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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30화 (30/85)
  • 30화

    *

    하루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온하게 시작되었다. 연서가 눈을 떴을 때, 승빈은 용인 집에 없었다.

    윤해의 말에 의하면 회사에 일이 생겨 새벽에 집을 나섰다고 했다.

    승빈에게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으나 연서는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승빈의 손에 돌아온 가방마저 꼴 보기 싫어 한구석에 처박았다.

    굳이 신경을 쏟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승빈과 관련한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어제 우 상무가 다녀가기도 했고, 강 여사와 계속 함께 있지 못했으므로 우 상무에게 하는 보고를 건너뛰었는데 달리 연락이 오진 않았다.

    연서는 강 여사의 아침을 손수 챙겨 침대맡으로 향했다. 윤해도 함께 식사를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묽은 미음을 몇 번 넘긴 강 여사가 그릇을 물렸다. 조금 더 드셨으면 좋겠는데…….

    부쩍 야윈 강 여사가 걱정이었으나 혹여 스트레스를 받으실까 말을 아꼈다. 연서가 강 여사의 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물 좀 더 드릴까요?”

    “됐다. 그건 그렇고 연서야.”

    윤해가 식기를 챙겨 밖으로 나가자, 강 여사가 연서를 불렀다.

    “네, 선생님.”

    “어제 그게 사실인 게야?”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제의 소란이 강 여사의 귀에도 들어갔을까 연서가 긴장한 채 물었다. 승빈 쪽이든 태헌 쪽이든 연서가 얽혀 있으니 꾸중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연서 네가 승빈이랑 만난다는 말이 들리던데, 이 할미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아서 그래.”

    어제 식사 자리에서 우 상무가 폭탄을 터뜨렸으니, 그 일이 강 여사의 귀에 들어가는 게 당연했다.

    “죄송합니다.”

    연서가 송구함에 고개를 숙였다. 은혜를 불충으로 갚고 있었다.

    “네가 무엇이 죄송해, 할미가 처신을 못 해서 괜한 불똥이 튀었구나.”

    “아니에요. 왜 선생님께서 사과하세요.”

    연서의 눈가가 빨개졌다.

    “예뻐하는 티를 너무 내는 게 아니었다. 늙은이 주책에 우리 연서가 시달리게 되었어.”

    강 여사의 낯에 서글픈 그림자를 드리워 연서는 목이 메었다.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선생님 만나 뵌 게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인데, 주책이라니요. 더 예뻐해 주세요.”

    “우리 연서 말도 이리 예쁘게 하누.”

    한숨을 흘리며 강 여사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바람에 떠밀려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꼭 연서 같았다. 심약하고 기댈 곳 없이 주변에 휩쓸리는 가련한 처지.

    “아마 유산 때문일 게다. 승빈이 녀석이 마음을 굳히고 연서 너를 괴롭히는 이유 말이다.”

    “유산이요?”

    “그래, 승빈이가 욕심이 많은 아이다. 연서 너랑 연을 맺으면 유산을 떼줄 걸 알고 그러는 게야.”

    유산이라니. 연서가 가당치 않은 말에 헛숨을 터뜨렸다. 그러곤 옅게 웃었다.

    “유산과 저와 연을 맺는 일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럴까요.”

    “연서 덕분에 한 번 목숨을 구하지 않았어? 그래서 이리 오래 천수를 누리고 있지 않누. 마음 같아선 재산의 반은 우리 연서 주고 싶다.”

    “…….”

    “그 마음이 독이 되었어. 연서한테 한 몫 크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을 알고 손주 놈이 눈독을 들이는 게야.”

    “저한테 왜 그런 걸 주려고 하세요. 그러지 마세요.”

    “연서야, 할미는 그동안 너무 가진 것을 쥐고만 살았다. 베풀고 싶어도 이제 시간이 없어.”

    연서가 이를 사리물고 흐느낌을 참았다. 이제야 승빈이 비정상적으로 자신을 내모는 게 이해가 되었다. 유산 때문이었어.

    그래서 그렇게 집요하게…….

    설마 태헌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눈앞이 뿌예졌다. 결국 그런 거였을까.

    성욕과 끌림은 허울 좋은 구실이었을까. 연거푸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연서는 승빈이 녀석한테 마음이 없는 걸 이 할미가 알아. 이렇게 억지 부릴 일도 아니지.”

    “심려 끼쳐 죄송해요. 우 부장님과는 트러블이 있던 건 사실이에요. 정리할 거예요. 선생님 걱정 안 하시게 잘 정리할게요.”

    “할미가 힘이 없어서 미안하다. 연서를 지켜줘야 하는데……. 괜히 우 씨 집안싸움에 휘말리게 했어.”

    연서는 아니라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 마세요. 제가, 제가… 똑똑하지 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태헌이랑은 어떻게 되는 게야?”

    갑자기 태헌의 얘기를 꺼내 연서가 영문을 모르겠단 낯을 했다.

    “이사님이요…?”

    “연서 마음이 그쪽에 있지 않니.”

    강 여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약간 두려워졌다. 연서가 대답하지 못하자 강 여사가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뭐든 연서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할미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고.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터이니.”

    잘못한 게 많은 연서는 차마 그녀의 호의를 누리겠단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선생님께 제가 큰 잘못을 했어요.”

    “할미는 승빈이도 태헌이도, 연서도. 아무도 원망 안 한다. 전부 어른 잘못인 게야.”

    연서는 엉엉 울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용서의 말을 들은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죄스러워서 이곳에 있는 것조차 그녀를 기만하는 짓인 것 같았다.

    “저 사실…….”

    똑똑똑.

    빠른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대답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시은이었다.

    시은은 아침부터 사람이 든 자리를 티 냈다. 아침 식사로 국과 밥은 무겁다며, 반찬 투정을 해 복희 이모님을 당황하게 했다.

