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혹시 누가 들었을까.
“이걸 왜…….”
연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클러치가 연서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늘 이곳에 묵을 거야.”
연서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대자, 태헌이 무심한 투로 말했다.
“2013호. 결판 나거든 와. 나지 않아도 오고. 협상을 다시 하고 싶어져도 와.”
오라는 그 말에 바보처럼 가슴이 뛰었다.
연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순간 뒤쪽에서 승빈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어? 태헌이도 있었네?”
아찔한 삼자대면이 될 예정인 걸까. 연서가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자, 승빈이 웃으며 연서의 어깨를 감쌌다.
“이거 무알콜인데 취한 거야?”
연서의 손에서 샴페인 잔을 거둬간 승빈이 그녀의 어깨를 도닥였다.
“이제 조용한 데 가서 마시자. 영감들한테 시달렸더니 머리가 다 아프다.”
“네. 얘기 나누러 가요.”
“그래, 연서 오늘 너무 예뻐서 나만 봐야겠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 승빈이 태헌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승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태헌이 너는, 손님들 상대해야지. 그리고 네가 할머니한테 말 좀 전해드릴래? 연서 오늘 호텔에서 자고 간다고.”
미친 거 아니야? 연서가 경악에 차 승빈을 바라보자 태헌이 느리게 말했다.
“외박, 좋지.”
그의 발음이 입맞춤할 때처럼 끈적하게 굴러갔다. 태헌의 동공에 이채가 머물렀다가 떠나는 걸 연서는 놓치지 않았다. 등이 서늘해졌다.
“이사님, 저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연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승빈이 싱긋 웃으며 연서의 손목을 당겼다. 얇은 손목은 가여울 정도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승빈은 걸음이 빨랐다. 연서는 앞서가는 그의 걸음을 맞추려 종종걸음으로 이동했다.
순간 발목이 삐끗해 주춤했으나 콧노래까지 부르는 승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승빈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혹시 태헌이가 나에 대해 뭐라고 그래?”
“찔리는 게 많으셔서 묻는 건가요?”
승빈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데려간 곳은 라운지 한편의 VIP 바였다. 별실로, 사방이 막혀 있었다.
연서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내내 생각했다.
승빈을 한시라도 빨리 정리해야 했다. 추후 일어날 일이 두렵지만, 이렇게 끌려다니는 것이야말로 강 여사에게 못 할 짓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던 말, 원망하지 않겠단 강 여사의 다정한 배려는 결정에 큰 힘이 됐다. 연서가 제법 단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 부장님.”
“그렇게 비장하게 부르지 말고 술부터 한잔하고 천천히 얘기 나누자. 들어보면 너도 좋을 거야.”
또 무슨 얘길 하려고 밑밥을 까실까. 유산 때문에 질척거리는 주제에.
설마 유산을 반반 나눠 가지자는 뭐 그런 재벌 3세치고 추접스러운 제안을 하는 건 아니겠지.
직원이 들어와 술을 세팅하는 동안 잠시 말이 끊겼다. 느물거리며 웃은 승빈이 잔에 술을 채웠다.
“자. 별로 안 독한 거야.”
연서는 망설이다가 승빈이 권하는 술잔을 받았다. 그리고 그대로 쭉 들이켰다. 탁. 빈 술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독한 기운이 목 안쪽으로 몰려들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편이라 급하게 마시면 꼭 탈이 났다. 연서는 주먹을 무릎 위에 두고 승빈을 똑바로 주시했다.
“생각을 해봤어요.”
“그 생각이 나한테 좋은 쪽이었으면 해.”
승빈이 웃는 얼굴로 대꾸하며 빈 잔에 다시금 술을 채웠다.
“제가 우 상무님 지시로 벌인 짓, 선생님께 말씀하셔도 돼요.”
“자포자기한 거야?”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치 없이 상무님께 일러바쳤고 그게 많은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니까요.”
“연서야, 진심이야?”
“우 부장님이 안 하시면 제가 말씀드릴 거예요.”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태헌 때문이야? 태헌이가 네 죄를 스스로 밝히고 떠나라, 아니면 죗값을 받아라 그래?”
승빈의 눈엔 이렇게 비칠 수도 있겠구나. 하긴 이 사실을 태헌에게 들켰다면 그의 상응하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
우태헌은 피도 눈물도 없이 매정한 사람이니까.
“그건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저는 우 부장님과 연애, 약혼. 그런 거 할 생각 없습니다.”
“할머니가 충격받으시는 건 괜찮다 이거야?”
남들에 비해 기구한 인생을 살다 보니 자기 연민에 취할 새가 없었다. 항상 촉박한 기한을 두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영향으로 연서에겐 나름대로 선과 기준이 존재했다.
도를 넘지 않기.
이번 일도 경험에 비추어 도덕과 양심, 효율과 최선을 취합해 결정했다. 그리고 자백하는 편이 강 여사를 위한 길이란 판단이 내려졌다.
어쩌면 멍청하게 보일 순 있겠지만, 가장 현명한 결론이기도 했다.
“네.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유산 문제까지 휘말리면 더 면목 없어질 것 같아요.”
