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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38화 (38/85)
  • 38화

    새로운 관문 앞에서 연서는 또 어설퍼졌다. 늘 능숙한 태헌 앞에선 작아지기 마련이었다. 연서가 몸을 옆으로 돌려 수건을 한 장을 꺼냈다.

    “안 나가실 거예요?”

    “씻을 건데.”

    그 옆에서 태헌이 셔츠를 벗었다. 단추를 풀어내는 긴 손가락이 어젯밤, 어떤 식으로 연서의 몸을 연주했는지 되살아났다.

    태헌은 상체는 섬세하게 짜인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일 거야.

    연서는 저도 모르게 그를 흘긋거리며 수건으로 앞을 어설프게 가렸다. 버클을 젖히다 말고 태헌이 연서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벽 끝까지 들러붙은 연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상황에 저항 없는 그에 반해 연서는 모든 것이 쑥스러웠다.

    “창피해서요…….”

    “이미 늦었다곤 생각 안 해? 이리 와. 같이 씻게.”

    “네?”

    과부하가 걸린 연서가 버벅대는 사이 태헌이 다가와 그녀가 꼭 쥐고 있던 수건을 앗아갔다.

    앗 하는 사이에 수건이 저 멀리 내던져졌다. 연서의 턱을 잡아 옆으로 돌린 태헌이 그녀의 목덜미부터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저 아래로 그의 눈동자가 닿았을 땐 연서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숨 막히는 탐색을 외면했다.

    “아프다며.”

    “몰라요.”

    “직접 확인할까?”

    직접, 확인…….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연서는 냉큼 솔직해지기로 했다.

    “아까보단 나아요.”

    “확실한 거지.”

    “네. 그리고 이사님, 그럴 거라곤 생각했지만 양심이 없으신 것 같아요.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그만하라고 하는데 끝까지…….”

    “많이 배려한 건데. 그동안 참은 거 풀려면 아직 멀었고.”

    “아직 멀었…? 진짜 짐승 같아.”

    울먹이며 말을 해놓고 아차 싶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늘 감정이 비었거나 화나 보이는 태헌이다. 지금이라고 그의 의중이 읽힐 리 만무했다.

    “화난 거 아니죠?”

    “눈치까지 보나?”

    그걸 말이라고. 입술을 벙긋대던 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치곤 잘 떠드는 것 같은데.”

    “할 말은 해야죠. 선생님이 그러는데 참기만 하면 병 걸릴 수 있대요. 제 상황에 병까지 걸리면 정말 너무한 거잖아요.”

    태헌이 한숨 비슷한 걸 흘렸다. 그러더니 연서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래, 너 다 하자. 이제 뒤 돌고.”

    순식간에 연서의 앞이 뒤바뀌었다. 욕실 타일을 두고 눈을 깜빡이던 연서가 태헌이 있는 뒤를 흘긋거렸다.

    뒤쪽을 훑어 내리는 그의 날 선 시선이 느껴졌다.

    “…뭐 하시는 거예요?”

    “여기도 엉망이야. 미친 새끼지.”

    뒤에도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았단 뜻 같았다.

    “미친 그것이……. 혹시 이사님을 말하는 거예요?”

    “눈치 본다면서 미친 새끼로 귀결하는 덴 거침 없고.”

    태헌이 어디 변명해보라 연서를 다그쳤다. 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연서가 택한 건 엄살이었다.

    “온몸이 아파요. 피부가 따끔따끔해요.”

    “이제 편하지, 아주?”

    연서의 뒤쪽에서 물소리가 났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어느샌가 온전히 탈의한 그가 샤워기 밑에 있었다.

    “이리 와.”

    태헌이 제 앞을 눈짓했다. 같이 씻는다는 게 태헌과 있으면 꽉 찰 게 분명한 샤워 부스 안에서 살을 부대낀다는 소리였을까.

    “저는 따로 씻으면…… 안 될까요?”

    “끌고 와?”

    고개를 저은 연서가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직 면역이 없어 조금 괴롭지만 이조차 달콤한 시간이란 건 안다.

    같이 씻자는 건 태헌 나름의 사과가 아닐까. 사람 몸을 이렇게 혹사시켰으니 그도 사람이라면 민망하긴 할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연서가 채 그에게로 닿기 전에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그녀를 쭉 끌고 갔다. 연서를 뒤돌게 한 뒤 태헌이 그녀의 머리칼 위로 물줄기를 조절했다.

    눈을 깜빡이던 연서는 두피에 닿는 손가락에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아프면 말해.”

    샴푸 거품이 부드럽게 두피에 비벼졌다. 태헌의 손길은 투박했으나 섬세하기도 했다. 귓바퀴를 스쳐 목 뒤까지 미끄러진 태헌의 손가락이 목 뒤를 지분댔다.

    연서가 움츠러들며 그의 팔을 잡으려 손을 허우적거렸다.

    “이, 이사님……!”

    “여기가 한 줌도 안 돼. 힘주면 부러지겠어.”

    “읏, 거기는…….”

    “피로 풀어주는 건데, 발정이 나면 어떻게 해줄까.”

    발정이라니. 목을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만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샴푸 거품이 질척하게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태헌은 그를 따라 척추를 하나하나 더듬어 덧그렸다.

    아찔해진 연서가 손을 뻗어 옆의 벽을 짚고서야 태헌의 짓궂은 괴롭힘이 마침표를 찍었다.

    머릿결 위로 샤워기 물이 흘러내리자, 연서의 번뇌도 차츰 씻기는 듯했다.

    연서가 세수하는 사이, 바디워시를 가득 묻힌 태헌의 손이 앞으로 파고들었다. 여린 언덕을 과감하게 문지르는 태헌의 손길은 처음부터 노골적이었다.

