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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1화 (41/85)
  • 41화

    *

    핸드폰을 꼭 쥐고서 연서가 입을 열었다.

    “시내에 잠깐 나왔어요.”

    -뭐 하러.

    “빵을 사러 나왔어요. 단팥빵이랑 소보로 크림빵, 그리고 앙금이 가득 든 건데 되게 맛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오기 전에 선유 화학에서 사람이 찾아왔어요. 이창원 씨와 김영웅 씨라고 한 것 같아요. 저는 나오는 바람에 무슨 얘길 하는지까지는….”

    -그런 보고 말고.

    연서는 자기도 모르게 주절대던 말이 어떤 건지 뒤늦게 깨닫고 나름 충격을 받았다. 우 상무에게 하던 대로 강 여사의 신변을 줄줄 읊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녀는 지금, 엉망이었다. 온통 태헌으로 가득 차 버렸다. 그나 이건 핑계가 되지 않는단 걸 안다. 그래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죄송해요.”

    -잠깐 서울로 와.

    “서울은 왜요?”

    -내 방에 들어가면 오른쪽 두 번째 서랍, 거기에 든 서류. 중요한 거야. 회사로 3시까지 올 수 있겠지?

    “비서로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명목이 중요한 일인가?

    그 시간이면 강 여사가 낮잠 들 시간이었지만, 여사를 두고 나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꼭 제가 가야 하나 해서요.”

    -그럼 누가 올까. 할머님? 다른 간병인? 아니면 가드?

    잠깐 용인 집에서 뒹굴거리는 시은이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서류를 잊어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시간 맞춰 갈게요.”

    -늦지 마.

    전화가 끊겼다. 연서는 입술을 씹다가 핸드폰을 내려놨다. 짜증 나는데 태헌을 얼른 보고 싶기도 했다.

    *

    회사를 찾은 건 두 번째였으나 적응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연서는 전보다 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은 로비에서 미아처럼 서성였다.

    스피드게이트를 아득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연서를 불렀다.

    “한연서 씨 맞으시죠?”

    “네.”

    “이리 오십시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기, 그냥 이사님께 이것만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연서가 서류 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오시죠.”

    연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임직원 전용이 아닌 일반 엘리베이터를 탄 터라 내부가 꽤 북적였다.

    그녀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헌의 비서라는 어울리지 않는 직책을 생각하면 이 불편함에 익숙해져야 했다.

    감정을 빼고 보면 태헌은 그녀의 은인이었다. 큰 빚을 탕감해준, 기적을 선사한 은인.

    그런 큰 빚을 탕감해줄 만큼 제 몸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잠시 번쩍하고 말 호기심일 터다. 가난하고 불쌍한 여자가 신기했겠지. 동정했을 거고.

    태헌은 그저 넘쳐나는 돈을 어쩌지 못하고 기부하듯 도왔을 거다.

    언젠가 그에게 진 빚을 갚을 수는 있을까.

    태헌이 제시한 6개월간의 연애로 거대한 부채를 삭감할 순 없었다. 시간이 걸려도 조금씩 갚는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마저 태헌이 주는 월급으로 때워야 하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내리시죠.”

    남자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태헌을 받아들인 증거가 느껴질 때마다 열병에 오른 것처럼 숨이 더웠다.

    염치없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못난 사랑을 하려고 움트는 바보 같은 싹이 그녀의 심장 한쪽에 자리했다.

    어느샌가 이사 사무실 앞이었다. 문을 두드린 뒤 남자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단단한 보안이 해제되고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 안을 향해 연서가 발을 들였다. 태헌의 성에 초대받은 가난한 평민처럼 조심스러운 방문이었다.

    연서는 책상을 등지고 창을 바라보며 통화 중인 태헌의 뒤로 섰다. 자신이 들어온단 소리에 문을 열어 주었으면서 이쪽은 쳐다보지 않고 대화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주머니 한쪽에 손을 찔러 넣은 그는 창에 투과된 도심의 일부를 제 것처럼 내려다보았다.

    태헌의 등은 그의 세상처럼 넓었고 그의 시선은 닿을 수 없는 곳처럼 멀었다. 연서는 서류를 쥐고 그의 전화가 끝나길 가만히 기다렸다.

