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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27화 (27/85)
  • 27화

    *

    보란 듯이 승빈이 연서의 어깨에 팔을 올려 연서를 끌어당겼다.

    “많이 기다리셨죠? 연서 상 치러야 한다고 입막음시키시고 우리 할머니 은근히 소심하다니까.”

    “연서? 연서가 왔누?”

    강 여사가 화색을 띠었다. 연서는 그 순간 모든 불행을 잊었다. 그저 강 여사의 안위를 확인한 것만으로 다른 건 다 상관없어졌다.

    연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우리 연서, 왜 그렇게 섰어. 할미 얼굴 안 보여줄 게야?. 가까이 와야지.”

    강 여사가 환한 얼굴로 연서를 마주했다. 단 며칠 만에 병색이 짙어져 있었다.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어깨만 들썩였다. 침상 주변으론 언젠가 사진으로 보았던 태헌의 모친과 우 상무의 아내도 있었다.

    다른 손주들도 함께였다. 감히 연서가 껴도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연서야, 할머니가 부르시잖아.”

    다정한 투로 속삭인 승빈이 앞서가며 연서를 침대로 이끌었다. 반강제로 침대맡에 당도하고 나서야 연서는 겨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입을 열자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렸다. 연서는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사리물어야 했다.

    며칠 사이 강 여사의 볼이 홀쭉해졌다. 피부가 검게 가라앉아 죽음이 코앞에 당도한 것처럼 보였다.

    울면 안 되는데. 입술을 꼭 깨물었는데도 참을 수 없이 눈물이 고였다. 손톱이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울면 안 돼.

    누구보다 의연하게, 강 여사의 간병인으로서 프로답게…….

    “쉬다 오라지 않았니.”

    “죄송, 해요.”

    “그래도 얼굴 보니 너무 좋구나. 그리 할미가 걱정되었어?”

    “…….”

    전보다 훨씬 힘을 잃은 강 여사의 목소리 때문에 가슴이 덜컹거렸다. 시린 바람이 구멍 난 마음으로 마구마구 들이치는 것만 같았다.

    별도리 없이 연서의 뽀얀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선생님, 떠나지 마세요.”

    그리고 누르지 못한 애원이 터져 나왔다.

    “제가 오래오래 선생님 곁에 있게 해주세요.”

    연서의 손을 위로 꺼끌꺼끌한 강 여사의 체온이 뒤덮였다. 팔을 드는 것조차 힘들어하면서도 연서의 손을 꽉 잡는다.

    연서가 얼른 강 여사의 손을 붙들었다. 강 여사의 움푹 팬 눈에 삶의 회한과 고뇌, 두려움, 복잡함이 어려 있었다.

    철없이 죽지 말아 달라고 떼쓰면 안 된단 걸 알면서도 고개를 젓게 됐다.

    그러나 의연해질 때였다. 강 여사를 더 힘들게 해선 안 되었다. 연서가 겨우 그녀의 손을 놓고 떨어지자, 인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윤해가 잠시 쉬러 간 동안 연서가 냉큼 강 여사의 수발을 도맡았다. 강 여사의 둘째 딸까지 찾아와 연서가 직접적으로 나설 틈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잔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연서 씨.”

    태헌의 모친, 박선예. 그녀가 연서를 불러세웠다. 사진으로 뵌 적이 있어 연서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얼굴을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태헌처럼 표정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녀의 부름에 빠르게 다가간 연서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네, 부사장님.”

    “주방에 가서 30분 내로 식사 준비해달라고 하세요. 다른 분들 곧 도착할 거예요.”

    “네.”

    “그리고.”

    “네?”

    연서가 고개를 들자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혹시 우 부장이랑 만나요?”

    연서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기도 했고, 승빈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어 입에 자물쇠가 걸린 것처럼 소리가 막혔다.

    연서가 머뭇거리자 선예의 고운 눈매가 약간 좁아졌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며 승빈은 웃고 있었다. 연서의 대답에 따라 강 여사에게 폭탄을 던지겠다는 의미가 담긴 위협이었다.

    결국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연서는 고심 끝에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저런. 내가 실례했어요.”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인정과 부정, 모든 것이 연서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서가 손아귀에 들어찬 땀을 꽉 쥐고 있을 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우 상무의 등장이었다. 그 덕에 선예의 관심이 떨어져 나갔다.

    바삐 주방으로 향한 연서는 대가족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이모님들을 도왔다. 잠시 후, 스무 명도 넘게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식탁이 음식으로 채워졌다.

    강 여사의 두 아들과 두 딸.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 몇이 자리했다. 강 여사는 잠이 든 데다가 거동이 어려워 저녁 식사까지 함께하진 못했다.

    마지막 식탁 점검을 마친 연서는 한숨을 몰아쉬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강 여사의 방엔 윤해가 있으니 이곳에서 일손을 거들 생각이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복희 이모님과 영례 이모님이 바삐 움직이는데 혼자 편히 쉴 수는 없었다.

    조금 전 이곳에 도착한 태헌도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그는 연서 쪽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태헌은 어머니와 몇 마디 말을 나누는 동안에도 무감해 보였다. 연서는 남몰래 그를 흘긋거리며 맞잡은 두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간단한 애피타이저로 입맛을 돋우기 시작한 때였다.

