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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29화 (29/85)

29화

*

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가누었다.

“이상하지.”

연서에게 향하던 화가 꺾여 우 상무와 승빈에게로 향했다. 그 뒤엔 식사는커녕, 태헌은 오가는 대화조차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연서는 어떻게 했나. 우승빈에게 깔려 울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도와달란 말은 하지 않았다. 되레 신경 쓰지 말라며 성질을 부리곤 뛰쳐나갔다.

이쯤 되니 연서가 승빈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로만 보였다. 다시금 가득 채운 술이 태헌의 입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꺼먼 하늘에서 퍼붓는 비가 유리창을 정신없이 두들겼다.

밖으로 나간 건 확실한데, 들어오는 기척은 없었다. 산으로 기어들어 간 건 아니겠지. 그 정도로 머리가 없진 않을 거로 생각하다가도 산책코스에 훤한 연서를 떠올리면 영 불가능한 가정이 아닌 것 같아 헛숨이 터졌다.

겁 없이 산을 기어오르고도 남을 여자였다.

“씨발, 진짜.”

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태헌은 옷장을 열었다. 끈을 풀고 가운을 벗어 던졌다. 나체 위에 옷을 재빠르게 갖춰 입었다.

밖으로 나가자 문이 한 뼘 열린 승빈의 방에서 목소리가 들려 나왔다. 승빈은 그 지랄을 떨어놓고 태연하게 바이어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낯이 두꺼운 건, 우 상무보다 승빈이 한 수 위였다. 저 낯가죽을 언젠간 뜯어놔야지.

물론 연서에게 그렇게 해달란 부탁을 받아낸 뒤에.

태헌은 계단을 내려가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검은 빗물이 내리치는 바깥 풍경이 살벌했다.

연서가 혼자 몸으로 저곳으로 뛰쳐 든 게 이해되지 않는 것과 별개로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초조함이란 익숙지 않은 감정이 빗소리와 함께 뒤섞였다. 딱 5분만 기다렸다가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태헌의 인내심에 한계에 달했을 무렵, 현관이 열리고 자그마한 인영이 들어섰다. 물에 쫄딱 젖은 연서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몸에 달라붙은 빗물을 의미 없이 털어냈다.

“하아, 하….”

연서의 호흡이 유독 크게 울렸다. 태헌은 목 뒤가 간지러워져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선반을 열어 수건을 꺼내고, 몸을 닦은 뒤 머리카락이 흠뻑 빨아들인 빗물을 툭툭 눌러 닦는 모든 행동이 소리로 예민하게 감지되었다.

모든 감각이 연서에게 집중된 게 언제부터였더라.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가 기둥에 몸을 기대자, 살금살금 걸어들어오던 연서가 놀랐다.

“이사님……?”

“어딜 다녀오는 거야.”

“왜, 왜 그렇게 귀신처럼 서 계세요. 사람 놀라게.”

“이제 내가 만만하지?”

“세상의 쓴맛을 많이 봤더니 될 대로 되어라 싶은가 봐요. 버릇없었다면 죄송합니다.”

하나도 죄송하지 않은 투로, 빗물에서 수영하고 온 것처럼 처량한 모습으로 연서가 꿍얼댔다. 그 모습을 보니 내내 턱밑까지 물에 잠긴 것처럼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씩 개운해지고 있었다.

“왜 아직 안 주무셨어요?”

말을 돌리려 애쓰는 연서의 허술한 수는 태헌의 인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에 젖어 얇은 옷이 죄 달라붙은 연서의 모습은 동정심을 넘어 다른 감정까지 불러일으켰다. 태헌이 사납게 물었다.

“이딴 꼴이나 보여주려고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쳤어?”

“저도 번번이 우승빈 부장님과 사적으로 얽히지 않겠단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한데요, 그걸 제가 원했겠어요?”

“새롭게 당혹스럽네.”

“저도 할 만큼 했어요. 거기도 때리고 코도 밀치고…….”

애써 씩씩한 척하고 있지만, 연서는 바들바들 떨며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꼬리 말고 눈치나 보는 주제에 큰소리는.”

“눈치 본 거 아니에요.”

“그래, 아니어야지. 내 앞에서 다른 새끼를 겁내면 곤란한 거야.”

태헌은 인제 그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연서가 먼저 손 한 번만 내밀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도와달란 그 말 한마디만 해주면, 그의 것이 되겠단 신호면 태헌은 기꺼이 연서의 그늘이 되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내몰렸음에도 연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사람 이용해 먹는 데 도가 튼 태헌은 무력감마저 맛보는 중이었다

“아까 우 상무가 선수 쳤을 때 왜 아무 말 안 했어.”

“그럼 제가 뭐라고 해요? 그 자리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우태헌이랑 섹스하는 사이라고 했어야지. 그 뒤엔 내가 알아서 수습했을 거고.”

태헌이 무표정하게 진심을 담았다. 연서가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서 숨을 덜컥 들이켰다.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그럼 너도 지금쯤 편하게 잠이나 자고 있겠지. 이딴 모습으로 우승빈이 언제 또 들이닥칠까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전전긍긍하는 거 아니…….”

“자존심 세우는 것도 정도껏 해야 귀여워.”

“그럼, 제가 이사님께 도와달라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연서가 답을 아는 질문을 새삼 꺼냈다. 확인을 바란다면 되새겨주면 그만이었다.

“너와 몸을 섞겠지. 내가 원할 때마다.”

“그 후에는?”

“그 후?”

