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연서의 의지와는 다르게, 본능적으로 그를 조르고 있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워서, 사람을 미치게 해.”
“아니, 흐읏!”
“모르겠으면 눈 뜨고 직접 봐. 네가 어떻게 달라붙는지.”
연서는 젖은 속눈썹을 겨우 젖혔다. 눈물에 잠긴 눈동자에 얼룩지듯 태헌이 담겼다.
얼굴을 약간 일그러뜨린, 흥분에 잠긴 태헌이 있었다. 그가 연서의 세상을 가득 채운 채 잊히지 않을 하루의 주인공이 되어주고 있다.
“이사니임…….”
“이름 불러 봐.”
평소와 다른 온도였다. 발간 그의 눈가에서 흥분이 느껴지자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몰라…….”
“이러면서 천천히 하라고 하면, 어떻게 말을 들어줄까.”
연서가 그의 뺨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굴이 마음에 들고?”
“조, 좋아요.”
태헌의 입술이 살짝 올라섰다.
“이게, 진짜.”
일자로 입술을 다문 그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름.”
“태, 태헌……. 우태헌.”
태헌의 어깨에 걸린 두 다리가 힘없이 달랑대기 시작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뜨거운 물살이 연서를 꿰뚫고 지나갔다. 격해진 행위 끝, 기어코 고지에 올라 잔열에 몸을 떠는 연서의 관자놀이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헌이 입술을 급히 집어삼켰다. 그의 진한 숨이 연서에게로 스몄다.
*
12시 30분.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연서는 눈을 떴다. 호텔 시트가 사각사각, 살결에 감겼다.
윤해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넣고도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우 상무에게 전화하지 못했다. 하긴 요즘 장례식이다 뭐다 해서, 강 여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일을 빼먹기 일쑤였다.
승빈에겐 충분히 뜻을 밝혔으니 다음은 우 상무와의 담판이었다. 아니, 바로 강 여사에게 모든 것을 밝히는 게 나을 수 있다.
혹여 우 상무가 자신을 해치려 든다면 태헌이 도움이 되어줄까. 그의 손만 잡으면 얼마든지 이 암흑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몰랐다.
강 여사의 용서를 받는 일에도 그가 힘써줄지도 모르겠지. 이런 얍삽한 계산을 하면서도 주춤하게 되었다.
태헌으로 인해 더한 어둠에 빠지게 되리란 걸 예감했기에.
연서는 눈을 깜빡이며 어제의 일을 되감았다. 승빈과의 일을 모조리 표백당한 밤이었다. 첫 정사 이후 태헌은 한 번 더 연서를 안았다.
그녀가 기절하듯 늘어지고 나서야 물러났다. 그 증거로 온몸이 쑤시고 피부가 따끔거렸다. 구석구석 그의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건조한 섹스를 할 줄 알았는데, 태헌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그런 이중적인 면모에 가슴이 떨려왔다. 혹시 제게만 그러는 걸까, 괜한 기대를 하고 마는 것이다.
태헌에게 향하는 마음을 거세시킬 도리가 없었다. 그가 띄운 배에 탔으니, 좌초되기 전까지 태헌의 애인 행세에 심취하는 게 손해를 줄일 방법이 아닐까.
연서가 욕심부릴 수 있는 기회는 이번뿐이었다. 그와 이별하는 순간까지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마음에 제동을 거느라, 짧은 기한을 우울하게 보내는 것 또한 미련했다.
연서는 어젯밤을 평생 잊지 못할 거다. 태헌의 애인으로 있는 시간도 아마 그와 같지 않을까.
잊지 못할 순간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는 게 낫겠지. 그러려면 내가 먼저 웃으면 돼.
결심을 마친 연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대충 덮어두었던 침대 시트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슴께로 시트를 잡아당기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관계 후 매정하게 호텔을 떠날 줄 알았는데, 태헌은 침실 밖에 있었다.
전화 통화하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많이 바쁠 텐데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에 조금은 기뻤다.
쌀알 같은 행복이라도 주워 담아야 버틸 수 있을 테니 연서는 희망을 그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연서는 지끈대는 허리를 부여잡고 발을 내디뎠다. 시트를 돌돌 만 채 침실 문밖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태헌은 소파에 앉아 서류를 읽는 중이었다. 새벽까지 연서를 몰아붙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슈트를 차려입은 모습이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다.
호텔이 아니라 사무실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반대 방향에서 다른 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연서는 이쪽으로 향하던 신 비서와 눈이 마주치고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도 있을 거라 생각 못 했다.
“일어나셨습니까.”
공손하게 인사까지 하는 신 비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시트를 뒤집어쓴 해괴한 모습이 부끄러운 건 연서뿐인 듯 태헌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일찍 깼네.”
다시금 침실로 숨자니 이상하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니 민망했다. 태헌과 잤다는 노골적인 상황을 신 비서에게 보인 게 못내 창피했다.
연서가 머뭇대는 동안 신 비서가 친절하게 손을 한쪽으로 뻗으며 말했다.
“한연서 씨 옷은 저쪽에 두었습니다.”
“옷이요?”
