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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33화 (33/85)

33화

*

태헌이 옆으로 비켜섰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무작정 빈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다급히 문을 닫았다.

혹여라도 승빈이 찾아오지 못하게 문을 꾹 누르고 있었다. 쿵쾅쿵쾅 격하게 요동치는 심장 때문에 갈비뼈가 아플 정도였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으나 승빈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아…….”

살았다는 안도감이 덮쳐오자 무릎이 꺾여 주르륵 몸이 미끄러졌다. 연서는 숨을 몰아쉬었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흐윽, 흑…….”

한번 터진 눈물은 쉬이 멈추질 않았다. 연서는 아이처럼 울었다.

바로 옆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밑바닥을 내보이기 싫음에도. 쌓이고 쌓인 불행이 버거워 울고 말았다.

결국 연서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걸 예견했던지도 몰랐다. 그래서 부단히도 태헌을 거절해왔던 거다.

그에게 초라함을 내보이며 도와달라 손을 내밀고 싶지 않아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

그깟 자존심 뭐라고. 평생 세워 본 적도 없는 걸 태헌 앞에서 챙기려 부단히 애썼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치기 부리는 사춘기처럼 목에 힘을 주고 그를 경계했다.

왜? 태헌이 어떤 의미기에, 이렇게까지 내몰려선…….

태헌의 애인 행세 같은 건 연서의 불행을 더욱 불어나게 할 뿐이다. 암흑뿐인 낭떠러지로 투신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더는, 기대와 실망. 행복과 불행을 반복하며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기 때문에. 상처 받을 자신이 보이니까.

그래서……. 나는.

“흐윽…….”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연서는 혼자 승빈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반대로 이곳에 남는다면 태헌에게 도움을 구걸하고 그가 원할 때 몸을 내어주는, 그리도 끔찍했던 스폰 관계가 된다.

연서가 울음기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술에, 약을……. 탄 것 같…….”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다시금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우는 연서가 잠잠해질 때까지 태헌은 말이 없었다.

시간이 꽤 흘러 그녀의 흐느낌이 겨우 잦아들었을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치워줄까?”

태헌의 차분한 목소리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가라앉았다. 부유하던 생각들이 정돈되어 갔다.

조금만 늦게 깼다면 승빈에게 당했겠지. 아무리 몸부림치고 거부해도 승빈은 연서를 품었을 터다. 그런 끔찍하고 토악질이 나오는 상황에 도달해서야 연서는 태헌을 찾았다.

달려오는 동안 머릿속을 점령한 건 승빈에게 붙잡히고 싶지 않다는 일념이었다. 그 다급함 뒤엔 태헌을 먼저 찾을걸, 하는 후회가 깔려 있었다.

그동안 차마 꺼낼 수 없던 마음이 내몰리고 내몰려 막다른 길에 도달한 후에야 튀어 오르고 말았다.

나는 그가, 좋아.

태헌이 설령 유산을 노려 자신을 곁에 두려는 것이라고 해도. 태헌의 애인이 되어 이리저리 이용당하다 결국 파멸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우태헌이 좋았다.

적어도 태헌을 택한다면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연서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흐린 조명 아래 선 태헌의 얼굴은 기억보다 조금 더 날렵해 보였다.

“도와달란 말이 어려워?”

그는 천하를 주무를 수 있는 남자였다. 강 여사의 말로 태헌이 가진 게 그의 부친과 비등하다고 했다. 승빈 정도는 가뿐히 정리해줄 수 있을 터다.

그런 건 보류하더라도….

고개를 저은 연서는 무엇에 홀린 듯, 혹은 체념한 듯 목소리를 쥐어짰다.

“도와…… 주세요.”

이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그동안 버텼던 걸까. 태헌의 말대로 내뱉고 나니 별것 아니었다. 언어가 되어 나오자 더 간절해졌다.

태헌이 그사이 마음을 바꾸지 않았길 바라며 불안에 떨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도와주세요, 이사님. 도와주세요…….”

그리고 조금만…… 늦게 버려주세요.

연서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목소리가 흔들려서 들리지 않았을까, 재차 말을 얹었다.

“저 좀, 제발 도와주세요. 흐윽…….”

“호텔 밖으로 나간 정황은 없고, 라운지에도 없고. 우승빈 객실로 갔다는 말을 듣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고개를 젓는 연서를 바라보며 태헌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턱을 쥐었다.

“분명하게 말하는데 끝을 정하는 건 나야.”

그의 손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태헌의 깊은 숲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검은 물이 넘실넘실 그의 눈동자를 잠식했다.

덜컹덜컹, 덜 닫힌 문처럼 호흡이 불안하게 뛰었다.

“……늦지 않은 거죠?”

그가 잠시간 연서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을 듯 말 듯 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버릇 나빠지겠지.”

굽혔던 허리를 편 태헌이 그녀를 등지고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등을 기대고 다리를 살짝 벌려 앉은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넥타이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내려온 그는 연서가 본 것 중에 가장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 해. 직접 와야지.”

“아…….”

연서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가 저려 다시 주저앉았다. 소파 암레스트에 걸친 태헌의 손가락이 툭툭, 초에 맞춰 움직였다.

그게 꼭 카운트처럼 들렸다. 태헌의 짙은 눈동자가 연서를 시험하듯 끈적하게 그녀를 훑어내렸다.

