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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31화 (31/85)
  •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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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서가 고른 블랙의 머메이드 드레스는 한쪽 허벅지가 드러난 튜브톱 형식이었다. 디자인은 차분했으나 노출이 적지 않아 과감함과 단정함을 동시에 갖춘 느낌으로, 피부가 하얀 연서와 잘 어울렸다.

    연서는 틀어 올린 머리가 어색해 이리저리 거울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쭉 뻗은 목선이 어쩐지 부끄러워 목덜미를 쓸려다가 시은에게 손이 붙들렸다.

    “언니? 이제부터 자기 몸 더듬는 거 금지. 절대 만지지 마요.”

    “그럴게요.”

    연서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숍에서 나와 주차장에 도착하자, 시은이 턱짓으로 검정 세단을 가리켰다.

    “언니는 저거 타요. 이제 알아서 가는 걸로?”

    말을 마친 시은이 웬 남자에게로 뛰다시피 달려갔다.

    “오빠! 오래 기다렸어?”

    “시은아 그러다 넘어져.”

    남자친구인지 달려오는 시은의 손을 붙잡고 조수석에 그녀를 태웠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시은이 그녀답기도, 귀엽기도 해 웃음이 터졌다.

    연서도 차에 타라는 듯 빵, 하고 소리가 났다. 연서는 몸을 돌려 대기 중인 차로 향했다. 높은 구두가 익숙하지 않아 조심히 걸어야 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네.”

    연서는 재빠르게 스쳐지는 회색 도시를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종알대던 시은이 사라지자 현실로 돌아오는 게 빨랐다.

    대기업의 창립기념 파티에 초대된 가난하고 빚이 많은 일개 간병인.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도착했다는 운전기사의 말에 연서는 클러치를 움켜쥐었다. 내려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도망갈까.

    순간 뒷좌석 문이 덜컥, 열렸다. 짙은 남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활짝 웃었다. 승빈이었다. 멀끔한 차림의 얼굴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이야…….”

    승빈이 한동안 입을 벌린 채 연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서의 붉은 입술이 꽉 다물렸다.

    “왜 이렇게 예쁘게 했어. 아, 이렇게까지 예쁠 줄은 몰랐는데……. 미치겠네.”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불러내면 어떻게 해요? 전화도 안 받고…….”

    “바빴거든. 일단 내리자.”

    승빈이 싱긋 웃더니 연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높은 구두 때문에 휘청이자, 가느다란 허리에 승빈의 팔이 찰싹 감겼다.

    “아 진짜 왜 이렇게 예쁘지?”

    “놔주세요. 혼자 설 수 있어요.”

    “싫어. 이러고 갈 거야.”

    승빈이 연서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움직였다. 거대한 호텔 입구는 유달리 분주해 보였다. 연서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것 같아요. 우리 다음에 얘기…….”

    “더 미루기 힘든 얘기잖아, 그냥 가.”

    그건 맞는 말이었다. 오늘 쏟아부은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그런데 다리가 너무 드러난다. 연서 다리는 나만 보고 싶은데.”

    헛소리를 지껄이는 승빈의 주둥이를 쳐버리고 싶단 생각을 하며 연서는 앞을 주시했다.

    “그럼 이것 좀 놓고 걸어요.”

    “그럼 손잡을까?”

    “놔달라고요.”

    허리에 닿은 승빈의 팔을 밀어내자, 사람들이 이곳을 흘긋거리는 것 같았다. 승빈이 강제로 팔짱을 끼게 하는 걸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이런 곳에서 승빈과 다퉜다간 일이 더 꼬일 게 뻔했다. 강 여사에게 해가 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소문이란 건 대개 과장되고 살이 붙어 돌아오는 법이니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선생님이 부장님과 문제 생긴 걸 아셨어요.”

    “그래?”

    “이 이상 소란 피우기 싫어서 따르는 것뿐이에요. 얘기할 시간 있는 거 확실한 거죠?”

    “그래그래, 알았어.”

    승빈이 웃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연서의 머리에 입을 맞춘 승빈이 파티 홀로 향했다. 연서는 화장한 것도 잊고 이마를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생각보다 큰 규모의 행사였다. 웅장한 클래식, 눈부신 조명, 그리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인사들. 모든 것이 낯설고 호화로웠다.

    겁도 났지만 VIP 병동에서 일할 때 보았던 국빈급 인사들까지 떠올려보면 그리 다른 광경도 아닐 거라고, 긴장한 속내를 다독였다.

    굳은 연서를 이끌어 홀의 한구석으로 이동하기까지, 승빈은 수많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연서와는 달리 태연하고 느긋한 자태로.

    종종 연서를 향해 궁금증이 담긴 시선을 보내올 때면 승빈이 대신 나서서 연서를 소개했다. 다행히 승빈의 머리가 아주 돌아버린 건 아닌지, 연서를 지인이란 말로 포장해 주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화법을 구사했다. 당연한 거겠지만, 승빈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란 게 실감이 났다.

    태헌도 마찬가지려나. 이런 자리에서 중심이 될 태헌을 어렵지 않게 않게 그려볼 수 있었다.

    푸른 드레스 차림의 정 비서가 다가와 연서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정 비서는 곧장 승빈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야 미안한데 잠깐만 여기 있어. 금방 올게.”

    어색한 장소보다 승빈과 함께 잇는 게 더 견디기 힘들었기에 그가 자리를 비워주는 편이 좋았다. 연서의 손에 샴페인 한잔을 쥐여준 그가 홀연히 사라졌다.

    “하아…….”

    속이 비치는 샴페인을 내려다보며 연서가 한숨 쉬었다. 아까부터 몸이 좋질 않았다.

