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문득 승빈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언제였더라. 우 회장이 태헌에게 골든레트리버 한 마리를 안겨준 무렵이었나. 태헌은 당시 열넷으로, 지금보다 더 재수가 없었다.
매주 금요일 태헌의 집에서 외국어 스터디가 있었다. 오너가의 자제들이 모여 다양한 언어로 회담을 흉내 내는 그런 스터디였는데, 학습은 대개 태헌의 위주로 흘러갔다.
번번이 태헌에게 밀리기 일쑤였던 승빈은 늘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그 당시는 넘치는 질투를 숨기질 못했다.
승빈은 태헌의 집을 찾을 때마다 골든레트리버를 몰래 괴롭혔다. 막대기로 쿡쿡 찌르고 깨갱거리는 금빛 생명체를 보며 조소했다.
그래봤자 넌 사람이 주는 밥이나 얻어먹고 사는 개새끼야.
그렇게 우 회장이 태헌에게 내린 사랑을 폄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뒤뜰로 나온 태헌에게 강아지를 괴롭히던 모습을 들켰다. 그때 태헌이 지었던 표정이 꼭 지금과 같았다.
칠흑 같은 동공과 감정 없는 얼굴.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
승빈은 그날, 태헌에게 코뼈가 주저앉을 만큼 얻어맞았다. 늘 고상 떠는 새끼라 직접 몸을 부딪쳐 올 줄 몰랐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태헌은 보통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몸이 아니라 머리를 쓰고 사람을 부렸다. 그런 점이 항상 꺼림칙했는데, 그날 태헌은 승빈의 편견을 모조리 부수었다.
한 살 어린 사촌 동생은 얼마든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광견 같은 놈이었다. 그 사건 직후 태헌은 당연히 가해자가 되었다. 병원에 입원한 승빈은 피해자였고 태헌은 우 회장에 불려가 호되게 혼이 났다.
그런데도 승빈은 마음껏 좋아하지 못했다. 무기력한 굴복이 두려움을 낳은 것이다. 서열 싸움에 패자가 된 승빈은 그 후로 태헌의 심기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
승빈이 긴 상념에서 깨어난 건 태헌의 명령 같은 말투 때문이었다.
“꿇어.”
“…뭐, 태헌아?”
“한연서 앞에서 꿇어도 좋고. 뭐가 나을지 결정해 봐.”
하, 승빈이 마른세수를 했다. 눈알이 뻑뻑할 만큼 피로감이 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꿇으라니. 힘없던 어린 날과 비교하면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었다. 태헌도 어린 날의 치기란 변명이 먹힐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때처럼 저를 짓밟지 못한 거란 계산을 했다.
“그런 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 이러지 말자, 태헌아.”
태헌이 팔을 뻗었다. 목덜미를 잡고 발을 걸어 승빈을 바닥에 주저앉힌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흐윽…….”
얼굴 그대로 바닥에 부딪힌 승빈의 신음이 깊었다.
“기어오르지 마.”
“윽, 너…….”
“개 같은 머릿속을 전부 파버리고 싶은 걸 참는 중이야.”
차분한 태헌의 목소리가 악귀처럼 차가웠다. 승빈이 뜨끈한 게 흐르는 코를 훌쩍거렸다.
“살고 싶으면 눈치껏 행동해야지.”
그사이 태헌이 바스 가운의 허리끈을 잡아 빼 돌돌 뭉친 후 승빈의 입에 쑤셔 넣었다.
승빈이 몸을 비틀며 반항하려는 순간 눈앞이 번쩍 튀었다. 승빈은 신음도 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날아드는 둔탁한 발길질을 받아야 했다.
더러운 고간을 지르밟는 이의 눈빛엔 그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
씻고 나온 연서는 태헌이 없는 객실을 유령처럼 부유했다.
태헌이 돌아오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 자세로 깜빡 잠이 들었다가 슬리퍼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시원한 바디워시 향은 검은 인영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씻은 건지 가운 한 장을 대충 걸친 태헌이 연서를 내려다보았다.
“어디…… 다녀왔어요?”
연서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대답이 없어 중얼거렸다.
“이제 이런 거 물어도 되는 사이 아니에요? 아니면 말고…….”
슬쩍 말끝을 흐린 연서가 태헌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어깨를 타고 흐른 가운을 움켜쥐고 끌어 올렸다.
심연 같은 눈동자로 연서를 주시하고 있던 태헌이 성큼 다가왔다. 턱을 틀며 연서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는 동작이 막힘 없었다.
태헌이 깊게 입을 맞췄다. 물 흐르듯 쩌릿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흐읍…….”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연서의 안으로 자리 잡고 똬리를 틀었다. 매듭을 짓는 것처럼 엉킨 두 형체가 음란한 소리를 빚었다. 찰흙처럼 말랑하고 단단한 경도와 오돌오돌한 돌기가 서로 맞대어 비벼졌다.
연서는 고인 샘물을 힘겹게 넘기며 태헌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 전의 입맞춤은 애들 장난이었던 것처럼, 태헌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들이닥쳤다.
횃불처럼 뜨거운 덩어리가 연서를 들쑤셨다.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조금 전 눈을 맞췄을 때만 해도 태헌에게 여유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기름 먹은 도화선이 불붙듯 치열하게 입을 맞췄다. 태헌도 이렇게 몸을 부딪쳐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격렬한 사람이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태헌이 연서의 허리를 받쳐 소파에서 끌어 올렸다. 허벅다리 밑을 받치며 아예 안아 들었다.
“흐응…….”
“보채지 마.”
보챈 게 아니라 그냥 절로 가슴이 끓는 것뿐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는데 입술이 먹혀버렸다.