    기어코 수플레와 크림치즈, 커피를 마신 그녀는 러닝머신을 뛰겠다고 선언해 영례 이모님과 연서를 창고로 내몰았다.

    두 사람은 끙끙거리며 러닝머신을 날랐고 그 후에는 드링크가 없다며 경호팀장을 시내 백화점으로 보냈다.

    연서는 그런 시은이 어이없어 속으로 몇 번 웃었다. 밉기보단 귀엽고 그랬다.

    죽은 듯 조용했던 용인 집에 활기가 드는 게 좋았다. 강 여사에게 그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었으면 해서.

    그러나 시은은 사사건건 연서를 불러 이것저것 지시하기 바빴다. 타인을 부리는 게 익숙한 거겠지.

    “언니 여기 있었어요?”

    “네. 할 말 있어요?”

    “오늘 라온 기획 창립기념 파티인 거 알죠?”

    연서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몰랐단 의사를 밝혔다.

    “승빈 오빠가 언니 데려오래요. 빨리 출발해요. 시간 없어.”

    “네?”

    “할머니, 언니 좀 빌려 갈게요.”

    당황한 연서의 등을 강 여사가 두드려주었다.

    “연서야, 사내놈들 기 좀 꺾어둬라.”

    “저는 선생님 곁에……!”

    “가 봐. 할미 오늘 안 죽어.”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제발.”

    연서가 갈 자리가 아니었다. 난데없고 갑작스러웠으며 당황스러웠다. 특히 승빈이 불렀다는 대목이 거부감을 크게 일으켰다.

    연서가 울상을 짓자 강 여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오랜만에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라 연서가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저 그래도 여기 있고 싶은데…….”

    “승빈이랑 정리도 해. 무서워하지 말아라. 이 할미가 든든히 버티고 있는 한 우리 연서 아무도 못 건드린다. 손주 놈이라도 어림없어.”

    강 여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버틸 도리가 없었다. 연서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용인 집에서 끌려 나온 연서는 온종일 시은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간판조차 적혀있지 않는 뷰티숍으로 입성하자, 스텝들은 연서가 주눅들 틈을 주지 않고 이리로, 저리로 안내했다.

    마사지부터 손톱 발톱, 헤어, 메이크업까지. 물 흐르듯 일련의 과정에 휩쓸렸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연서의 옆엔 시은이 늘 함께였다. 그녀는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내용은 대체로 밉지 않은 귀여운 타박이었다.

    “세상에, 손톱 관리도 안 하고 살아요?”

    “이 언니, 머리끝부터 다듬어 주세요. 뭐 길기만 하면 다 예쁜 줄 알아?”

    “미친. 속옷 취향이 그게 뭐예요?”

    속옷은 그래도 강 여사가 골라준 것인데…….

    아유크레이지 어쩌고 할 땐 연서도 웃음이 터졌다.

    “고루해! 그 드레스 내려놔요!”

    “C컵은 조금 아쉬운데…. 수술할 생각은 없어요? 여기 뽕 두 개 추가! 승빈 오빠 글래머만 만나는데 그새 취향 바뀌었나?”

    대충 이런 식이었다.

    그렇게 연서는 시은이 골라주는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었다. 괴리감이 느껴지는 파티에 가기 위해 공들이는 시간이 아깝게만 여겨졌으나 달리 도망갈 길이 없었다.

    스텝들도 열의 넘쳤다. 조금 전과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연서에게 수고를 아끼지 않고 성의를 다했다.

    숍에 입성한 지 장장 6시간 정도가 흘렀다.

    레드 계열의 짧은 드레스를 입은 시은이 먼저 치장을 마무리했다. 그녀는 눈을 매섭게 뜨고 연서의 머리카락에 꽂힐 핀을 세심이 골랐다.

    “으음……. 좀 별론데. 신상 없어요?”

    그녀의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숍의 직원들이 긴장하는 게 보여 연서는 속으로 혀를 몇 번이나 찼는지 모른다.

    그만하란 눈치를 보냈으나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시은은 제멋대로였다. 그녀가 반짝이는 손톱 끝으로 트레이 위의 머리핀 하나를 가리켰다.

    “끝에 그거, 다이아?”

    “네. 맞습니다.”

    스텝이 머리핀 하나에 담긴 보석 이름과 디자이너의 이력을 줄줄 읊고 나서야 시은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저기, 그건 너무 과한 것 같아요.”

    녹초가 된 연서가 손을 들어보았으나, 아무도 그녀의 의견에 귀 기울여주지 않아 울적하게 팔을 내려야만 했다.

    그래도 연서는 나름 아까부터 소극적이지만 확실하게 소견을 내세워 봤다.

    이건 너무 짧고, 이건 너무 파격적이고, 이건 너무 비싸서 싫다고 말을 해보긴 했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 눈에 띄지도 않을 손가락만 한 머리핀을 30분 넘게 고르는 시은을 당해낼 재간은 애초에 없었던 거다.

    “다 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실장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기도하듯 입을 막았다. 연서가 힘없이 물었다.

    “정말 끝난 건가요?”

    “네. 어떠세요?”

    확인받듯 묻자 시은이 흐음, 목을 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괜찮네요. 가슴이 조금 빈약해서 아쉽지만.”

    연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일에 처음으로 위축이 되었다.

    뭐, 탐스러운 시은의 굴곡에 비하면 보잘것없긴 했다. 그래도 한 번도 작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한 번 일어나 보시겠어요? 거울로 보시면 더 마음에 드실 거예요.”

    실장이 조심스레 권했다. 상념을 털어낸 연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빗발쳤다.

    하나 피곤한 그녀에겐 물 밖의 소리처럼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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