“유산?”
되묻는 승빈의 낯빛에서 낭패감이 스쳤다. 미미한 균열을 연서는 놓치지 않았다.
정말 유산 때문이었구나.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돈 때문이었어.
어떠한 실망감이나 슬픔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승빈의 목적을 알게 되어 속이 시원하달까.
강 여사가 연서에게 품은 호의 가득한 따듯한 정은 누군가에게 칼자루가 되었다. 결국 그 흉기가 향한 곳은 강 여사의 심장이었다.
연서는 칼끝을 제게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강 여사를 지키고 싶었다.
“유산 받고 싶으시면 저한테 이러실 게 아니라, 선생님께 잘 보이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저는 죄를 밝히고 벌 받을게요.”
강 여사가 충격받을 게 염려되어 입을 닫고 잘못을 숨긴 건 자신을 보호하려던 비겁한 변명에 불과했다.
강 여사의 눈빛이 모질게 변할까 무서워서, 그녀가 실망할까 두려워서 잘못을 꼭꼭 숨긴 것과 다름없었다.
자칫 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 목이 메왔다. 이제 마른 줄만 알았는데 눈물이 흘렀다.
두 뺨이 뜨겁다는 걸, 승빈이 가슴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고서야 깨달았다. 연서가 의자에 손을 짚었다.
“아…….”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뒤이어 급격한 어지러움이 찾아들었다. 연서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었다. 왜 이러지.
“괜찮아 그냥 좀 자는 거야. 괜찮아.”
승빈의 말이 웅웅. 멀리서 들려왔다.
“오늘 나랑 있자. 연서도 하고 나면 내가 좋아질 거야.”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
눈을 뜨자 지독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연서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꺼풀을 껌뻑였다.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는…….”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 푹신한 침대와 새하얀 시트, 낯선 공간은 호텔 방인 것 같았다.
다만 이곳까지 온 기억이 없었다. 술을 마신 뒤 쓰러졌고 옮겨진 것 같은데…….
어디선가 어렴풋이 물소리가 들렸다. 낮은 콧노래가 이중으로 울려 퍼졌다.
우승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서가 아무리 술에 약하다곤 하지만, 단 한 잔으로 정신을 잃은 적은 없었다.
설마 술에 뭘 넣은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한이 밀려왔다. 쓰러지기 전 들었던 목소리가 생생했다.
우선 여길 벗어나야 해. 승빈이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그러나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질 않았다. 몸을 추스르려 애써도 팔다리에 추가 매달린 것처럼 축축 늘어졌다.
“흐윽…!”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몸이 미끄러졌다. 무릎을 꿇은 채 엎드린 연서는 앓는 소리를 삼키며 바닥에 떨어진 클러치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뚝. 욕실에서 물소리가 끊겼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연서가 완강히 거부해도 승빈은 원하는 대로 일을 저지를 인간이었다.
핸드폰을 찾아야 했다. 마음은 급한데 클러치까지 손이 닿질 않았다. 서랍을 여닫는 소리가 욕실에서 들려오자, 어물쩍거릴 시간 없었다.
연서는 되는 대로 클러치 밖으로 빠져나온 카드키를 쥐었다.
태헌이 준 호텔 키였다. 연서는 그것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일어났다.
입구를 향해 힘껏 뛰다가 풀썩 쓰러졌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이를 악물고 입구로 향했다.
문이 코앞인데 손끝이 달달 떨려 문고리가 자꾸만 손안에서 미끄러졌다. 등이 축축해지고 눈앞이 뿌예졌다.
바보같이, 지금 울면 안 돼.
“연서야, 연서야?”
침실 쪽에서 승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빈이 욕실에서 나온 거다.
“연서야, 혹시 거기 있니?”
겨우 잠금장치를 풀어낸 연서는 문을 힘껏 당겼다.
“흐윽……!”
복도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하얗게 질린 뺨으로 달라붙었다. 연서는 곧장 고개를 돌려 살펴 호수를 확인했다.
2003호.
연서는 재빨리 주변의 방 호수를 확인해 가야 할 방향을 인지했다. 부드러운 카펫을 맨발로 짓이기며 뛰기 시작했다.
같은 층에 있는 태헌의 방으로 향해야 한단 생각뿐이었다. 카드키가 있으니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면 좋겠지만 호텔 직원도 믿을 수 없었다. 승빈의 말 몇 마디면 고이 그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남았다.
끝에 있는 태헌의 객실을 향해 복도의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였다.
“연서야! 연서야!”
승빈의 목소리가 복도 저쪽에서 들려왔다. 연서는 벽을 짚고 부지런히 뛰었다. 어느덧 태헌의 객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3호. 마음이 급해 직접 문을 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뒤늦게 카드키를 인식하려 손을 올렸을 때였다 달칵, 안에서 문이 열렸다.
“흐윽…….”
연서가 눈물을 터뜨렸다. 눈물에 가려 문을 연 남자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으나 익숙한 향으로 그가 태헌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사님, 저, 흐윽! 저…!”
뒤에서 연서야,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연서가 눈물을 터뜨렸다.
“들어가게, 흐윽…….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