연서가 생각의 틈을 모조리 빼앗긴 건 침대에 누우면서부터였다. 태헌이 대충 걸친 가운을 아무렇지 않게 벗어던졌다. 이어 연서의 매듭도 선물처럼 과감히 풀었다.
활짝 펼쳐진 가운 사이로 말갛게 드러난 얇은 피부. 뽀얗게 핀 설원에 뜨거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가리지 마.”
태헌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연서는 손을 옆으로 치우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게 이렇게 몸 둘 바를 모를 일이었구나.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말이 돼? 널 이렇게 두려고 무슨 짓을 했는데.”
태헌이 말을 끊다가 후 숨을 내쉬었다.
“…….”
태헌이 손을 뻗어 협탁 서랍을 뒤졌다. 콘돔 한 상자가 툭 던져졌다.
연서가 크게 뜬 눈으로 그걸 바라봤다. 원체 익숙지 않은 물건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구비된 게 영 이상해 보였다. 연서의 궁금증을 읽은 듯 태헌이 말했다.
“오늘 같은 날에, 룸에서 떡 치는 VIP가 한둘이겠어.”
“떡이라니…….”
“그럼 뭐라고 할까. 섹스? 교접? 방아?”
“…관계라고 해주세요.”
“우리가 할 게 그렇게 고상하기만 하진 않을 건데.”
“알아요…….”
연서가 웅얼거리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콘돔이 호텔 측의 배려라니. 오늘 밤 태헌과 저지를 일을 누군가 알 수도 있다고 여기자 못내 부끄러웠다.
태헌이 허리를 숙였다. 옅게 맥박치는 목을 깨물며 살갗을 강하게 흡입했다. 연서가 짧게 신음하며 발끝을 말았다.
그의 앞머리가 쇄골을 스치며 내려갔다. 창피함에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다가 두 손목이 잡혀 머리 위로 고정되었다.
태헌은 노골적으로 정점을 괴롭히고 말간 언덕을 희롱했다.
“여기도 딱 한연서 같네.”
연서가 붉어진 눈으로 밭은 숨을 내쉬었다. 호흡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벌써 얼룩덜룩했다. 태헌이 샅샅이 먹어 치운 결과였다.
“작고.”
“아, 안 작아요…….”
“그래, 앙증맞고 거슬려.”
혀끝이 툭툭 흔들고 지나가자 연서의 허리가 잘게 경련했다. 작은 자극에도 뻗대는 그곳이 생경한 감각에 진저리치고 있다.
“고집도 있지.”
움푹 팬 배와 덜 여문 것처럼 수줍은 곳에도 태헌의 시선이 닿았다.
아. 연서는 뜨거운 관찰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감았다.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생경해 끙끙대었다.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태헌이 짙은 숨을 내쉬었다.
“이, 이사니임…….”
눈을 뜬 연서가 버둥대며 태헌의 어깨를 잡았으나, 허벅지 안쪽을 눌러 잡으며 얼굴을 묻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낯선 쾌감에 속수무책으로 유랑했다. 생각지 못한 절정에 익사할 것처럼 잠겨 헐떡였다.
무지막지하게 취할 거로 생각했는데 태헌은 아낌없이 공들여 연서의 몸을 풀었다. 연서가 그만해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태헌은 깊게 묻었던 손을 빼지 않았다.
“이제, 그만…….”
“그만 어떻게.”
태헌의 입에서 차마 옮기기 어려운 노골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연서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팔을 당겼다.
그게 연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이제 그만 몸을 겹치고 싶다고, 애태우지 말라고.
허리를 세운 그가 뭉툭하게 파고들었다. 노곤해지도록 풀었는데도 범상치 않은 태헌을 받아들이기엔 벅찼다. 빠듯하게 몸이 갈라지는 통각에 연서의 숨이 턱 막혔다.
“힘 빼. 아예 끊어 먹게?”
“흐읏…….”
열락점을 찾아 지분거리며 태헌이 연서의 긴장을 달랬다. 그도 힘겨운지 눈썹이 찌푸려진 채였다. 연서가 시트를 움켜쥐자 태헌이 몸을 바짝 겹쳐왔다.
“잡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연서는 너른 등에 팔을 감았다. 채 감기지도 않을 만큼 단단하고 넓은 어깨가 적당한 무게감으로 제 몸을 감싸자 안도감이 찾아왔다.
불안함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태헌이 입을 짧게 맞춘 뒤 본격적으로 연서의 몸을 가르고 침입했다.
“아파?”
“아파요.”
“그래도 안을 건데.”
“뭐야, 어떻게 하란 거예요…….”
“더 열어 봐. 그래야 너도 편해.”
연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가 가까워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발끝에서 시작된 열감이 머리까지 채워졌다. 연서는 흐느끼며 손을 내려 더듬었다. 정말 이어져 있구나.
“왜. 맛있어?”
“아니, 흣…….”
“난 그런데.”
지분거리는 연서의 손을 잡아채 깍지 낀 그가 입술을 맞춰왔다. 연서는 너울거리듯 천천히 순풍에 흔들렸다. 따지고 보면 비참한 순간인데, 연서는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달뜨게 신음했다.
서서히 스퍼트를 올리는 태헌에게 매달려 흐느꼈다. 고개를 저으며 그를 불렀다. 통증 뒤에 따라붙는 쾌락이 벼락처럼 수시로 연서를 관통했다.
물러났던 그가 밀려들 때마다 좀 전보다 더 강한 전율이 연서를 덮쳐왔다.
“이사님, 조금만 천, 천히…….”
“이보다 어떻게 더. 충분히 배려하고 있잖아.”
“아!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