런 태헌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강 여사의 손이 너무 야위어서, 금방이라도 힘을 잃을까 두려웠다.

이런 때 누구라도 의지하고 싶었는데. 그게 태헌이었으면 했는데.

그리고 저 역시 그를 위로하고 싶었는데…….

연서는 수술실 복도에 풀썩 주저앉았다. 강 여사를 찾는 그녀의 핏줄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긴 수술 끝에 강 여사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명망 높은 교수가 집도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나이가 많아 회복이 더딜 거란 말을 들었다.

냉기 가득한 중환자실 복도가 붐볐다. 보호자들의 애타는 마음이 어둡게 가라앉은 공간. 그들의 얼굴에 스민 수심을 읽으며 연서는 한곳으로 물러섰다. 속이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나 강 여사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깨어날 때까진 중환자실을 벗어나진 못할 거라고 했다.

면회는 하루 두 번으로 제한적이었다. 강 여사의 피붙이들이 차례로 중환자실로 향했고 당연하게도 연서에겐 차례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서는 병원을 떠나지 못했다. 중환자실 근처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이런 미련한 짓은 윤해를 이골나게 했다.

며칠간 중환자실 앞에서 종종거리던 연서를 보다 못한 윤해가 화를 냈다. 당분간 쉬다 오라며 연서를 병원 밖으로 내쫓았다.

사실 연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단 걸 알고 있었기에 마지 못해 병원 밖으로 나왔다. 버스를 타고 오랜만에 고시원을 찾았다. 다달이 35만 원씩 꼬박꼬박 입금한 덕에 고시원에서까지 쫓겨나는 일은 면했다.

1층 입구를 지키는 고시원 총무와 눈인사하고 여성 전용 팻말이 붙은 3층으로 올라갔다. 다닥다닥 붙은 방문의 가장 끝방이 연서의 거처였다. 창이 붙은 방을 얻고 싶어 택한 방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묵은 공기가 훅 끼쳐왔다. 습한 기운을 떨치고자 창문부터 열었다. 책을 펼쳐놓은 것처럼 작은 창이지만 이마저도 없었다면 고시원 생활은 더욱 참담했을 터였다.

창을 열자 용인 집에서 보이던 예쁜 풍경 대신, 옆 건물의 흐린 외벽과 상가 건물이 시야를 채웠다.

“하아…….”

그동안 눈만 높아져선 두어 걸음 안에 횡단할 수 있는 방이 작고 답답하게만 보였다.

강 여사가 입원하는 동안 연서는 다시금 이곳에서 먹고 자고 해야 했다. 태헌이 준 오피스텔은 받지 않았다. 편의를 위해서라지만 그녀에겐 사치였다. 도에 넘치는 선물은 그녀를 초라하게 했다.

원래대로 돌아온 것뿐인데 패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모습을 혹시 태헌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몇 평짜리 고시원이 연서의 현실이었고, 태헌 쪽이 환상이었다. 그러니 태헌의 매정함에 실망하는 건 욕심이었다. 그의 애정을 바라는 건 배부른 소리였다.

“빨래부터 해야겠어.”

한숨을 흩은 연서는 청소부터 시작했다.

*

저녁으로 김밥을 한 줄 먹을까, 연서는 고시원 창밖을 보며 고민했다. 입맛은 없었지만, 며칠간 중환자실과 고시원을 오가며 끼니를 제때 챙기지 않아서 살이 좀 빠졌다.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송현이 지나가는 말로 밥 좀 잘 먹어야겠다고 할 정도로 연서는 꽤 수척해져 있었다.

그런 말보단 중환자실에 한 번 들어가게 해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세원 그룹 일가와 그들의 비서진들이 병원 복도를 점령할 때면 연서는 복도 끝으로 밀려났다. 세원 그룹 사람들은 시간과 날짜를 정해 찾아오는 듯했다. 하루에 두 명 두 타임, 모두 다른 사람들이 왔다.

우 상무를 마주친 날도 있었다. 다행히 승빈을 보진 못했다. 어쨌든 항상 연서는 공기처럼 존재했다. 면회 명단에 연서의 자리는 없었다.

태헌이 돌아오면 졸라볼까. 강 여사가 그리워 속이 곪아갔다.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 연서는 고시원 창가에서 몸을 떼어냈다. 발신일을 확인하곤 미소를 지었다.

“스케줄 끝났어?”

-응. 조금 전에. 뭐 하냐. 집?

“응.”