    “처음엔 엿 좀 먹일 생각이었습니다. 저 들어오면 큰아버지가 혼처부터 들이밀 거, 아버지도 아셨잖습니까.”

    아버지라면 우이혁, 세원 홀딩스 부사장을 말하는 거겠지.

    이혁은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강 여사가 병중에 있어 자주 마주칠 법한데, 이혁은 번번이 연서가 자리를 비울 때 용인 집을 방문해서 어긋나기 일쑤였다.

    “우 상무가 첩자로 한연서를 심어 뒀더군요. 그래서 제 결혼으로 장사 못 하게 한연서 만난 겁니다. 내 여자 됐으니 수작 부릴 생각 마시라, 뜻 전했고.”

    연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장사를 못 하게 만났다니?

    “우 상무가 준비하고 있던 약혼녀 후보는 폐기하겠죠. 노리던 유산도 물 건너갔고. 문제 있습니까?”

    연서의 뺨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어머니는 설득해야죠. 아시잖아요. 저 약혼이든, 결혼이든 생각 없습니다.”

    머릿속에서 딱딱한 얼음 알갱이가 굴러가는 것만 같다.

    “한연서는 그냥 잠깐입니다. 길어진다 해도 결혼은 불가한 영역이고, 처음부터 우 상무가 내미는 약혼녀들 물리치려고 그 여잘 들인 건데 얼마나 길게 가겠습니까.”

    약혼녀들을 물리치려고 들였다는 여자는, 바로 연서였다. 그 후로도 연서를 부정하는 말이 거리낌 없이 흘러나왔다.

    “선이라면, 몇 번 정돈 맞춰드리죠. 그게 어머니 소원이라면.”

    연서는 떨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건 너무 잔인했다.

    태헌과 결혼하겠단 기대감은 단 한 번도 품은 적 없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부정당한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태헌에게 이용당했단 사실도 아팠지만 잠깐이라며, 길게 가지 않을 것이라 아버지에게 설명하는 그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정을 나눴다고 해서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거다. 혼자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의 손길이, 입술이 뜨거웠다고 해서 그 마음이 같은 온도는 아니었던 건데.

    “끊죠.”

    전화를 끊은 태헌이 뒤돌았다. 연서를 보고도 거기 있을 줄 알았다는 듯 팔을 뻗어 서류를 받았다.

    “앉지, 그래.”

    “아버지랑 통화하신 거예요?”

    연서의 음성과 속눈썹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그처럼 담담하고 싶은데, 이 관계에 아무런 채무도 없는 것처럼 따져 묻고 싶은데.

    연서는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두 다리가 꺾일 것만 같았다.

    “우 상무 일로 통화했는데, 왜.”

    정말 순전히 왜 그런 게 궁금하냔 눈빛으로 묻는 남자가 새삼 두려워졌다.

    맞아, 그는 이런 사람이었지. 마음보다 이성을, 감정보다 목적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연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끙끙대고 싶지 않았다.

    “이사님이 저랑 만나려던 게, 우 상무님이 준비한 약혼녀 후보 거절하려고…… 그런 거였어요? 언젠 몸 때문이라면서요.”

    “처음엔 그런 이유가 맞아. 우 상무 첩자인 한연서가 내 여자가 됐다고 하면, 충격깨나 받을 테니까.”

    “…진짜 너무하신 거 알아요?”

    “그게 중요할까. 결국 네가 여기에 남았는데.”

    “하…….”

    헛숨이 흘렀다. 성욕 때문이라고 했으면서. 몸에 끌리는 거라고 했으면서.

    하지만 그의 말대로 동기가 어떻든 지금 태헌의 곁에 있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는 게 더 화가 났다.

    숨을 고른 연서가 가까스로 웃으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말씀하신 서류는 이거 맞나요?”

    태헌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더니 서류를 빼 들고 만년필을 가져온다.

    “식사는 했나?”

    허리를 약간 숙여 사인을 남기는 그의 금빛 커프스가 펜촉의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점심 했는지 묻잖아. 왜 여러 번 입 열게 하는 걸까.”

    “네.”

    “뭐 먹었어.”

    “초콜릿.”

    “그딴 게 식사가 되는 줄은 몰랐네. 그러니 말랐지.”

    태헌이 허리를 펴자 그 짙은 눈동자가 한층 높아졌다. 그를 향해 연서의 고개가 젖혀졌다.

