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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26화 (26/85)

26화

*

승빈이 여기 있다니 차라리 잘되었다. 오늘 그와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하, 너 진짜 이렇게 막 나갈 거야?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밤새 핸드폰이 꺼져 조금 전 차에서 충전했다. 밀려 있는 승빈의 문자를 무시하고 현호와 지영에게만 답을 했는데, 그게 이렇게 질타를 받아야 할 일이었을까.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잖아. 왜 연락 안 받았어? 응? 누구랑 있었니.”

승빈은 정말 애인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었다.

“어제 너 그렇게 차에서 뛰어내리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병원에 연락해서 너 잡아두라고 했는데, 바보 같이 놓쳐선…! 하…….”

“병원에 연락했었나요?”

“그래. 너 바로 용인으로 올 줄 알았어. 밤새 어디 있었던 거야? 너 기다리느라 한숨도 못 잤어. 제대로 답해 봐. 응?”

승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뻗었다. 눈을 찌르는 머리칼을 정돈해주려 한 것인데 그녀가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경직된 반응에 승빈이 낮은 한숨을 흘렸다.

“연서야, 우리 이러지 않았잖아. 한순간의 실수로 좋았던 날까지 퇴색되는 거, 너무 섭섭하다.”

한순간? 웃기지도 않았다. 연서가 가시를 삼킨 것처럼 깔깔한 목구멍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얘기 좀 나누자.”

“여긴 좀 그렇고 조용한 데로 가요.”

“저쪽이 낫겠다.”

연서의 손목을 허락 없이 낚아챈 승빈이 향한 곳은 본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창고였다.

밭에 심을 모종이나 씨앗, 도구를 수납해둔 창고는 제법 깨끗했다. 연서가 시간이 날 때마다 들락거리며 쓸고 닦은 덕이었다.

연서를 그 안으로 밀어 넣은 승빈이 불도 켜지 않고 우산을 접어 한쪽에 세웠다. 비 맞은 어깨를 터는 승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면 계속 좋았을지도 모를 만큼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헌이 차갑고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이라면, 승빈은 깔끔하고 선한 인상으로 다정한 느낌을 주었다. 어쨌거나 같은 피를 타고난 사촌인 걸 증명하듯 두 사람은 외모마저 우월했다. 그것 또한 연서에겐 거북함이었다.

작은 창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겨우 들어오는 창고 안은 대체로 어둑했다. 그래서 승빈의 표정까진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게 나았다. 가증스러운 얼굴에 속이 울렁거릴 테니까.

“선생님께 말씀하겠다고 협박한 거, 아직도 같은 마음이세요?”

승빈의 동작이 멈추었다. 허리를 펴고 선 그가 연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웃었다.

“정말 그러겠다는 게 아니잖아.”

“정말 그러실 수 있잖아요.”

“연서야.”

“그렇게 부르시는 거, 솔직히 끔찍해요.”

끔찍하단 단어도 연서 입장에선 많이 순화한 거였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

알레르기가 일어날 걸 뻔히 알면서 그런 짓을 벌여.

그래놓곤 아무렇지 않게 강 여사가 있는 곳에 찾아와 미소 짓는 이 남자가 정상이라고 생각되질 않았다. 승빈은 앞과 뒤가 달랐다. 앞과 뒤 모두 재수 없는 태헌이 낫다고 생각될 만큼, 아주 역겨운 인간이었다.

“혹시 태헌이가 돈을 주겠다고 그래?”

“이사님 얘기가 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나 일부러 밀어내는 거야? 태헌이가 나랑 관계 정리하라 그래? 맞지?”

“만지지 말아요!”

성큼 다가와서 두 손을 잡으려는 승빈을 향해 소리치고 말았다. 연서의 얄팍한 가슴에서 가쁜 숨이 흐느끼듯 터져 나왔다. 이건 배신감이었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곳에 온 뒤 알게 된 좋은 벗이라고 여겼는데, 전부 연서만의 착각이었다.

우승빈은 쓰레기였다. 한문식처럼, 우 상무처럼. 또 세상의 나쁜 모든 것처럼 연서가 쓸어 담기 버거운 나쁜 것이었다.

승빈이 두 손을 거두며 말했다.

“연서야, 나는 네 잘못까지 감쌀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연서가 눈물을 참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네가 우리 아버지한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던 할머니에 대한 얘기가 얼마짜리인 줄 알아?”

“…….”

“연서 네 말 한마디로 인해서 수백, 수천억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어.”

연서의 동공이 흔들렸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곧 할머니가 재산분배를 다시 할 거야. 그런데 연서 네가 우리 아버지에게 거론했던 이름 중 몇몇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어.”

“…….”

“할머니가 호의를 보인 인사에게 일부러 추문을 붙여 청소했거든. 우리 아버지 솜씨야.”

그녀가 옮긴 말로 인해 누군가 우 상무의 손에 숙청되었단 뜻이었다.

“…그런.”

연서가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드러난 흰 목덜미에 승빈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할머니가 아시면 정말 상심이 크시지 않겠어? 예뻐하던 연서 네가, 할머니의 측근을 무너뜨리는 일에 가담했는데.”

승빈이 빙긋 웃었다. 실수를 재차 확인시켜주는 그가 조금 전보다 더 증오스러웠다.

