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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0화 (40/85)
  • 40화

    *

    용인 집이 보일 때쯤 태헌은 전화를 걸었다. 강 여사가 잠들었을 시간이니 연서도 한숨 돌리고 있을 터다.

    통화음이 꽤 흘러간 뒤에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뛰었는지 숨결 끝이 흐트러져 있다. 태헌은 턱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잠깐 밖으로 나와.”

    -지금이요?

    “그래. 앞이야.”

    태헌은 전화를 끊고 시트에 몸을 깊게 묻었다.

    지금 연서를 보면 입을 맞추고 몸을 겹치고 싶을 게 뻔했다. 그 짓에 안달만 짐승처럼 육욕에 몸이 달아오른 스스로가 이질적이고 난처했다.

    그러나 이제 연서를 손에 넣었으니 겁을 집어먹은 그녀를 살살 구슬려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것부터 해도 늦지 않았다.

    태헌이 제법 느슨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연서가 조수석 차창을 두드렸다. 태헌이 차창을 내리기도 전에 연서가 얼굴을 붙이고 안을 살피려고 애썼다.

    격 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려야 하는데, 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태헌이 차창을 내렸다.

    “타.”

    연서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왔다. 역시 뛰어왔는지 어깨가 들썩이고 있다.

    옅은 샴푸 냄새와 덜 마른 머리칼. 가로등에 비친 조금 붉어진 뺨까지. 혀뿌리 어딘가가 연이은 갈증으로 갈라지는 기분이다.

    “오늘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순진하게 태헌을 바라보는 연서의 눈동자에 속으로 탄식했다.

    누군가 한연서를 보내 제 속을 뒤집어 놓을 계획이 아니라면, 이 여자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욕심껏 욕정을 박아넣는다고 해소될 것 같지는 않은 불편한 감정이 돌멩이처럼 가슴에 들어찼다. 그렇다곤 하나 연서를 만지지 않고, 품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선생님은 한 시간 전부터 주무셔요. 오늘 밤엔 윤해 이모님이 자리 지키기로 했고요.”

    “그래.”

    “그래서 선생님께 그 일,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종알종알.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한다. 그 목소리가 때론 동요나 자장가처럼 때 묻지 않게 느껴졌다. 평온한 동산의 햇볕처럼 그녀는 삭막한 태헌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반짝였다.

    “안에는 안 들어가실 거예요? 설마 다시 서울 가세요?”

    연서가 아쉽다는 듯 물었다.

    태헌이 답 없이 빤히 주시하자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연서가 눈을 휘며 웃었다.

    “알았다. 저 보러 오신 거예요?”

    헛숨이 흘렀다.

    “자신만만하네.”

    “…애인이니까?”

    창피해서 코끝을 매만지면서도 연서는 할 말을 나름 잘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보고 가세요.”

    “까불지 말고 손 줘.”

    “이렇게요?”

    연서가 옅게 웃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라도 맞는 아이처럼 두 손을 고이 펴 보이는 행동이 맑기 그지없다.

    태헌이 그녀의 손 위로 카드 한 장을 올려두었다.

    “이게……. 뭐예요?”

    “필요할 때마다 주고받기 번거로우니까 가지고 있어.”

    연서가 의미를 모르겠단 표정으로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개인적으로 베푸는 건 싫다 이건가.

    “비서로 일하기로 했으니 하나쯤은 있어야지.”

    “아, 그런 거면 잘 가지고 있을게요. 그리고 아까 우 상무님이 전화 온 거 있죠.”

    연서는 의외로 말이 많았다. 호텔에서 깨달은 사실인데 말투에 애교도 있었다.

    그 점이 왜 흥분할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연서의 목소리가 귀엽다고 느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태헌이 공연한 간지러움에 손가락으로 핸들을 감았다.

    “그동안 미안했다고 다신 그런 일로 연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랬어요. 혹시 이사님이 사과하라고 하신 거예요? 맞죠?”