“네. 지난번과 같은 사이즈입니다. 이너웨어는 김현영 팀장이 준비했습니다. 불편하시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한 번 해본 일이라고 자신만만한 투였다. 신 비서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제 옷을 신 비서에게 부탁하는 건 부당했다. 아무리 태헌의 지시였겠지만 반갑지 않은 심부름이었을 터다.
“죄송해요. 번거로우실 텐데…….”
“아니,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크게 손을 젓는 신 비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워 보였다. 태헌을 의식하고 있는 거겠지.
“감사해요. 잘 입을게요.”
연서가 싱긋 웃으며 머리까지 뒤집어쓴 시트를 안쪽에서 꽉 당겼다. 속옷 구매만 현영에게 맡긴 태헌의 배려가 의외로 섬세하다 싶다가도, 이런 모습으로 신 비서를 맞닥뜨리게 한 걸 보면 무감한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우태헌.
“신 비서는 이제 돌아가도 될 건데.”
“네?”
태헌의 목소리가 둔중하게 내려앉자 자신만만하던 신 비서의 어깨가 금방 오그라들었다. 태헌의 기에 눌린 신 비서에게서 연서는 묘한 동질감을 느껴봤다.
“이만 나가 봐요. 룸서비스 준비해주고.”
“메뉴는 어떻게 할까요.”
“속 편한 거로 올려요. 죽이나 한식이 좋겠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만 저는 가 보겠습니다.”
연서에게도 깍듯하게 인사한 신 비서가 물러났다. 사락, 태헌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파동했다.
연서는 여전히 문가에 서서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새벽에 열이 좀 났어.”
“저요?”
“그래, 약 먹였는데. 좀 어때.”
어제 하루 종일 미열이 있었다. 결국 새벽에 탈이 난 걸까. 그러나 약을 먹은 기억이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먹은 거지?
“그날 비 맞은 데다가 우승빈이 먹인 약 기운이 겹쳐 탈이 났을 거야.”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열도 없고요.”
“다른 아픈 덴.”
“온몸이 아파요. 그리고 말하기 힘든 곳이 조금…….”
연서가 조심히, 그러나 조금은 대담하게 웅얼거리자 태헌이 대꾸하지 않았다. 아주 저 궁금한 것만 묻고 입을 닫는 게 일상이다.
연서가 옷을 입기 위해 쇼핑백으로 향했다. 그 순간 태헌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부었던데.”
부어?
연서가 쇼핑백을 뒤지며 묻다가 멈칫했다. 어디가 부었다는 건지 한 박자 늦게 이해한 터라 귓불이 홧홧해졌다.
“언제…… 봤어요?”
“다시 확인해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리 와 봐.”
“싫어요.”
“이제 와서 내외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와서 자세 잡아 봐. 봐줄 테니까.”
“미, 미쳤어요? 변태.”
놀라 아무 말이나 튀어 나갔다. 무슨 자세를 잡으라는 거야.
태헌의 눈썹이 슬쩍 올라섰다.
“미친 짓은 이미 했고.”
“안 부었어요. 괜찮아요. 내가 알아.”
연서가 도리질 쳤다. 그러곤 쇼핑백을 들고 침실로 줄행랑쳤다.
혹시 태헌이 쫓아 들어올까 긴장했으나 거실 쪽이 조용했다. 연서는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몸을 둘둘 말아둔 시트를 내리자 얼룩덜룩한 피부가 생각보다 더 처참한 몰골로 지난밤의 행위를 증명했다.
앞으로도 이런 식은 아니겠지. 이러다간 온몸이 새빨개질 수도 있겠단 걱정을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태헌이 따뜻한 수건으로 꼼꼼히 몸을 닦아주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딱히 불쾌하진 않아 식사 뒤에 씻기로 정했다
원피스 두 벌 중, 기장이 조금 더 긴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태헌이 있는 거실로 돌아갔다. 일에 집중한 태헌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금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절대로 태헌이 부었나 확인할까 무서워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방해하면 안 되니까…….
그를 흘긋거리던 연서는 흠흠, 작게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거 정리하실 거예요?”
연서가 테이블 위에 뭉텅이로 나뉜 서류를 가리키며 묻자, 태헌이 작게 턱을 까딱였다.
“그럼 제가 정리해도 될까요?”
“회사별로 정리해야 되는데,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어요.”
연서는 빠르게 문서를 훑었다. 각 하단에 회사 마크가 찍혀 있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순서를 이니셜 순으로 할까 하다가, 수주 관련 계약 서류란 걸 확인하고 거래액이 큰 순서대로 정렬했다.
태헌이 살피는 게 새 프로젝트에 투입될 하청 업체를 고르는 일이란 걸 조금 전 통화 내용으로 얼추 들었기 때문이다.
“식사 마치면 용인으로 먼저 들어가.”
“이사님은요?”
“회사 들렀다가 미팅 있어. 저녁엔 들어갈 거야.”
“네.”
“그리고 앞으론 우 상무와 연락하지 마. 그쪽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그래도 돼요?”
“치워준다고 했잖아, 연서야.”
연서야, 하는 말에 두 뺨이 뜨끈해졌다.
“그리고 할머님 곁엔 원하는 만큼 있어도 돼. 간병인 보수도 그대로 입금될 거고.”
“이제부터 이사님이 주는 거예요?”
태헌이 서류를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고개만 돌려 그가 연서를 바라보았다.
“우승빈 다시 볼 일 없을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