    “아, 이사님……!”

    연서가 허리를 숙이며 그의 손 위로 손을 덮었다. 다른 손이 다른 곳으로 파고들었다.

    “뒤로 기대.”

    샤워기 아래에서 조금 밀려난 연서는 조금 전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사과는 무슨, 태헌은 굶주린 사자처럼 연서를 먹어 치울 작정이었다.

    연서가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은 그의 팔을 긁어내리며 몸을 비틀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는 어제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열기에 잠식되어갔다.

    “아파, 아프다니까……!”

    태헌이 피식 웃으며 나른하게 대응했다.

    “정말?”

    “아니, 꼭 그런 건 아니……!”

    “건방지게 거짓말을 자꾸 할까.”

    “아니야…….”

    “좁아. 어떻게 들어갔는지 의문이네.”

    연서가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대고 헐떡였다. 하얀 벽 무늬가 점차 흐려졌다. 공들여 헤집는 태헌은 자비가 없었다. 연서가 쉴 틈을 주지 않고 서서히 스퍼트를 올렸다.

    “처음이지, 너. 그래서 이렇게 끊어먹을 것처럼 사람을, 환장하게……. 하.”

    “절대, 읏……! 아니에요.”

    연서는 강한 부정을 했다. 혹시 처음이라고 하면 우스워 보일까 봐 이를 악물고 거짓말했다. 실은 그에게 가진 밑천을 들킨 걸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려봤다.

    “거짓말 되게 못해.”

    태헌에게 비교되는 게 싫어 연서는 괜한 호기를 부렸다.

    “어, 엄청 많이 해봤어……. 읏!”

    연서가 말을 멈추고 길게 울었다. 좁은 공간을 헤집는 부피감이 늘어났다.

    “많이?”

    “네, 많이…….”

    후들거리는 연서의 허리를 낮추고 그가 천천히 몸을 겹쳐왔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수증기를 자욱하게 피워냈다.

    그 혼탁한 열기 속에 녹아들 듯 연서는 뜨겁게 파도치는 열기를 받아냈다. 태헌은 전의 잠자리보다 조금 더 가차없어졌다.

    “그런 거로 하고. 지금부터 여기 들어가는 건 나뿐이어야 할 거야.”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농밀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

    서울의 한 일식집이 태헌의 목적지였다. 식당으로 들어선 태헌이 눈을 슬쩍 굴리자, 대기 중이던 직원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러곤 태헌과 그 옆에선 신 비서를 안내했다. 긴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가며 태헌은 시계를 한 번 살폈다.

    9시. 오늘따라 하루가 길었다. 늘 정해진 시간에 맞춰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태헌이 그간 느끼지 못했던 감상이었다. 이토록 귀가를 바랐던 적이 없어 기분이 묘하다.

    한연서, 그 여자가 어디까지 자신을 흔들어놓을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오늘 낮, 태헌은 연서가 용인 집으로 돌아갔단 보고를 받은 후에 일을 몇 개 처리한 뒤 우 상무를 만나러 이곳으로 향했다. 아마 태헌을 기다리는 몇 시간이 우 상무에겐 목이 타고 좀이 쑤시는 시간이었을 거다.

    승빈이 피떡이 되어 병원에 실려 간 사실을 알게 된 우 상무는 주변의 입단속부터 했다. 병원 침대에 신세 질 만큼 엉망이 된 아들을 붙잡고 어떻게 된 사정인지 취조부터 했겠지.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 애원했던 승빈이 우 상무에게 어디까지 솔직해졌을까. 승빈은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상태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제 아비에게 구구절절 털어놨을 거다.

    어제 새벽 우 상무는 태헌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태헌은 직접 연락받지 않고 신 비서를 통해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우 상무를 물 먹이듯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늦게 나타났다.

    그가 경찰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거란 걱정은 안 했다. 우 상무는 켕기는 게 많은 사람인 동시에 살아남는 법을 아는 하이에나였다. 실리적으로 태헌을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을 터였다.

    그와 얼굴을 맞댈 생각에 미미한 피로감이 번졌다. 게다가 연서의 체온이 떠오르자 우 상무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더 아까워졌다.

    “이사님.”

    신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태헌을 불렀다. 노크해도 되겠냔 표현이었다.

    “들어가죠.”

    똑똑똑. 일률적인 소리가 흐르고 신 비서가 문을 열었다. 직원은 눈치껏 빠진 후였다.

    태헌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정 요리사가 직접 회를 떠주는 룸엔 우 상무 혼자였다.

    술과 간단한 찬이 그의 식탁 위에 단출하게 올라와 있었다. 태헌을 보고 조금 동공을 키운 우 상무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태헌아, 어서 와라.”

    태헌은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우 부장 상태는요.”

    덤덤한 질문이 우 상무의 눈가를 쪼그라들게 했다. 그가 쉰 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할머님께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 잠깐 견디는 게 힘듭니까.”

    “무슨 소리야?”

    모르는 척하는 가면이 역겨웠으나 태헌은 천천히 술잔을 채웠다. 가득 찬 술을 우 상무에게 내밀었다.

    강 여사는 태헌에게 핏줄이란 이유를 넘어 은인 같은 사람이었다.

    부모도 포기한 감정 없는 괴물, 그게 태헌이었다. 우 회장의 손에 오로지 병기처럼 키워진 그는 공감과 감정에 할애할 여유 없이 오로지 배움이란 목적을 향해 달렸다.

    그 과정에서 태헌은 한층 더 정나미 없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아이답지 않다, 내 자식이지만 무섭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럴까. 등 부모에게 부정당하던 어린 태헌을 정으로 품어준 게 강 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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