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연서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헌의 입매가 평소보다 선명했다. 입에 힘을 주고 있는 것처럼.
그가 손가락을 내려 욱신거리는 연서의 입가를 어루만졌다. 그래도 최선을 다한 효과가 있는지 태헌의 눈썹이 차차 찌푸려졌다.
“서툰 것도 귀엽네. 한연서가 참 대단하지.”
“흡…….”
계속되는 행위에 연서의 말간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툭하면 울고.”
연서가 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역한 것보단 기분이 이상했다. 간간이 숨을 흩트리는 태헌이 저로 인해 흥분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묘한 고양감이 일었다.
저 우태헌이, 그 우태헌이 기분 좋은 것처럼…….
연서가 혀를 굴려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다.
“잘도 기어오르고.”
태헌이 머리칼을 한데 쥐어 연서의 한쪽 목을 드러냈다. 그리로 향한 그의 시선이 뜨겁고 탁했다.
“꼴린단 소리야.”
연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태헌이 한계에 다다른 연서의 입가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너무한 것 같아?”
“흐읍…….”
“여러 날 동안 사람 등신 만든 너보단 아닐 거야.”
연서는 버겁게 그의 것을 물고 있는 동안 착실하게 다음을 어떻게 이어갈지 머리를 굴렸다. 지식 하나가 번뜩 떠올라 손으로 밑동을 감쌌다.
태헌을 올려다보자 그의 눈썹이 부쩍 기울었다. 그가 돌연 연서의 머리를 물리려 했으나 괜히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끝까지 여유로운 그가 저로 흐트러지길 바라며 성난 허벅지를 다잡았다.
짧은 욕설과 함께 그가 토정했다. 강한 사출에 사레들린 연서가 물러나며 기침을 쏟아냈다.
미처 받지 못한 정염이 이리저리 튀었다. 연서의 뺨과 옷, 그리고 그의 바지까지.
눈가가 새빨개진 연서가 연신 기침을 하자 태헌이 생수를 내밀었다. 연서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막았다.
“고집도 세고. 빨리 헹궈.”
“가, 갑자기 그럴 줄은 몰랐어요. 하아…….”
“나라고 알았겠어?”
“그래도 잘했죠?”
“말은, 잘해.”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연서를 안아 들었다. 연서가 놀라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욕실로 향해 그녀를 욕조 턱에 앉혔다.
“씻어.”
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하는구나.
이런 쪽의 경험이 없어 흘러가는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씻겨주는 건 나중에 해줄 테니까 지금은 혼자 해.”
“호, 혼자 할 거예요.”
뺨을 붉힌 연서는 욕실 밖으로 향하는 태헌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되자 뒤늦게 열이 올랐다.
연서는 힘없이 욕실 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달아오른 머릿속 덕에 승빈의 나쁜 기억을 저 멀리 미룰 수 있었다.
*
객실에서 나온 태헌이 향한 곳은 승빈의 객실이었다. 반쯤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군가와 통화하던 승빈이 태헌을 보곤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내리곤 먼저 태헌에게로 다가왔다.
“너 연서 어떻게 한 거야! 지금 연서 어디 있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우 부장님이 대체 무슨 개짓거리를 했을까.”
고저 없는 말투에 승빈의 심기가 비딱해졌다. 연서에게 수면제와 술을 먹여 침실로 데려온 것까진 일이 수월했다.
승빈이 아는 연서라면 몸을 섞고 나면 더는 거부하지 못할 거란 계산이 있었다. 비록 순서가 뒤바뀌었으나 언젠간 관계를 가질 거니, 몸부터 취하겠단 결심이 비도덕적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이 틀어져 연서가 달아났고, 승빈은 그녀를 찾는 데 혼을 쏟았다. 급히 CCTV를 뒤지고 주변 가드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이 방을 빠져나간 연서가 태헌의 방으로 갔단 보고를 받았다. 전부터 태헌이 연서를 매수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오늘 보니 그 의심이 맞아떨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연서가 이 미친놈의 방에 스스로 찾아갈 연유가 없었다. 뭔가 금전적으로 오고 갔으니 연서가 태헌을 따르는 것이겠지.
다만 태헌이 여기까지 직접 행차한 건 꽤 의외였다. 고용한 사람을 위해 일부러 수고를 들여줄 만큼 태헌은 넉넉한 성품이 아니었다.
“연서한테 얼마 줬어? 얼마 줬길래 걔가 너한테 붙은 거야? 그래도 연서 빚 갚은 건 나야.”
“뭘 먹여서 억지로 해보려는 수준인 줄 알았다면 진즉 죽여 놨지.”
“뭐?”
켕기는 게 있는지라 승빈이 주춤했다.
“한연서 물건 어디 있어.”
태헌이 눈동자를 굴려 바닥에 흩어진 클러치와 핸드폰, 립스틱 등을 눈으로 좇아 확인했다.
연서가 들고 있던 물건이 맞았다. 태헌이 손수 클러치를 열어 카드키를 넣어주며 확인한 것들이었다.
흩어진 모양새로 어렵지 않게 승빈이 저지른 짓거리를 그려볼 수 있었다. 의식이 없는 연서를 데려와 눕히며 어떤 음험한 마음을 품었을지도.
태헌이 짙게 고인 숨을 삼켰다. 얼마 후 승빈은 먼 타지로 떠나게 될 것이다. 한데 그보다 더한 죗값을 물어야 할 상황이 왔다.
연서가 객실로 찾아와 울음을 터뜨렸을 때, 목놓아 우는 모습을 보며 태헌은 짙은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지난날, 진즉 승빈을 밟아놓지 않은 걸 후회했다.