    “아 그래, 연서 씨도 여기 앉아요.”

    우 상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에 선 연서에게로 닿았다.

    “이제 곧 우리 가족 될 사람인데, 이참에 얼굴 제대로 익히면서 인사 나누면 좋지. 안 그래요?”

    말을 마친 우 상무가 잔잔하게 웃었다. 안경 너머로 그의 선한 눈동자가 보기 좋게 휘어져 있었다. 당황한 연서의 손이 끈적하게 달아올랐다.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가족 될 사람이라니?”

    식전부터 얼굴이 발개지도록 와인을 마시던 송현이 의문을 드러냈다.

    “승빈아, 네가 소개해라. 한연서 씨, 너와 약혼할 아가씨라고 말이야.”

    못 말리겠다는 듯 우 상무가 고개를 저었다. 아들의 고집에 져서 연서를 허락했단 뉘앙스가 담긴 태도였다.

    누군가의 나이프가 접시 위에서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연서의 숨이 어긋났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우 부장이랑 나를 엮으려는 거지?

    연서는 두 다리가 풀릴 뻔한 걸 견디며 염료처럼 번지는 당혹감을 품고 승빈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승빈의 얼굴을 보자 열이 확 끓어올랐다. 우 상무는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승빈의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 불쾌해했다.

    혹시 승빈이 우 상무를 졸라댄 걸까. 그것 말고는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그런 연서에게로 집중된 이목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낱낱이 뜯어보려는 듯 첨예한 시선들이 무대 위 조명처럼 어지러웠다.

    “그래, 연서야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내 옆에 앉아. 아까도 괜찮다고 했는데…… 아버지, 연서가 저렇게 숫기가 없어요.”

    승빈이 입꼬리를 더욱 올리며 말했다. 식탁 위로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오빠 정말이야? 저 친구랑 약혼까지 하겠다는 거야?”

    송현이 확답을 받으려는 것처럼 묻자 승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어붙어 눈만 깜빡이고 있는 연서에게로 그가 금세 다가왔다.

    경직된 어깨를 감싼 커다란 두 손이 식탁 쪽으로 그녀를 슬쩍 밀었다.

    “앉자. 모두 기다리시잖아.”

    “아뇨, 저는…….”

    “밥 먹었다고 이러는 거 아는데 괜찮아. 그냥 앉아만 있어도 돼.”

    승빈의 부드러운 말이 마치 애정이라도 듬뿍 담긴 것처럼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연서는 핏기를 잃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연서가 엉거주춤 그에게 끌려가자, 우 상무가 헛기침으로 어색한 기류를 정리하려 했다.

    “승빈아, 놔둬라. 우리가 너무 마음만 앞서서 연서를 당황하게 했나 보다.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하자. 연서야, 그게 낫겠지?”

    마지막 질문은 연서를 향한 것이었다. 언제부터 말을 놓았다고 친근하게 구시는지.

    여러 개의 시선이 작살처럼 그녀를 꿰뚫고 있다는 것도 깜빡하고 비아냥거릴 뻔했다.

    “승빈이랑 오빠, 진심이야?”

    그때 송현의 아래 동생 아현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비난의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으나 숨은 뜻은 훤히 읽혔다.

    우 회장의 장남, 우 상무. 그리고 그의 장남 우승빈.

    그룹의 장자가 지닌 의미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연서가 그럴 마음 없다고 해도 이들은 이미 우 씨의 피를 이어갈 장남의 짝으로 연서를 심사하고 있었다.

    발가벗겨진 것만 같았다. 대놓고 조롱하는 사람 없었으나, 기막혀하는 분위기가 선연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단…….

    태헌의 시선이 너무나 아팠다. 지그시 연서를 바라보는 태헌의 눈빛이 차갑고 딱딱했다.

    무생물을 보는 듯한 건조한 기색이 어딘가 위험했다. 그래, 태헌은 말없이 연서를 추궁하고 있었다.

    연서의 바닥을 확인하며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선택을 조롱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태헌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고 말하면,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상황에 연서는 허탈한 웃음마저 흘러나왔다.

    “어머, 쟤 웃는 것 봐.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보통 아니네?”

    송현의 말에 우 상무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승빈이가 좋다는 사람이랑 결혼시켜야지.”

    “아주버님, 연서 씨 곤란해 보이네요. 어려운 자리일 겁니다.”

    태헌의 모친 선예가 조곤조곤 말하자 예의가 아니란 걸 깨달은 이들의 이목이 거두어졌다. 아직 연서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던 승빈이 고개를 내려 속삭였다.

    “갑자기 놀랐어? 그래도 언젠간 해야 할 일이었어.”

    “놔주세요.”

    증오를 담아 말을 내뱉은 연서가 굳은 몸을 돌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리로 향하는 태헌의 덤덤한 질책만은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도와달란 청을 하게 될까 봐.

    승빈이 아닌 태헌의 애인이라 말하고 싶을까 봐.

    두려웠다. 연서 스스로 최악의 상황으로 끌고 가기 전에 이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그럼 같이 나가자. 식사는 안 해도 돼.”

    연서는 제 어깨를 감싸는 승빈의 팔을 피해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등을 찌르는 검은 눈동자가 느껴졌다. 추격당하는 작은 동물처럼 숨이 가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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