“선생님께 미움받아야 한다면 그래야죠. 물론 아예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저는 그런 게 두려운 게 아니에요.”

“알아. 너에 대해 모르겠어?”

승빈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연서의 목을 한 손으로 감쌌다.

“하지만 할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충격이 크실 거야.”

승빈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가볍게 누르는 것뿐인데 살해 협박을 받는 것처럼 연서의 안구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더 사셔야 하는데……. 평안하게 말이야.”

승빈의 뱀 같은 눈이 살기 등등했다. 절대 애정을 품고 집착하는 거라곤 볼 수 없는 태도였다.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남자로서 연서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면, 이런 식으로 그녀를 망가뜨리는 데 스스럼이 없이 굴진 못할 터였다.

애초에 승빈과 연서는 그만한 정을 쌓지도 않았다. 입술을 바르르 떤 연사가 목이 조여오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보약……. 당신이 그런 거잖아.”

승빈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섰다.

“뭐?”

연서는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했다. 이대로 승빈에게 끌려갈 순 없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 강 여사에게 걱정을 끼치겠지.

태헌 하나로도 버거웠고, 강 여사에게 해가 되는 승빈을 정리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보약 얘기로 그를 압박해보자 결심했다. 연서가 가진 승빈의 약점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그래도 할머니인데!”

“쇼크까지 일으킬 생각은 없었어. 주치의를 부를 정도만 증상이 나타나길 바란 건데 생각보다 일이 커진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할머니, 좀 더 사셔야 하거든. 유언장을 다시 써야 해서.”

승빈이 곤란한 듯 웃으며 뻔뻔하게 말을 잇는다.

“연서야, 너도 알잖아.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다 세원을 위해서야.”

“저는 그런 거 몰라요. 하지만 우 부장님이 하신 짓이, 천륜을 배반하는 죄라는 건 알아요.”

연서가 눈에 힘을 주고 그의 부도덕함을 질책했다.

“그래? 그런데 네 빚 3억 말이야.”

3억이란, 납덩이 같은 단어를 왜 승빈이 알고 있는 걸까. 연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거 내가 대신 갚았어.”

순간 커다란 돌멩이가 굴러와 가슴을 들이받은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가 빚이 있단 걸 알았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해.”

“우, 부장님이 왜. 그걸 왜……. 당신이 왜?”

“감정 상한 건 어차피 시간 흐르면 풀어질 텐데 급한 돈부터 해결해야지. 남녀 사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

“그 돈을 왜 갚으셨어요? 뭔데……. 당신이 뭔데?”

“다른 빚도 있던데, 그것도 갚아줄게. 그건 절차가 조금 복잡하더라.”

기가 막혔다.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태헌이 준 돈조차 아직 고스란히 쥐고 있었다. 5천만 원을 시한폭탄처럼 불안하게 들고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연서의 속을 승빈이 또 한 번 짓밟았다.

할 수만 있다면 승빈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래도 될까?

뺨이라도 올려붙일까 싶어 주먹을 꽉 쥐는데, 밖에서 승빈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 부장님!”

여자 목소리로, 꽤 다급한 투였다.

“우 부장님! 어디 계세요!”

“아, 내 비서야.”

잠시 바깥으로 시선을 내던진 승빈이 몸을 뒤로 물리며 아무렇지 않게 연서에게 말했다.

“일단 나가자. 할머니가 너 보시면 엄청 좋아하시겠다. 얼른 뵙고 싶지?”

얼어붙은 연서의 손목을, 그는 들어올 때와 같이 제 것처럼 잡고 걸어가려 했다. 빚을 왜 그가 갚았단 말일까.

그럴 수 있는 거야? 사채업자 쪽에서 흔쾌히 수락했단 말인가?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큰돈이 눈 녹듯 사라졌단 말에도 기뻐할 수 없었다. 멍해진 연서는 전보다 더 무거운 빚을 떠안은 사람처럼 비척거렸다.

앞서 걷는 승빈에게 종이 인형처럼 끌려갔다. 뿌리쳐지지 않는 손목을 차라리 잘라내고 싶단 생각을 할 때였다. 본채 쪽에서 여성이 뛰어왔다.

“우 부장님!”

“네, 정 비서님. 천천히 찾으셔도 되는데. 우리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거라서요.”

“죄송합니다. 큰 사모님께서 찾으셔서…….”

연서를 흘긋 본 그의 비서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맞받아칠 겨를도 없이 연서는 승빈에게 끌려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평소보다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예상했던 죽음의 기운 대신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축제처럼 흘러나와 조금은 의아했다.

거실에 강 여사의 장녀 우송현이 있었다. 그녀가 승빈과 그 뒤로 손목이 잡혀 끌려오는 연서를 차례를 살폈다.

송현은 용인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연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승빈이 잡은 손목에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가 나앉았다. 그녀가 살짝 웃었다.

“우 부장, 요즘 이러고 놀아? 건전해졌다고 해야 하나, 좀 우려된다고 해야 하나.”

“우리 고모가 또 왜 이러실까.”

승빈이 웃으며 연서의 손을 잡고 강 여사의 방으로 향했다. 놔달라 몇 번이나 손목을 비틀었으나 벗어나진 못했다.

강 여사의 방문은 많아진 손님을 환영하듯 활짝 열려 있었다.

“할머니 연서 왔어요.”

승빈이 그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자, 안의 시선이 모조리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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