    “영 눈치가 없진 않네.”

    “감사합니다. 이사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핸들을 잡은 태헌의 손가락에 점차 힘이 실렸다.

    “이사님도 유산에 관심 있는 거 맞죠?”

    무슨 소리일까, 이건.

    “선생님이 말씀해주셔서 알아요. 우승빈 부장님도 그렇고 저한테 관심 가지시는 게…. 유산 때문인 거.”

    “우승빈 부장님은 그러시든 말든 이제 상관없고, 거기에 왜 내가 포함이지?”

    “이사님도……. 아니에요?”

    “잘 나가다가 헛소리를 하고.”

    태헌은 오랜만에 머리가 끓어올랐다. 유산? 푼돈에 열을 올릴 만큼 저급해 보였나.

    아니 그런 것보다 연서는 여태 태헌의 말을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동안 제 것이라 되라, 연서에게 부지런히 입을 놀린 게 고작 유산 때문으로 비쳤다니.

    여기까지 생각하자, 준비하던 배려가 부질없다 느꼈다. 하도 겁을 먹길래 힘을 빼보려 했는데, 연서는 생각지 못한 식으로 태헌을 부채질했다.

    역시 그녀는 태헌에게 곤란한 존재였다.

    “한연서.”

    낮게 깔리는 태헌의 음성에 연서가 흠칫 놀랐다. 이런 건 눈치 빠르면서 다른 건 둔해서 태헌의 심기를 긁어 댔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께 제 잘못을 사실대로 말하면, 이사님이 유산을 못 받으실지도 모르니까 미리 말씀을…….”

    “그러니까 내가, 돈 몇 푼 때문에 너와 이 짓거리를 하고 있단 거야?”

    “…아닌가요?”

    하, 태헌이 한숨 끝에 짧게 욕했다.

    “사람을 참 저렴하게 만들어.”

    “그게 아니라면…….”

    연서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굽었다. 표정이 전부 얼굴에 드러나는 여자.

    문득 저 얼굴이 어디까지 무너져내릴지 궁금해졌다.

    우승빈 따위에게 망가졌던 연서를 생각하자, 그보다 더한 고통을 새겨주고 싶기도 했다. 비뚤어진 마음이란 걸 알면서도 연서를 어떻게 쥘지 방도를 몰라 태헌은 헤매고 있었다.

    느슨하게 대하면 그녀가 사라질 것 같고 꽉 쥐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럼, 너와 결혼이라도 해서 할머님이 주신 거 악착같이 받아낼까?”

    “…결혼이요?”

    연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혼이란 말이 그렇게 놀랄 일이었나. 태헌이 마른 제 입술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럼 고작 연애 좀 하는 거로 유산이 떨어질 줄 알았어?”

    “물론 저도 이상하다곤 생각해요. 제가 뭐라고. 저와 만난다고 선생님께 유산을 더 받게 되나요……. 이상하죠.”

    연서의 목소리가 울 것처럼 젖어 있었다. 태헌은 그에 묘한 쾌감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내가 너한테 동한다고. 그거로 설명이 됐을 거라고 여겼는데. 너도 섹스하면서 느꼈을 거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게 네 몸인 거.”

    “느끼긴 했지만…….”

    첩첩산중이다. 머리는 나쁘지 않은데 사람을 뒤집어 놓는 데 일가견이 있다. 이 정도면 태헌만 노리는 스나이퍼였다.

    핸들을 움켜쥐었던 태헌의 손가락이 느슨해졌다. 그리고 툭툭, 핸들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사님이 먼저 화대니 뭐니, 그러셨으니까. 그래서 당연히 저한테 원하는 게 더 있을 거라고 생각…… 했어요.”

    “그 단어는 금지한 거 아니었나?”