“다른 새끼 냄새를 묻히고 와선, 내가 직접 데리러 가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아…….”

연서가 바닥을 짚었다. 순간 수치심이 확 올라와 귀가 뜨거워졌다. 이제 자세를 낮추고 그의 자비를 바라야 하는 걸까.

“연서야, 이젠 지겨워지려 하는데.”

태헌이 처음으로 부른 성을 뺀 이름이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나직하고 고저 없는 음성이 잠잠해서 더 두렵다면.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준 연서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약간은 먼 그곳까지 더듬더듬 기어갔다. 태헌의 표정을 살피며 혹시 그가 마음을 바꿔 내치면 어쩌나 그런 걱정까지 하면서.

연서는 결국 태헌의 애인이 되어 언제 끝이 날지 마음을 졸이는 시한부 행복을 택했다. 그럼 이제 태헌을 탐낼 기회를 놓치지 않는 편이 현명한 게 아닐까.

끌림을 넘어선 마음이 그를 애타게 원하고 있다고, 그러니 이렇게 바닥을 기어서라도 그가 주는 기회를 잡고 싶은 거라고.

연서는 감히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이 이토록 커져 버렸단 사실을 차분히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눈치 빠른 태헌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아차릴 게 뻔했다. 숨길 수 있을 것 같진 같았다.

우태헌에게 반한 벌이겠지. 주제도 모르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사람을 바란 죗값이겠지.

연서는 언젠가 당도할 끝을 애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현재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덧 태헌의 발치에 도착한 연서는 허리를 세워 무릎을 꿇듯이 앉았다.

“더 가까이 와.”

연서가 조금 더 그의 다리 사이까지 들어가 앉았다.

“더.”

“…더?”

그의 허벅지를 잡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가까워져 있기에 되물었다. 태헌이 손을 뻗어 생수를 열었다.

“술 취한 사람 붙잡고 할 순 없지 않아.”

태헌이 연서의 여린 턱을 가볍게 쥐었다. 연서는 입 안으로 밀려드는 물을 흘리지 않으려 열심히 물을 삼켰다.

“하아…….”

결국 넘쳐버린 물이 턱을 타고 가슴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감각에 몸을 떨었다.

드레스 위로 드러난 뽀얀 살 무덤에 물방울이 고였다. 태헌이 생수병을 내려놓은 뒤 작은 웅덩이로 시선을 내렸다.

“의사를 부르는 건. 그러면 좀 낫겠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까보다 나아졌어요.”

술과 약에 취한 건 몸이었지 정신이 아니었다.

“그 새끼한테 쫓기는 얼굴로 뭘 하겠다고.”

“놀라서 그래요. 괜찮아요. 지금 해요.”

일이 이렇게 흐르자 한시라도 빨리 태헌과의 관계를 확정 짓고 싶었다.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가 원하는 걸 내어주어야 했다. 우습게도 주고받는 관계이니, 이게 맞았다.

“물어본 적 있어? 없어 보이긴 하다만.”

물어?

“네?”

“없어도 해 봐.”

태헌이 고개를 내렸다. 그제야 연서는 그 의미를 이해하고 얼어붙었다.

“그, 그걸요?”

태헌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느긋하게 암레스트에 올린 팔을 세워 관자놀이를 얹었다. 기다려 주겠단 뜻 같았다. 적어도 직접 파스너를 내려줬으면 했으나 태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잘 못할 것 같은데…….”

“어. 기대 안 해.”

“초, 초심자에게 너무 무리한 걸 바라시네요. 저는 방금 큰일을 당할 뻔하기도 했고…….”

“지금 하자고 조른 게 누구야.”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연서가 입을 다물고 허리를 세웠다. 단단한 허벅지가 손끝에 스쳤다. 그것만으로 긴장감이 머리끝까지 들이쳤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파스너를 내렸다. 얌전히 수납된 셔츠 끝을 끌어 올리는 두 손에 땀이 차올랐다.

꽉 짜인 복근을 긁어 대는 여러 방의 헛손질 끝에 속옷 밴드에 손가락을 걸칠 수 있었다.

이런 쪽으로 경험은 없었으나 살다 보면 웬만한 지식은 갖추게 된다. 노골적인 농담과 무용담을 즐겨 하던 전 직장의 동료에게서 습득한 지식이 이런 때 도움이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연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간호사란 직업 덕에 사람의 나체에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그러니 태헌의 몸에도 덤덤해야 옳은 건데.

반쯤 부푼 열기를 마주한 연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되는 걸까.

티끌만 한 자신감이 소멸했다.

“끝에만 해봐. 제대로 하란 소리 아니니까.”

“…….”

“역겨운 거면 말을 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면.”

“커, 서요.”

어째 그게 움직인 것 같았다. 시간을 지체하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연서가 조심히 고개를 내렸다.

생경한 감촉을 조심히 받아들이며 조금씩 조금씩 적응해나갔다.

낮은 한숨을 쉰 태헌이 손을 뻗어 연서의 머리핀을 잡아뺐다. 간단히 고정되어 있던 머리가 풀리며 샴푸 향이 나른하게 번졌다.

아, 그거 다이아몬드인데.

연서가 카펫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장식을 곁눈질하자, 그가 연서의 뺨을 밀어 정면을 보게 했다.

“되게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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