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
식사를 마친 우씨 일가가 차례로 집을 떠났다. 모두 바쁜 시간을 쪼개 강 여사와의 추억을 쌓기 위해 내려온 것이다.
남은 건 승빈과 태헌, 그리고 송현의 막내딸 시은뿐이었다. 시은은 미국 유학 중으로 잠시 귀국한 차였다. 강 여사의 건강이 나빠지자 한동안 국내에 머무르기로 했다고 들었다.
승빈은 2층 게스트룸에 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회사 일이 잘못되었는지 비서를 다그치고 여러 군데 통화를 하는 모습을 어렴풋이 봤을 뿐이다.
늦은 밤, 연서는 강 여사의 방에 놓아둘 수건을 챙겨 오는 길이었다. 흐린 등이 켜진 복도로 들어서다 강 여사의 방으로 향하던 태헌과 시은을 마주쳤다.
연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후엔 먼저 들어가시란 뜻으로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잠시 시선이 얽혔으나 태헌이 먼저 외면했다. 어젯밤 그렇게 오피스텔을 나간 후부터 지금껏 그와 말을 섞지 않았다.
잘된 일인데, 가습이 갑갑했다. 혹시 승빈의 일로 정이 떨어진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어야 하는데 왜 미련스럽게.
“저기요, 언니. 우리 중요한 얘기할 거니까……. 음, 그 누구라고 해야 하지? 승빈 오빠 여친?”
“한연서라고 합니다. 선생님 간병인이고요.”
연서가 차분하게 대꾸하자 시은이 팔짱을 끼더니 고민했다.
“그래요? 그럼 뭐라고 부를까? 언니? 한 선생?”
“언니 쪽이 편할 것 같아요.”
“어쨌든, 당분간 들어오지 마세요. 우리끼리 할머니랑 시간 보내고 싶으니까.”
시은의 태도는 발랄한 동시에 오만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였다. 연서가 담담히 대꾸했다.
“그럼 수건만 두고 나갈게요.”
“뭐야. 이 아줌마 말을 못 알아듣네.”
순간 유창한 영어로 말을 이어가던 시은이, 태헌에게 화난 투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대충 연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내용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태헌은 연서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시은이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연서를 불렀다.
“언니.”
“네.”
“승빈 오빠가 좀 잘해준다고 뭐라도 되는지 아나 본데, 승빈 오빠 거쳐 간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연서가 저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이는 시은을 바라보았다.
예쁘고 싱그러운 나이였다. 당찬 치기조차 귀여울 나이.
연서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시은이 조금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어, 어쨌든 수건은 이리 줘요. 내가 갖다 두지 뭐. 그리고 핫초코 한 잔만 가져다주세요.”
수건을 빼앗듯 가져간 시은이 태헌을 툭툭 건들며 물었다.
“오빠도 뭐 마실래?”
대꾸하지 않은 태헌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명백한 무시였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방문이 굳게 닫혔다. 연서는 막다른 길에 다다른 사람처럼 한동안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
상처받은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우씨 일가가 자신을 낮잡아 보는 것보다, 태헌의 싸늘한 눈빛이 더 아플 수 있단 걸 깨닫고 말았다. 결국 마음이 자라나고 자라나서 숨길 수 없게 된…….
“하…….”
연서는 복도에 혼자 남겨져 아린 숨을 흩었다. 언젠가 연기처럼 흩어질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형체가 뚜렷해지고 있었다. 무거워지고 있다.
“이게 뭐야.”
연서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눌러 담고 또 눌러 담으려 하는데, 왜 자꾸 삐져나와. 왜 이만큼이나 흔들려.
연서는 터덜터덜 2층으로 올라갔다. 승빈이 머무르는 2층은 가고 싶지 않지만, 선물 받은 핫초코를 그곳에 보관해둔 터라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연서야, 아직 안 잤니?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고 했어.”
젠장. 계단 끝에서 승빈이 웃고 있었다. 막다른 길에 내몰리니 극단적인 생각이 불쑥 치솟았다.
차라리 이대로 발을 헛디뎌 뒤로 구르면 어떨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연서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우 부장님, 저 우 부장님 싫다고 말씀드렸어요.”
“아직도 그 얘기야?”
“아까 가족분들 앞에서 왜 그러셨어요?”
지금은 그녀를 지켜보는 검은 숲 같은 눈동자도, 다른 이들도 없었다. 그러니 당당히 따질 수 있었다.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강 여사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에 핏줄들이 열 일 제쳐두고 달려온 자리였다.
설령 승빈과 그녀가 연인 사이라고 해도, 눈치 없이 관계를 공표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걸 우 상무와 승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일부러 노린 것이다.
“약혼이라니. 대체…!”
세원 그룹 장손 우승빈과 간호사 출신의 간병인 한연서의 조합이라니. 표면적으로도 지나치게 차이가 났다.
“계단 위험해. 올라와서 얘기하자.”
승빈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난간을 짚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연서가 당기는 힘에 딸려가 승빈의 품으로 쏟아졌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벗어나려 했으나 결박하듯 껴안는 힘을 이겨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놔요!”
“연서야, 조용히 해야지. 할머니 깨시겠다.”
“그럼 당신이 놓으면 되잖아!”
연서는 포기하지 않고 더 거세게 반항했다. 끔찍하게 싫었다.
그가 닿는 것도, 다정한 척 위선을 떠는 것도. 그리고 아무 말 못 하고 바보처럼 당해버린 스스로도.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태헌의 눈빛이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여린 가슴을 갉작였다.