태헌이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지적당한 것처럼 되물었다. 항상 결말까지 머릿속에 그려두는 태헌이기에 잠시 허를 찔린 것처럼 머리가 먹통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머릿속을 정리해갔다. 연서와의 관계를 얼마나 이어가야 하나. 길면 여섯 달. 그 정도면 이 빌어먹을 감정도 해소하고, 우 상무가 들이미는 결혼 상대를 엿 먹이고 남을 시간이었다.

다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짜증스러웠다. 시작도 안 했으면 벌써 끝을 정해두려 하는 연서를 모질게 밀어붙이고 싶어졌다.

“왜. 나와 백년해로라도 하고 싶어?”

그 순간 연서의 다갈색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태헌이 알지 못했던 어떤 감정이 통과하는 찰나를 그가 발견했다.

이건 뭘까.

태헌이 한 발 더 다가가자, 연서가 움찔했다.

“막말로 이사님이 우리 관계에 질리시면 헤어지는 거잖아요.”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약간의 조소와 흥분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연서가 속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빌어먹을. 순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픈 낯간지러운 욕구를 느꼈다.

하긴 한연서를 만난 후부터 말이 안 되는 것투성이였다. 태헌이 조금 더 다가가자 연서가 끝내 시선을 피했다. 숨기고 있던 사탕을 들킨 아이처럼 움츠러든 모습이 이상했다.

태헌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저 우승빈을 잊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저 조그마한 머릿속으로 저울질하던 것이 나와의 끝이었나.

또한 겁먹은 대상이 우승빈이 아니라.

태헌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나였어?”

흐린 간접조명 아래서 연서의 동공을 가득 채운 건 태헌이었다. 그녀가 흔들려 하는 건 그래, 바로 태헌이었다.

태헌의 전신에 희열이 번졌다.

“설마 나랑 끝내는 게 두려워?”

“읏, 그런 거 아니에요.”

“너 들켰어.”

달게 속삭이는 말에 연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한연서, 묻잖아. 지금 나랑 끝낼 일을 걱정하고 있는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녀가 주춤거리고 재고 따지고 제 살길을 여러 번 두드려보는 겁쟁이란 건 알겠다. 그렇다면 태헌이 한 수 접어주면 해결이 빠르다.

거실에 내려와 그녀를 기다리는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태헌은 연서에 한해 물러진 인간이 되어 있었다.

“난 6개월 정도로 생각하는데, 넌 어때.”

바라는 바가 아니라는 듯 연서가 눈썹을 좁혔다. 축 처진 눈매가 강아지 같기도 하고, 청순해 빠져 남자의 음욕을 부추기는 성숙한 여인 같기도 했다.

“물론 협의 가능한 문제지.”

“기간을 정하면 뭐가 달라져요? 이사님 섹스 파트너로 있다가 사라지는 게, 지금 이 상황보다 나을 거란 보장이 없는걸요.”

“널 시궁창에서 건져 주겠다잖아. 네 빚, 불우한 환경 다시 태어나도 갖지 못할 것까지 쥐여준다는데 그게 어려워?”

“결국 스폰이잖아요. 아닌가요?”

연서가 옅게 웃었다.

“스폰?”

태헌이 열 오른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말하는 게 어떻게 들리는 줄 알아? 진짜 연애 놀음이라도 하고 싶어서 투정 부리는 거로 들려.”

“저는 도구처럼 이용되는 게 싫은 거예요.”

“왜 너만 이용된다고 생각할까. 내가 기꺼이 네 돈줄이 되어주겠다잖아. 신분 상승? 집? 차? 아니면 회사에 자리라도 만들어줄까? 임원 자리면 성에 차?”

태헌이 그답지 않게 격앙된 음성을 토해내자 연서의 눈이 뾰족해졌다.

“제가 이사님한테 그 정도나 되는 줄은 몰랐네요.”

“돼.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사람 여럿 죽이고 싶게 하지 말고.”

“이사님은 관계를 시작할 때 끝을 정해두고 만나는지 몰라도 저는 아니에요.”

“최소 6개월이야. 그 정도면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고도 남는 시간이야.”

“무슨 계약 연애해요?”

연서가 눈을 치뜨며 따졌다. 물을 잔뜩 머금어 촉촉하게 젖은 뺨이 싱그러웠다.

이런 순간에도 진동하는 연서의 향기를 취하려 코를 파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성을 거세한 갈망은 낯설고 불쾌한 감정이었고 그 원인인 연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끈 같아서, 태헌의 손아귀엔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선 연서가 필요했다.

“제가 원할 때, 제가 끝낼 수 있게 해주신다면…….”

“그건 안 될 말이지.”

지금에야 연서가 태헌에게 흔들리고 있다지만, 그녀가 먼저 질릴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한두 번 몸을 맞춘 뒤 그만하자 통보한다면 곤란했다. 태헌의 갈망은 고작 연서를 몇 번 안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연서를 보고 있으면 여러 방면으로 머리가 돌았다. 태헌을 이렇게까지 짜증 나고 신경 쓰이게 하는 생명체는 연서가 유일했다.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해소하기 전까지 연서를 놓아줄 수 없었다.

“끝은 내가 내.”

“그럼 협상 결렬이에요.”

연서가 턱을 부여잡은 태헌의 손목을 밀어냈다.

“봐주는 거 마지막이라고 했지. 우승빈보다 개새끼 되는 거, 나한테 어려운 일 아니야. 그러니까 그전에 네가 숙여.”

연서가 듣지 않겠다는 듯 방을 향해 걸어갔다.

한 줌밖에 안 되는 낭창한 허리가 티셔츠에 들러붙어 위태로웠다. 저 몸이 승빈에게 어떻게 감겼는지 생각하니 다른 식의 불쾌함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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