승빈과 다툰 연서가 계단으로 뛰쳐 내려간 그 밤, 폭풍우로 숨어버린 그 밤. 태헌에겐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연서가 먼저 뻗는 손을 기다려보겠다고, 승빈의 저질스러운 짓을 눈감았다. 그래서 지금 후회란 걸 했다.
명분 없이도 사람 한 명 나락으로 처박는 일이 그리 어렵지도 않으면서 주저했다. 승빈의 잘못을 묵인한 결과가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
한연서가 다른 남자 때문에 울었다. 연서를 내몰 수 있는 건 태헌 하나면 족했다. 아니, 태헌뿐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렇게 계획에 없는 발걸음을 했다. 앞뒤 재지 않고 승빈의 목을 조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세원의 후계자로 태헌을 점찍으며 언제나 냉철한 녀석이라 칭찬하던 우 회장이 본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주워.”
“뭐?”
“네가 싸지른 것 정돈 손수 치워야지.”
태헌이 바닥에 흩어진 물건을 보며 지시했다. 기막힌 얼굴로 승빈이 낯을 붉혔다.
“연서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술에 취해서 데려왔는데 갑자기 뛰쳐나갔어. 연서가 하는 생각, 그거 오해일 거야. 그러니까 연서 있는 데로 앞장서. 직접 만나서 해명할게.”
“말이 기네.”
“너 자꾸 형한테 건방 떨래?”
“연서 지금 씻고 있어.”
“뭐?”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 들어보고 전할지 말지 정할 테니까.”
연서와의 관계를 나름 노골적으로 설명했음에도, 승빈은 곧장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여, 연서가 씻고 있다고? 네 방에서?”
왜 그래야 하냐는 어설픈 의문이 승빈의 안면에 어렸다.
“섹스하기 전에 씻을 시간 정돈 줘야지 않겠어.”
“잠깐. 그러면……. 그게…….”
승빈의 고장 난 머리가 버벅대며 돌아가는 꼴이 한심하다.
“이제 누구 것에 손댔는지 좀, 감이 오려나.”
“우태헌! 너 연서 협박했어?”
“협박? 우 부장이 그런 말을 할 처지는 되고?”
우 상무의 일을 들먹여 연서를 몰아붙인 주제에, 누가 누굴.
태헌이 조소했다. 오만하게 올라선 입술 끝을 바라보는 승빈의 머릿속은 난파되어 엉망이었다.
연서가 왜. 연서가 무엇 때문에.
우태헌 저 자식이랑 그걸 해?
보나 마나 태헌이 교묘하게 연서를 건드려놓았을 거다.
그래, 그런 거야. 그래서 연서가 자꾸만 자신을 밀어낸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정돈되자 승빈이 할 일을 결정하는 건 빨랐다.
연서를 구해야 했다. 태헌이 파놓은 구덩이에 걸려든 가여운 연서를 구할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흰자위에 핏발이 선 승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너 할머니가 연서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서 이러나 본데, 연서 가지고 장난치면 아무리 너라도 할머니가 용서 안 할 거야!”
“글쎄. 유산 몇 푼 더 받겠다고 연서 옆을 얼쩡거린 누구보단 참작을 잘 받지 싶은데.”
“하, 너는 아닌 것처럼 얘기하지 마. 너도 어차피 연서 데리고 콩고물 떨어지는 거 받아먹으려는 거 아니야?”
태헌이 무표정한 채로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헛짚었어.”
“너도 똑같은 새끼야, 결국 아닌 척해도 바라는 게 있으니까 연서한테 손 뻗은 거잖아. 뭐로 협박했어? 남아 있는 빚?”
승빈이 3억이란 빚을 대신 갚으면서도 기존에 있던 빚까지 전부 갚지 않은 건 나중에 손에 쥐고 유용하게 휘두르기 위해서였다. 연서에게는 절차가 복잡하다고 둘러댔으나 핑계였다.
태헌도 같은 생각이었겠지. 태헌이 묵은 빚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고 거래를 제안했다면 그녀가 넘어간 게 이해가 되었다.
“한연서에 대해 잘 아나 봐.”
“갑자기 나타난 너보단 많이 알아! 뭐, 뭐야?”
태헌이 한 발자국 다가가자 승빈이 놀라 눈을 키웠다. 태헌은 숨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승빈을 내려다보았다.
젖은 머리. 제대로 여미지 못한 바스 가운.
몸이 달아 이 꼴로 연서를 잡으러 뛰어다녔을 우승빈.
“그럼 우 부장이 나에 대해선 얼마나 알까.”
“……뭐?”
승빈의 얼굴 근육이 경련했다.
태헌이 처음부터 연서에게 욕정을 느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우 상무가 한 방 먹은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가 준비한 결혼 후보들을 물 먹여 놓고자 연서를 제 사람으로 만들 궁리를 했다.
첩자였던 연서를 제 사람 삼은 후에 우 상무를 요리할 생각에 즐거워했다. 그러나 연서를 육체적으로 원하게 되었을 때부터, 태헌은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연서를 오로지 저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고 온전히 손에 쥐고 싶었다. 승빈이나 우 상무의 손끝 하나 닿지 않게 품고 싶었다.
언젠가 질릴 관계라고 해도, 그녀가 우태헌의 것이 되었다면 그래야 마땅했다. 그의 결벽적인 성격은 소유물에 한해 예민하게 발동했고 연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헌이 이렇게까지 집착하게 된 상대는 연서가 유일했다. 번번이 직접 나설 만큼 그녀는 특별했다. 이젠 승빈을 향한 인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 걸, 어떻게 할까.”
“뭐?”
“잘 알아보고 손댔어야지. 한연서가 누구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태헌의 낮은 목소리에 승빈의 두피에 소름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