더는 들킬 게 없어야 맞는데, 자꾸만 가난한 밑바닥을 그에게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승빈이 아까보다 더욱 원망스러운 거겠지.
연서가 몸부림치며 울분을 토해냈다.
“놔요. 진짜 죽여버릴 거야……!”
“연서야, 내가 다 미안해. 응?”
둔탁한 소리가 날 만큼 주먹을 휘둘렀으나 팔뚝을 얻어맞은 승빈은 타격이 없었다. 두 사람의 발이 얽혀 중심을 잃었다. 승빈이 떠밀리는 대로 주춤거리다 커다란 소파로 넘어졌다.
연서의 위로 승빈이 덮치듯 쏟아졌다. 그가 반항하는 그녀를 제압하려 두 손목을 고정했다.
“연서야, 그러다가 다쳐. 우리 말로 풀자.”
“개, 개소리하지 마!”
연서가 씨근덕거리며 무릎으로 승빈의 중심을 가격했다.
“윽……!”
승빈이 괴로워하는 사이 몸을 굴려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곧장 머리채가 잡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승빈이 거친 숨을 내쉬며 우악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한연서!”
“놔! 이 나쁜 새끼야!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왜 이러는 건데!”
“정말 몰라?”
그가 발버둥 치는 연서의 뒤에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껴안았다.
“내가 널 좋아해서잖아. 모른다고 하면 섭섭한데?”
다시금 소파로 끌려갈 것만 같아서 연서는 팔꿈치를 크게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승빈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윽……!”
연서는 그가 코를 감싸 쥔 틈을 타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동시에 계단 끝에 선 검은 인영을 보았다.
검은 숲처럼 을씨년스럽게 드리운 어둠 속에 태헌이 우뚝 솟아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도…….”
도와 달라 입을 열려던 연서가 입을 멈추었다.
도와달라고 하면? 그 뒤엔 어떻게 되는 거야?
태헌과 섹스하는 사이가 되는 걸까.
그리고 그가 남은 빚을 갚아주고?
재앙의 주체가 승빈에서 태헌으로 옮겨가는 것뿐이라고 이성이 소리쳤다. 넘치기 시작한 연서의 마음은 다른 문젯거리였다.
차라리 승빈과의 이런 추저분한 관계가, 협박에 못 이겨 발버둥 치는 관계가 나을 만큼 연서는 태헌과의 끝이 두려웠다.
“흑…….”
잇새를 꽉 물었으나 흐느낌을 막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신경 쓰지 마세요.”
“한연…….”
연서는 태헌을 지나 계단을 뛰쳐 내려갔다. 현관을 열고 나가 쏟아지는 빗물 속으로 투신했다.
차라리 폭우 속으로 휩쓸리고 싶었다. 까만 밤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
욕실에서 나온 태헌은 느슨한 가운의 허리끈을 조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창밖을 보며 빈 잔에 위스키를 부었다.
잔을 쥐고 기울이자 희석하지 않은 진한 알코올이 빠르게 목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모든 신경이 밖으로 쏠려 있었다.
1층에서 발소리가 들릴까. 청각을 곤두세우다가 태헌이 피식 웃었다. 밖으로 나간 연서가 언제 돌아올는지 초조하게 가늠하는 신세가 미련하기 짝이 없다.
위스키의 뒷맛이 쓰고 떫었다. 피가 흐르는 코를 쥔 승빈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씩씩거리며 태헌을 노려보던 승빈은, 그 잘하는 거짓 미소를 지어 보이지 못하곤 제 방으로 들어갔다.
쾅,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 밟아버릴까 고민했지만, 태헌은 고개를 젓고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은 아니었다. 연서가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연서를 강제로 갈취하는 것보다 그녀가 굴종하길 원했다. 연서가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연서 스스로 굴러와야지만 이 갈증이 조금은 해소될 것 같았다.
이성적으론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꾸만 승빈의 목을 조르고 싶어진다.
“뭣 같네.”
태헌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정제되지 않는 감정에 휩쓸리는 건 익숙지 않았다.
낯선 풍랑은 언제부터 불어왔던 건가. 한연서가 몰고 온 햇살은 이상기후를 만들었다. 그녀는 태헌의 잿빛 하늘을 흔들고 있었다.
태헌이 오늘, 용인 집에 돌아오자마자 작은 풍랑이 해일처럼 불어났단 걸 인지했다.
강 여사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종종거리는 연서를 보는 순간, 그리고 그 옆에서 미소 짓는 승빈을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연서를 반드시 가져야 끝나는 일이란 걸.
적당히 섹스 몇 번이 아니라, 연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진 후에야 그녀를 놓아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식사 자리에서 우 상무가 폭탄을 던졌다. 연서를 승빈의 짝으로 소개했다. 연서가 강 여사의 예쁨을 독차지하고 있단 사실을 안 거겠지.
천박한 하이에나 같은 습성이다. 그 웃기고 자빠진 상황에서, 연서는 변명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녀가 우 상무의 일로 승빈에게 협박받은 건, 태헌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런 상황 설명 말고 너는 도와달란 말을 해야지. 손을 잡아달라 애원해야지.
태헌에겐 꼬박꼬박 할 말 잘하던 여자가, 주눅이 들어 입술만 벙긋대는 걸 봤을 땐 정말이지…….
우 상무와 우승빈을 진창에 처박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