-밥이나 먹게 나와라. 지금 앞이야.

“현호 너 지금 고시원 앞이야?”

연서는 놀라면서도 화색을 띠었다.

-어. 빨리 나와라.

서둘러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을까 하다가 요 앞 삼겹살집에나 가자고 할 생각으로 모자만 대충 눌러썼다.

고시원 입구로 뛰어나가니, 골목 쪽에서 기다리는 현호가 보였다. 그의 손끝에서 연기를 피우던 담배꽁초가 재떨이 속으로 툭 던져졌다.

“진짜 빨리 왔네. 뛰어왔냐?”

“응. 너무 배고팠거든. 삼겹살 어때?”

“좋지. 근데 너도 그 모자 썼네?”

“얼굴이 엉망이라서.”

연서가 옅게 웃으며 언젠가 현호가 패션쇼 기념품으로 받아온 모자챙을 툭 쳤다. 현호도 쓰고 나올 줄은 몰랐지만 검은색이라 그다지 튀지는 않았다.

현호의 잘 정돈된 눈썹이 실룩였다.

“벗어라. 좋은 말 할 때.”

“왜?”

“둘이 이러고 있으면 커플인 줄 알아.”

소름 돋는 소리에 연서가 모자를 벗었다. 그러곤 현호의 머리 위에 하나 더 씌워주었다. 그러자 현호가 농담이라며 연서의 머리에 다시 모자를 얹었다.

“됐거든?”

연서가 모자로 현호의 등을 쳤고,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연서는 이런 순간에도 자꾸 떠오르는 남자를 잊으려 애쓰며 밝게 웃었다.

이만하면 행복한 거라고 주문을 외우자 정말 다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삼겹살집으로 향해 고기를 구웠다. 식사는 핑계가 되었다.

연서는 연거푸 소주잔을 기울여 두 병을 동냈다.

“한연서, 일어나 봐라. 나 고시원에 못 들어가. 거기 여성 전용이잖아. 너 못 들여보낸다니까?”

“현호얌.”

테이블에 한쪽 팔을 베고 누워 아까부터 현호얌을 반복하는 진상이 예쁠 리 없었다.

“죽는다, 진짜.”

“현호얌, 너는 왜 현호얌?”

“이게 정말 단단히 미쳤네.”

현호가 혀를 차며 애꿎은 냉수만 들이켰다. 차를 가지고 와서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니 속만 뒤집히고 있다.

현호가 밝아지는 연서의 액정을 발견했다.

“한연서 너 전화 온다. 이사님? 이사님이라는데?”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던 연서가 빛과 같은 속도로 핸드폰을 낚아챘다. 흠흠. 목을 가다듬는 연서를 혀를 차는 현호얌을 무시하고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욤?”

“허.”

친구의 미친 짓에 현호가 실소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연서는 핸드폰 너머의 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가 왜 그래.

“네. 쪼끔 마셨거든욤.”

-한연서.

“네에.”

-오피스텔 키는 얻다 두고 밖에서 유랑 생활일까. 아직도 반항기야?

오피스텔로 가지 않은 연서를 향한 타박이었다. 하지만 큰 빚까지 진 마당에 거처까지 그에게 위탁하고 싶지 않았다.

염치가 없었고 실은 태헌이, 조금 미워서.

방치당하는 게 서러워서…….

“거긴 너무 넓어요. 혼자 지내기 썰렁하구…….”

-지금 오피스텔로 와.

“지금?”

-말이 짧아졌네. 데리러 가야 하나?

“이사님, 혹시 한국이…. 끅, 세요?”

딸꾹질을 한 연서가 눈을 크게 키웠다.

-술주정하는 인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친구랑 있어요. 지금 바로는 못 가요…….”

-오피스텔로 와.

전화가 제멋대로 끊겼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연서가 찬물을 한 컵 들이켰다.

“현호얌.”

“뭐야, 뭐라는데? 눈을 반짝반짝하고 난리야? 징그럽게?”

“지금 오라고 하시는데에…….”

“이사님이면 전에 그 사람이지? 그날 그…….”

현호가 돌연 뒷말을 삼켰다. 문식이 죽은 날 만났던 사람이라고 물으려니 입 안이 떫어진 터다.

“현호얌, 나 많이 후줄근해 보여?”

“아니. 미친것처럼 보여.”

현호가 빙그레 웃자 연서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미안한데, 가 봐야 할 것 같아. 차 좀 태워줘.”

연서가 눈동자를 흔들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 변화를 감지한 현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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