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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37화 (37/85)

37화

*

연서에겐 그 어렵던 일이 태헌에게는 하루아침에 정리될 만큼 쉬운 일이었다는 게 안심되는 한편 믿기 어려웠다.

“어떻게요…? 어떻게 손쓰신 거예요?”

“귀찮긴 해도 어려운 건 아니야. 또 치울 거 있나?”

물건 치우듯 평이하게 묻는 태헌의 말투가 농담이 아니란 걸 안다. 그래서 안도했다. 연서는 고개를 젓다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저 때문에 손해 본 사람들이 있대요.”

“어떤 손해.”

“우승빈 부장님 말로는, 제가 우 상무님께 보고한 사람 중 몇 명이 숙청당했다고 해요.”

내내 찜찜하던 일을 입에 올리자 태헌이 피식 웃었다.

“그게 왜 네 탓이야. 능력 없어서 도태되는 쪽이 문제인 거지.”

“그래도….”

“더 나가면 자의식 과잉일 텐데.”

“정말, 아니에요?”

“어떻게 확신시켜줄까. 우승빈 데려와서 다 개소리였다고, 시인하게 해?”

연서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무지막지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태헌이 이번엔 무섭지 않았다.

아니 아예 무섭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고, 이런 무서운 사람이 제 편이라고 여기자 자꾸만 든든해지고 있다. 이런 속내를 들킬까, 그녀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아니요. 그리고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하려고 해요. 제가 그랬다고…….”

“해.”

“네?”

“그래서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래야지.”

“저 떠나면 선생님 스트레스받으실 거라고……. 막 협박하셨잖아요. 이 일로 선생님 충격받으실 수 있는데 괜찮아요?”

“꼬시려면 무슨 말을 못 해.”

꼬시다니?

“내가 말 안 했나. 처음부터 한연서 씨한테 꼴렸다고.”

“말도 안 돼.”

그럼 그때부터…… 그런 마음을?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연서가 붕붕 고개를 저었다. 태헌은 아무렇지 않은 눈치인데 혼자만 끓어올랐다가 주저앉았다가 하는 게 꼴불견 같아서 질문을 삼켰다.

“우승빈이 갚은 3억은 내 쪽에서 해결했어. 기존 빚도 오늘 중으로 처리될 거야.”

태헌이 도움 주겠다고 한 일엔 연서가 짊어진 빚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보같이 그걸 잊고 있었다. 그만큼 태헌의 관계를 다른 방향으로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에게 자존심 상하지 않을 것. 그에게 버림받을 날에 슬퍼하지 않을 것. 태헌에게 안기는 내내 그런 것들을 생각하느라 빚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다.

“감사해요. 하지만 아직 갚지 않은 돈은 그냥 두세요.”

“괜히 고집부리지 마. 네가 갚기에 버거운 액수야.”

“아뇨. 그거라도 남겨주세요. 그래야 제가 이사님 곁에 있는 게 좀 덜 괴로울 것 같아요.”

태헌이 서류를 슬쩍 내렸다.

“염치없잖아요. 5천만 원 주신 것도 돌려드릴게요. 3억이라는 큰돈을 갚아주셨으니 그건 돌려드리는 게 맞아요.”

태헌이 넥타이를 조금 잡아 내렸다. 연서를 직시하는 동공엔 서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오늘따라 그의 날카로움이 따끔했다. 연서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애인이 빚쟁이인 건 못 보세요?”

“말을 바로 해야지. 내 도움받는 게 싫어서 뻗대는 게 누구야.”

“그리고… 다시는 화대라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주실 거면 정말 애인에게 해줄 수 있는 만큼만 주세요.”

어디선가 시곗바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째깍째깍. 시간이 흐르는데 연서는 멈춰 있는 기분이었다.

그 흐름을 깨고 입을 연 건 태헌이 먼저였다.

“내 개인 비서가 되는 건 어때.”

“개인 비서요?”

“그래. 신 비서 말고 내 개인적인 일을 처리해줄 비서가 필요해. 잡무 처리나 용인 집에서 필요한 도움을 줄 사람. 신 비서를 용인 집까지 들이면 할머님이 불편할 테니.”

톡톡. 서류를 정리해 파일에 끼워 넣던 연서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대가로 돈 주시려는 거죠?”

“이 정도 물러났으면 너도 양보해. 굳이 아등바등 스스로 빚 갚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기회를 주는 거야.”

“제가 비서를 어떻게 해요, 이사님.”

“이것마저 싫다면 내 방식대로 할 거고, 당연히 네가 원하는 방향과는 거리가 멀겠지.”

아마도 거절한다면 연서의 남은 빚을 모조리 탕감해버리고 그 대가로 족쇄를 더욱 단단히 조일 남자였다. 그럴수록 연서는 더욱 작아질 거다. 그가 떠난 자리가 더 크게 다가올 거다.

“잡무 정도만 해주면 돼. 중요한 일은 아니니 어깨에 힘 들어갈 일 없을 거고.”

태헌의 말대로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 거다. 회사 업무와는 상관없는 일이겠지. 그리고 그 대가로 태헌에게 보수를 추가로 받게 될 거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으나 태헌이 남은 빚을 모조리 갚아버리는 것보단 나은 방법이었다. 선택권이 없는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그럼 우 상무님이랑 우승빈 부장님, 어떤 식으로 해결하신 건지 말씀해 주세요.”