    연서는 아까부터 열이 오르는 손등으로 살짝 짚었다. 어제 비를 맞아서 그런지 아침부터 목이 따끔따끔했다. 약을 먹긴 했는데 약발이 떨어진 것 같았다.

    오늘 하루 푹 쉬었으면 괜찮았을까. 이런 가정이 다 무슨 소용이야. 난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연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몸에 달라붙은 낯선 향수 냄새 때문에 속이 메슥거렸다.

    속을 달랠 겸 손에 들린 옅은 레몬색 샴페인을 맛보았다. 달콤한 무알코올 샴페인이 혀끝에서 껄끄럽게 감돌았다.

    친분을 과시하는 자리 같았다. 소개받고 소개를 하고, 안부를 전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다지는 자리. 외딴섬처럼 동떨어진 연서를 흘긋흘긋 보는 사람은 있어도 호의를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크게 바뀌었다. 관심이 한곳으로 몰리는 기분이 들어 연서는 샴페인 잔에 입술을 묻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선봉에 선 장수처럼 홀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태헌을 발견하고 말았다.

    각진 어깨와 위협적인 키, 그런데도 둔하지 않고 날렵한 맹수 같은 자태. 다수가 선망할 만한 독보적인 외향이 눈에 들어왔다.

    꺼멓게 죽어가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태헌이었다. 피가 도는 것처럼 가슴께가 뜨거워졌다. 생물학적인 반응에 당황하며 샴페인 잔을 입술에서 뗐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태헌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어도 눈에 띄었다.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으련만.

    사실은 그의 모든 것이, 나는 끌려서…….

    태헌은 이쪽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단 걸 깨달은 연서는 그대로 굳었다.

    가늘어진 태헌의 시선에 갇힌 연서는 중죄인이 된 것 같았다. 추궁 어린 딱딱한 표정이 밤새 다잡지 못한 마음을 다시 흔들어놓았다.

    어젯밤, 두 사람은 관계의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했고 의견은 대립했다. 태헌은 6개월을 거론하며 끝을 내는 것도 그라고 못 박았다.

    그 말을 듣자 벌써 그에게 차인 것처럼 발밑이 아득해졌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아픈 거면, 그 끝은 말해 입 아팠다.

    연서는 마주친 눈을 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속을 앓았다. 라온 기획의 창립기념일이라고 해서 태헌과 관련 없을 거라 여겼던 자신이 바보였다.

    세원 그룹 산하에 딸린 계열사들이 거미줄 같은 구조로 서로 얽히고 얽혔단 걸 간과한 것이다. 아까 호텔 입구에서 도망갔어야 했다. 태헌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줄 알았더라면 승빈과의 이야기를 미루는 게 나았는데.

    태헌이 이쪽을 향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건 연서의 착각이 아니었다.

    태헌을 둘러싼 사람들이 그의 걸음에 맞추어 함께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에 보았던 신 비서는 멀찌감치 떨어져 태헌을 따라오고 있었다.

    태헌은 웃음과 친절로 무장한 사람들의 친절한 인사말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연서에 꽂혀 있었다. 태헌은 분명 힐난하고 있었다.

    결국 도망치듯 연서가 고개를 내렸다. 이대로 지나가 주길 바라는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태헌의 구두가 내리깐 연서의 시선 안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간병인의 스펙트럼이 꽤 넓네.”

    “할머님이 파이팅해 주시긴 했어요.”

    연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행 중 다행히 태헌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저 멀리 물러난 후였다.

    그러나 태헌이 얘기를 나누는 여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시선이 적진 않았다. 혼자 서 있을 땐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는데, 태헌이 말을 섞었단 이유로 화제의 인물이 될 가망성이 생겼다.

    “저 여기 결판 지으러 온 거예요.”

    “전투를 왜 남의 파티에서 할까. 그것도 이런 모습으로.”

    차림새를 지적하는 말이 따끔하게 연서를 관통했다. 한껏 가꾼 모습이 이렇게 수치스럽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저도 싫어요. 조이고 치렁치렁하고 움직일 때마다 보일 것 같아서 불편해요.”

    태헌이 불결한 것을 보듯 연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 내렸다.

    “그래 보이네. 너랑 안 어울려.”

    “시비 걸러 온 거예요?”

    태헌이 눈썹을 슬쩍 틀었다.

    “우승빈이랑 결판이 지으면 나랑 뭘 할까 기대는 좀 되네.”

    그에게 끌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속이 아프고 뜨거웠다.

    뱉어내고 싶은데 어딘가에 꽉 걸려 토해지질 않았다. 이 감정을 무어라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아직은 아니라고 그렇게 부단히도 세뇌 중이었다.

    “사람 편에 옷 보낼 테니 바꿔 입어. 천박하게 굴지 마.”

    태헌이 아픈 말을 할 때마다 유독 심장이 아린 것도 그저 그가 너무 매섭기 때문이라고. 태헌에게 그 정돈 된다고 했을 때 기대하고 말았던 무지함은 그저 미련함이라고, 애써 쭉정이처럼 고개를 내미는 마음을 억눌렀다.

    연서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싫어요. 이사님은 보고나 기다려 주세요.”

    “보고?”

    “잊으셨나 본데, 저는 이중 첩자잖아요.”

    “이만 꺼져달란 말인가?”

    그의 말이 맞았다. 초라한 모습을 더는 보여주기 싫었다. 태헌이 불쑥 팔을 뻗어 연서의 클러치를 가져갔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꺼낸 카드를 연서의 클러치 안에 넣고 닿았다.

    “호텔 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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