    속을 뒤집으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지금 나와선 안 되는 단어였다. 태헌도 뱉어놓고 찜찜했던 말이었다. 연이어 연서가 속을 긁는 탓에 정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땐 실수였다고, 정말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연서의 얼굴이 너무나 태연했다.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당연하단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애인이란 이름으로 묶었음에도 좁혀지지 않는 간격에 머리가 뜨거워지는 이상 현상도 껄끄러웠다.

    유산으로 이용당할 순 있으면서 결혼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고.

    태헌이 주는 건 화대이고, 결국 스폰 관계라 규정짓고 있고.

    연서의 생각을 이해고 뭐고, 머리에 열이 올랐다. 연서가 이 관계를 저렴하게 만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헌이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유산 때문이 아닌 거면……. 저는 좋아요.”

    좋다니.

    “제 몸이 마음에 드셨다는 뜻이잖아요.”

    꼬박꼬박 자존심을 챙겨가는 한연서.

    태헌은 쉽사리 떨칠 수 없는 진득한 무언가를 몸에 붙인 것만 같았다. 미미한 짜증을 이길 만큼 그 무언가가 달콤해서, 미칠 노릇이라면.

    태헌이 시트를 뒤로 밀며 턱을 비틀었다.

    “좋을 짓을 해야지, 그럼.”

    멈추었던 장맛비가 세차게 내려치기 시작했다.

    보닛에 튀어 오른 빗방울로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연서를 붙들어두고 쉴 새 없이 몰아세웠다.

    *

    오랜만에 날이 갰다. 연서는 용인 시내의 오래된 빵집에 들렀다. 통 입맛을 찾지 못한 강 여사가 꼭 이 집의 단팥빵을 먹고 싶다고 했다.

    강 여사의 곁에 있고 싶지만, 윤해를 심부름시킬 순 없어 연서가 직접 나왔다.

    아직 강 여사에겐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다. 연일 찾아오는 손님들과 딱 붙어 떨어지지 않은 윤해가 핑계라면 핑곗거리였다.

    “5만9천 원입니다.”

    “저 이것도 계산해주세요.”

    연서가 카드를 내민 후 급히 카운터 근처에 꽂힌 곰돌이 모양 초콜릿을 내밀었다. 카드와 빵이 담긴 종이봉투를 내미는 직원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자동문 밖으로 향했다.

    빼꼼 내민 해가 눈꺼풀을 간지럽게 뒤덮었다.

    오늘은 경호팀에서 사용하는 차 한 대를 끌고 나왔다. 한사코 사양했는데, 강 여사가 먼 길 고생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차 키를 내어주었다.

    그래서 더 긴장되는 외출이었다. 차에 오른 연서는 핸드폰을 찾았다.

    [우태헌 이사님.]

    통화 목록에서 찾은 그의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날, 그러니까. 차에서 그와 몸을 섞은 날.

    연서는 행위 후 엉망이 된 옷을 쥐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태헌이 그녀의 위로 재킷을 덮은 뒤 안아 올린 건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혹시 누가 볼까 봐 한껏 긴장한 채 내려달라 했으나 태헌이 연서의 청을 고이 들어줄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 안겨 2층 태헌의 방으로 그리고 그의 방에 딸린 욕실로 옮겨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었고 놀라 달아나려는 연서를 욕조에 처박듯 끌어앉혔다.

    두 번째로 그와 같이 샤워를 했다. 먼저 샤워 부스로 들어간 그를 차마 보지 못하고 욕조 안에서 조금씩 차오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날 샐 거냐는 딱딱한 질문에 그제야 끌어안고 있는 무릎을 폈다. 그리고 태헌이 먼저 욕실 밖으로 나갔다.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달아오른 마음을 숨겼던 날, 연서는 그가 유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성적인 욕심 때문에 제게 접근했단 사실에 기뻤다.

    속도 좋지.

    강 여사의 건강에 온 신경을 쏟아도 부족한데, 자꾸만 태헌 생각이다. 연서는 상념을 지우고 통화를 연결했다.

    -그래, 말해.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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