태헌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으나, 연서는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우 부장은 해외로 지사 하나 맡아서 나갈 거야.”

“발령인가요?”

“그래. 우 상무는 별거 없어. 한연서는 내 애인이니 손 떼라고 해야지.”

연서가 숨을 삼키며 물었다.

“…애인이라고 말할 거예요?”

“방금 네 입으로 애인 애인, 앵무새처럼 종알대지 않았어?”

“그게 아니라, 아직 다른 사람에게 밝히는 게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달까요…….”

연서가 괜스레 제 몸을 감싸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에겐 쉬운 일이었구나, 싶다가도 이렇게 정리가 된다고?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더 해명해야 돼?”

태헌이 물어오기에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해결됐다면 된 거겠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건 강 여사에게 자신의 죄를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돼요?”

태헌의 눈동자가 까맣게 번뜩였다.

한 번만 안아달라고, 그렇게 사무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하룻밤까지 함께 보낸 상대인데 조금만 손을 내밀어 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대신 무릎을 세워 조금씩 그에게 다가간 연서가 태헌의 허리를 끌어안고 조심히 얼굴을 기댔다. 그 과정이 천년처럼 길었다. 연서가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애인이니까 이런 거 해도 되죠?”

“욕심이 소박하네.”

태헌의 목소리가 나긋해서 연서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럴 땐 더 달라고 해야지.”

연서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턱을 태헌의 가슴에 얹고 눈을 맞추었다.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태헌의 무도한 심성이 깃든 눈동자는 연서의 용기를 얼어붙게 했다.

그래도 태헌이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연서는 옅게 웃었다.

갈 길을 인정하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이제 와 후회해봤자 고통만 남을 테니 흘러가는 대로.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여태 그랬듯이 연서는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살 터였다.

차라리 오늘 아침, 태헌이 매몰차게 호텔을 떠났으면 한 번뿐인 처음을 오래오래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을 텐데 태헌은 이렇게 연서의 곁에 있었다. 바빠 보이는데 출근까지 마다하고서.

그런 사소함에 행복했다.

“많이 바빠요?”

“항상 비슷해.”

괜히 바쁜 사람을 붙들어둔 것 같단 미안함에 연서가 서류를 한 번 흘긋거렸다. 일거리를 가져올 만큼 정신없단 소리였다.

“저 때문인 거면 먼저 출근하셔도 돼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어떻게 아셨어요?”

태헌이 불편한 자세를 하고서 팔을 뻗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정말 연애하는 건지, 넝쿨처럼 감긴 연서를 뿌리치진 않았다.

연서는 울고 싶은, 그러나 웃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을 품고서 눈가로 쏟아지는 햇살을 향해 고갤 돌렸다. 나쁘지 않은 처음이었고, 아침이었다.

최악의 수를 생각해두면 이렇게 평범한 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태헌은 허리에 달라붙어 식사가 도착할 때까지 부동자세로 머물렀다.

식사는 조용히 이뤄졌다. 연서는 먹는 데 열중하다가 한 번씩 태헌을 관찰했다.

연서가 걱정했던 모진 말이나 살벌한 눈빛이 돌아오진 않았다. 태헌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 너그러워지는 걸까.

연서는 먹기 싫은 브로콜리를 태헌의 접시에 슬쩍 올려두었다. 결벽적인 그를 시험하는 짓이라서 심장이 두근댔다.

태헌은 슬쩍 연서를 바라보곤 입을 닦았다. 아예 식기를 내려놓은 그가 물을 마셨다.

괜한 짓을 해서 입맛을 떨어뜨리게 한 걸까. 연서는 양치질하면서도 태헌의 그 태도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어쨌거나 이제 씻고 용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조금 전 강 여사와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다.

연서는 샤워할 생각으로 옷을 탈의했다. 울긋불긋한 피부를 거울에 비춰본 연서는 다시금 기함했다. 어쩜 사람을 이렇게까지 물어뜯을 수 있는 걸까.

붉은 낙인은 꽃잎처럼, 혹은 멍처럼 연서의 하얀 피부를 뒤덮고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잇자국에 침을 꼴깍 삼켰다.

참았던 만큼 더 거센 폭발을 한 듯했다. 침대 위와 아래서의 온도가 다른 남자란 걸 지난 밤을 통해 깨우쳤다. 또다시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아야.”

연서가 흔적 위로 손가락을 덧그리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래서 샤워는 할 수 있을까, 샤워기에서 뻗친 물줄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낼 자신이 없어졌다.

똑똑똑.

“네?”

노크 소리에 연서가 긴장하며 뒤돌았다.

“들어가도 되지.”

“자, 잠깐만……!”

애초에 연서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태헌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욕실 앞으로 들어왔다. 연서는 어설프게 앞을 가리며 울상을 지었다.

“드, 들어오라고 한 적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들어오시는 게 어디 있어요.”

“네 몸 구석구석 안 본 데가 없는데, 새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태헌이 무감하게 연서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부끄러움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태헌이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긴 하나 이렇게 밝은 곳에서 알몸을 내보이는 건 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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