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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39화 (39/85)
  • 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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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이 결여된 태헌을 채워준 이가 바로 강 여사란 말이다. 부모조차 포기한 태헌을 강 여사만이 끝까지 믿어주었다.

    「우리 태헌이가 말을 그렇게 해도 속이 깊은 아이다, 내가 잘 안다.」

    「책임감이 강해서 그런 게야. 너희보다 훨씬 낫다. 편협한 기준을 세워두곤, 그에 어긋난다고 매몰차게 다그치는 게 어른인 게야?」

    태헌은 수도 없이 강 여사에게 구원받았고 그 사실을 외면할 만큼 경우 없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인정을 나누는 이가 강 여사니만큼 우 상무의 비열한 짓거리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언젠간 치워버리려 했는데 소란이 생긴 김에 지금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긴말 안 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할머님 유산에 관심 끄세요.”

    “설마 내가 어머니 유산을 탐이라도 낸다는 거야?”

    “아버지가 아십니다. 그냥 두실 분이 아닌 거 알잖습니까. 적당한 때를 보고 있을 겁니다.”

    “태헌아, 오해다. 전부 오해야. 내가 왜 어머니 유산을 탐내겠니. 뭐가 부족해서?”

    잡아떼는 게 삼류 배우처럼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 장단에 맞춰주는 건 태헌의 할 일이 아니었다.

    “한연서 씨와 저 만납니다.”

    “뭐?”

    “결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 상무의 입꼬리가 그대로 굳었다.

    “내 여자를 사람들 앞에 세워두곤 우승빈 부장의 약혼자라고. 그렇게 떠드셨죠.”

    태헌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와 눈을 정확하게 맞췄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연서 그 아이, 승빈이 짝이다.”

    “우승빈이 그랬겠죠. 연서랑 어울리면 뭐가 좀 굴러들어올 것 같다, 그러니 아버지가 협조 좀 해달라.”

    “태헌아.”

    “뻔하죠. 아닙니까?”

    “한연서 그 애가 그렇게 영악할 줄이야!”

    쾅. 테이블을 그가 내려쳤다.

    아, 연서에게 뒤집어씌우겠다?

    강 여사가 만나는 사람의 명단을 조사하고, 그들이 하는 사업 몇 개를 몰락시킨 장본인, 우 상무는 언제나처럼 뻔뻔했다.

    연서를 이용한 점에 대해선 잡아떼면 그만이라 이건가. 태헌이 조소했다.

    “그 여자가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한 거야. 태헌아, 모르겠어?”

    “더 해보세요.”

    태헌이 팔짱을 꼈다.

    “여자 하나 때문에 네 형을 그렇게까지 만든 너도 마찬가지야. 정상이 아니야!”

    우 부장의 핏발 선 흰자위에 노골적인 원망이 어렸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제 아들의 등신짓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도착증이야. 태헌아, 너 그거 정신병이야.”

    우씨 집안 사람이 태헌을 대하는 방식은 이렇듯 인색했다.

    실패하지 않는 태헌에겐 인간미가 없다고 말했고, 깔끔한 일 처리엔 무자비하다 평했으며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온정이 없다고 수군거렸다.

    비열한 패배자들은 날 때부터 성공적인 유전자를 타고난 태헌을 질투하고 깎아내리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정작 태헌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었으니까.

    “제가 정신병이면 우 상무는 뭡니까. 범법자? 쓰레기? 양아치?”

    태헌의 비웃음에 대번 우 상무가 발끈했다.

    “뭐, 뭐?”

    “일 시끄럽게 키우지 맙시다. 피차 조용히 입 닥치고 넘어가는 게 평화로울 건데요.”

    태헌이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액정이 밝아졌다. 우 상무와 그 측근이 독대하는 자리를 촬영한 영상이었다.

    “기억나실 겁니다. 일주일 전, 김 전무와 나눈 이야기.”

    DH 전자의 김 전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핸드폰에서 울리자 우 상무의 낯빛이 변했다.

    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영상이 큰 소리로 재생되는 광경에 우 상무가 벌게진 얼굴을 쓸어내리려 안경을 벗었다.

    떨리는 손으로 술을 단번에 털어 넣은 우 상무는 탈출로를 잃은 쥐새끼처럼 동요하고 있었다.

    “이, 이걸 어디서…….”

    태헌은 귀국하자마자 우 상무의 신변을 조사했다. 강 여사의 건강검진 결과를 조작하면서까지 우 상무가 얻고자 하는 유산은 사실 그리 비중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생 동생에게 밀려 낙동강 오리알 신세인 우 상무라면 남은 것이라도 쓸어 담으려 혈안이 될 법도 했다.

    우 상무가 노리는 것 중엔 라온 기획의 지분율도 있었다. 우 상무는 강 여사가 최대 주주인 DH 광고와 라온 기획의 합병을 추진 중이었다.

    강 여사가 죽으면 자연스레 지분 승계가 이뤄질 테고 그에 맞춰 합병할 계획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 상무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태헌이 그를 포착했고, 우 상무를 흔들어놓을 미끼로 사용하기 위해 영상을 떠 왔다.

    “분식 회계를 하셨네요. 콜옵션 공시 누락하신 건 검찰 쪽에 자료 넘길 정도고.”

    “……뭐?”

    “주가 조작을 하셨잖습니까.”

    태헌이 미끈하게 웃자, 우 상무가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나만 무너지겠어?”

    우 상무가 해보려면 어디 해보라는 듯 나왔다. 예상했다는 듯 태헌이 다음 영상을 눌렀다.

    -으흑! 살, 살려줘.