    “이사님이 안 부르셨으면 점심밥 푸짐하게 잘 먹었겠죠.”

    울분이 가시질 않아 감정 담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실컷 못된 태도로 상처 줘 놓고 밥걱정을 하는 태헌이 미웠다.

    “내가 책임지면 되나? 도시락 괜찮아?”

    “도시락이요?”

    “나도 식사를 안 해서, 저쪽으로 앉아.”

    태헌이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제야 그 위에 포장된 그릇이 여러 개가 보였다. 하지만 지금 기분으로 그와 마주 앉아 밥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저 얄미운 뺨을 쳐올리듯 깨물어버리든, 못돼먹은 놈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저 일찍 들어가야 해요.”

    “한연서.”

    “네, 이사님.”

    “상사와 비서, 아니면 애인? 뭐로 할까. 어떻게 요구해야 얌전히 밥 먹을까.”

    어떤 관계든 연서는 을이었다. 그걸 알면서 굳이 고르라는 건, 어떻게든 연서와 식사하겠단 소리였다. 하지만 이 기분으로 음식을 먹어봤자 체할 게 분명했다.

    “30분이면 되겠죠?”

    “일식 어때. 냄새 없는 거로 간단히 주문했는데.”

    “네. 좋아요.”

    사실 제대로 된 일식은 먹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연서는 좋다고 대답했다. 태헌이 손을 씻고 오기에 연서도 가벽 뒤로 향해 세면대에 손을 씻고 왔다. 그는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의례적인 거야.”

    “네?”

    “선보는 것 때문에 뿔 난 애처럼 굴 것 없단 소리야.”

    “네. 신경 써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의미 없는 일에 힘쓰지 말고 식사해.”

    연서가 얼른 제 뺨을 매만졌다. 방금 씻어 차가운 손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대조되는 온도 차를 보였다.

    별 의미 없는 일이라고 태헌의 입으로 말했다. 그에겐 이게 최선이겠지.

    태헌 같은 사람에게 맞선과 결혼이 얼마나 큰일인지 대강은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조차 싫다고 떼쓸 수가 없었다. 시한부 애인이 싫다고 권리를 주장해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앉아.”

    그의 무심한 설명이 사실은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으나 연서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의례적인 거구나, 하고.

    연서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태헌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섰다. 태헌은 그런 연서의 이상 행동을 참으로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연서가 입술을 씹다가 말문을 열었다. 태헌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걸 확인받아야 이 술렁이는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그의 옷깃이라도 그러쥐고 싶었다.

    “지금…… 키스해 주세요.”

    그가 낮게 실소했다. 그러나 바로 연서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당기고 허리를 감싸 무너지는 작은 몸을 받아냈다.

    “다리 올리고 제대로 앉아야지. 혀 넣기 쉽게.”

    그의 혀가 귓속을 헤집는 것처럼 끈적한 음성이 연서의 청각을 교란했다. 연서가 다리를 올려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단단한 몸을 마주 보고 앉자 그와 보낸 밤이 떠올랐다.

    그의 손가락이 연서의 뺨에 닿았다. 턱을 틀어 다가오는 그에겐 어떤 고민도 없었다.

    “이상하지. 볼 때마다 아래가 당겨.”

    “상스러워요.”

    “이름 불러 봐.”

    “우태헌 씨…?”

    흔들리는 연서의 동공에 태헌이 담겼다. 태헌이 가만히 그녀의 입술만 노려보았다. 충분한 답이 아니었을까. 연서는 조금 더 용기 냈다.

    “태헌… 씨, 키스하고 싶어요.”

    그런데도 답이 없었다. 빤한 시선이 민망해진 연서가 먼저 입술을 겹쳤다.

    닿기 무섭게 태헌이 부드럽게 밀려 들어와 연서의 숨을 앗아갔다. 분탕한 전율이 음란하게 섞여들자 물속에 잠긴 것만 같았다. 이대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감각.

    한참 뒤 연서의 입술에서 물러난 그가 목덜미에 콧대를 묻었다.

    “아래가 동하는 건 너뿐이니까 어디 가서 붙어먹을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그것참 고맙네요.

    연서는 허탈하게 웃은 뒤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거라도 위안 삼을 만큼 태헌이 절실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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