    익숙한 목소리에 영상을 바라본 우 상무가 벌떡 일어났다. 쨍그랑. 식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사, 살려줘. 내가 이렇게 빌게.

    어눌한 발음으로 울고 있는 건 우승빈이었다. 그가 거의 발가벗은 채 태헌에게 빌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폭력을 멈춰 달라고 애원하는 승빈의 낯엔, 연서를 겁탈하려던 난폭한 본심은 엿보이지 않았다. 악을 전부 뽑아 먹힌 것처럼 승빈은 힘 빠진 모습이었다.

    -여기 보여?

    태헌이 핸드폰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승빈이 입술이 부르튼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여기에 말해. 네가 뭘 했는지.

    -내가 그랬어. 맞아. 내가 연서 억지로 입 맞추고 가, 강간하려고 약을 타서 재웠어. 미안, 미안하다. 미안해.

    영상은 승빈의 흐느낌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우 상무의 손등에 퍼런 핏줄이 돋아났다.

    “너, 이게……!”

    이편이 더 우 상무에겐 타격이 클 거다. 비리 없는 기업인을 찾는 게 더 어려운 바닥이다. 들키느냐, 들키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하나 이런 사생활 스캔들은 꽤 골치 아팠다. 우 상무의 아들이 이런 강력범죄를 저질렀단 게 알려지면 민심은 물론 법의 재판까지 갈 테고.

    태헌이 입만 벙끗하면 길고 긴 공방전이 될 수 있었다. 연서가 태헌의 애인이란 것만으로 대응할 가치는 충분했다.

    흥분한 우 상무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러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 상무가 가스를 잔뜩 마신 사람처럼 질식당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원하는 게 뭐야?”

    “조만간 우 부장을 동남아로 내보낼 겁니다. 다신 한국 땅 밟지 못하게 하세요.”

    “……그거면 돼?”

    “서로 조용하게 해결하자고,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불쌍한 할머님 유산 눈독 들이는 건 DH까지 합시다.”

    “뭐? 그럼…….”

    “남의 집 반찬 개수 헤아릴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저.”

    태헌이 합병까지 눈감아주겠단 뜻을 내비쳤다. 한 수 접어주는 게 아닌, 강력한 경고였다.

    우 상무와 부딪힐 건 비단 이번 일뿐이 아니었다. 태헌이 한국에 알박기를 시작한 이상, 우 상무와 얼마든지 충돌을 빚을 수 있었다.

    다만 우 상무에겐 이혁을 빼닮은 일 처리 능력을 지닌 태헌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앞으로의 사업에 불이익이 있겠냐?”

    “용서를 구해야 하는 마당에, 알뜰하게 챙겨가시려고 하네요.”

    우 상무가 몸담은 라온 기획은 세원 그룹의 자회사였다. 그리고 세원 자동차는 신차 출시를 앞둔 상태였다. 라온 기획이 그 광고를 도맡는 건 당연했다.

    그룹의 중대한 수입원인 만큼 우 상무는 자신의 라인으로 꾸린 팀으로 기획을 맡을 생각이겠지.

    하지만 광고판에서 갑은 광고주인 태헌이었다.

    라온 기획은 사내 알력 싸움이 쟁쟁한 곳이었다. 태헌이 일일이 훼방 놓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 않을 뿐이지,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제가 막아 보죠.”

    “저, 정말이냐?”

    “대신 계획하던 제 결혼 후보들도 치워주시고.”

    우 상무는 제 사람으로 태헌의 옆자리를 채우려 준비 중이었을 터다. 그중엔 정말 괜찮은 여식도 있겠지.

    하지만 태헌은 결혼에 큰 뜻이 없었다.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고 괜히 정치적인 파벌에 발 담가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었다.

    우 상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말이 없는 우 상무의 태도는 충분한 답이 되었다.

    슈트 재킷 단추를 여민 태헌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한연서 씨 이용한 대가도 치르셔야겠습니다.”

    기가 다 빠져버린 늙은 너구리의 얼굴을 보며 태헌이 말했다.

    “만나는 건 그렇고, 전화로 사과하시죠.”

    태헌은 그 말을 끝으로 식당을 벗어났다.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던 신 비서가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용인으로 들어가십니까?”

    “혼자 가겠습니다. 신 비서도 퇴근하죠.”

    태헌이 대신 차 키를 받아들며, 직접 운전하겠단 뜻을 내비쳤다.

    운전기사와 신 비서가 다소 민망하게 뒤로 물러났다. 상사의 안위가 걱정이긴 하나 그의 말에 토를 달 수 없는 터다.

    태헌은 룸미러를 살핀 뒤 매끄럽게 차를 몰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되자 머리가 되레 묵직해졌다. 그의 상념을 가득 채운 건 역시 연서였다.

    그녀를 안으면 얼마라도 해소될 줄 알았는데, 이 또한 착각이었다. 아랫도리가 당기는 육체적 갈망뿐 아니라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목마름이 점점 더 몸집을 불려가는 기분이다.

    핸들을 잡은 태헌은 속도를 냈다.

    용인 집으로 향했으니 빨빨거리며 강 여사의 수발을 도맡고 있을 한연서.

    사실대로 얘기한다더니, 또 눈물 콧물을 뽑았으려나.

    가만히 보면 연서는 한시도 몸을 그냥 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랐나.

    한 줌이 되지 않는 허리가 어떻게 휘고 어떻게 꺾였는지. 그를 받아내느라 한계에 달한 연서가 허리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래서 어떤 식으로 태헌을 미치게 했는지, 선명한 영상이 사춘기 때보다 더욱 활발하게 재생되고 있다.

    그가 나지막하게 한숨 쉬었다. 사춘기 애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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