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부나방 같은 사랑은 연서에게 사치였다.
사랑이라 말하는 것조차 헛다리였다. 이 마음은 여기서 멈춰 설 잠깐의 호기심, 착각에 불과할 것이다.
연서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건 이사님한테 돈을 받아서 허락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적선이라도 해?”
“나도 이사님 이용하는 거예요. 오늘은 그냥, 쓸쓸하니까.”
“쓸쓸.”
단어를 되짚는 태헌의 목소리가 건조했다. 비웃을 줄 알았는데 그는 미간을 좁혔다.
“차라리 낫네.”
“그럼 다행이구요.”
“입 벌려.”
말이 끝나는 동시에 태헌이 입술을 겹치며 연서를 들어 올렸다. 허벅지를 받치며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으음!”
그녀는 떨어지지 않으려 두 팔을 그의 허리에 감았고, 목도 꽉 껴안았다. 혀를 조금 급히 얽으며 태헌이 향한 곳은 커다란 침대였다. 가볍게 그녀를 눕힌 그가 그림자처럼 다가와 그녀를 덮었다.
조금 전, 태헌의 우산 밑으로 들어갔을 때처럼 연서를 둘러싼 세상이 차단된 기분이 들었다.
연서의 눈엔 오직 우태헌만 보이고 있었다. 흐릿한 조명 탓인지 그가 만든 그늘 외엔 다른 어둠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잘생긴 얼굴은 얼핏 화난 것 같았다. 그러나 고요한 새벽 같은 눈동자에 정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단 걸, 연서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눕힌 건가.”
“전에 차에서 눕히셨잖아요.”
“박진 못했지.”
“어떻게 그런 말을 마 막, 하시는 거예요?”
“네가 순진한 건 아니고?”
“저 안 순진해요.”
연서가 힘주어 답했다. 헛웃음을 짓듯 태헌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연서가 차츰차츰 눈동자를 내려 그를 훑어보았다.
팽팽한 베스트 사이로 헝클어진 넥타이가 보였다. 평소와 같은 금욕적인 정결함은 사라지고 없었으나, 이런 때조차 교양 있는 귀족처럼 보였다.
연서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추었다. 저게…… 뭐야.
눈을 깜빡인 그녀는 몇 초 후에야 바지를 뚫을 듯한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깨달았다. 단단히 응집한 그의 열기에 놀란 연서가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외면한다고 달라지나. 만져 보든가.”
태헌이 웃듯이 말했다. 하도 태연해서 연서는 제가 본 게 헛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네가 요즘 나를 이렇게 금수처럼, 개새끼처럼. 만들어.”
태헌이 무방비한 입술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혀가 농밀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좁은 입안을 죄 휩쓸어 샘이 넘쳤다. 연서가 목을 열어 은밀한 교유의 증거를 허겁지겁 삼키도록 그가 유도했다.
거센 바람 아래 놓인 파도처럼 계속해서 맞부딪혔다. 숨이 차오른 사이 얇은 홈웨어 상의가 젖혀졌다.
홀쭉한 아랫배를 지난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리듯 유연하게 윗배를 문질렀다. 커다란 손이 적당히 차오른 살덩이를 부드럽게 주무르자, 입술 새로 탄식이 터졌다. 속옷 위로 닿는 둔탁한 접촉인데도 맨살에 닿은 것처럼 뜨거웠다.
중심의 감각이 곤두서 그의 손바닥에 뭉개졌다. 가쁘게 터지는 연서의 신음을 받아마신 그가 입술을 뗐다.
“사람을, 씨발.”
욕설을 내뱉은 태헌의 입술이 목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곧 쇄골에 닿았다.
“읏!”
차오른 살을 가득 쥐어 위로 밀어 올린 그가, 살집이 몰린 가슴 윗면에 입술을 내렸다. 야릇한 통증이 연서를 몸부림치게 했다. 잇새로 말랑한 살갗을 괴롭힌 그가 욕심껏 진한 자국을 남겼다.
따끔하고 뜨겁고 축축한, 태헌의 입속으로 전신이 빨려 들어가는 착각이 일었다. 연서는 혼몽하게 젖은 눈을 깜빡이며 허리를 떨었다.
“이쯤 숙여줬으면 너도 적당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어?”
“흣…….”
“얻는 것 없이, 이용만 당해주기엔 내가 손해 보는 짓을 싫어해.”
사업가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태헌이 멀어져갔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워 앉은 그의 흉곽이 화난 것처럼 부풀었다.
지긋이 연서를 바라보는 그는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 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침대에서 내려가는 동안 연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하면 먼저 손 뻗어. 한연서 씨 봐주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머리 잘 굴려 봐.”
결국 태헌이 바라는 건 쓸쓸함에 비롯된 일회용 관계가 아닌, 진짜 애첩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언젠간 잃고 말 태헌을 바라기엔, 연서는 소중한 걸 너무 많이 잃어버린 겁쟁이였다.
헛헛한 몸을 가리기 위해 시트를 끌어오는 사이, 태헌이 나간 문이 닫혔다.
*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연서는 어디선가 울리는 차임벨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구지? 오피스텔이구나.
낯선 벽지를 보며 연서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벨 소리가 계속되었다. 벨을 누르는 간격이 일정했다.
태헌이었다면 어제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을 터다. 어제 그렇게 침실에서 나간 태헌은 곧장 오피스텔을 떠났고,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다른 사람인 걸까. 그렇다면 누구인 걸까.
연서가 허둥지둥 월패드 앞으로 가까이 가자, 화면에 낯선 여성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추었다. 머리를 높게 묶고 검은 슈트를 입은 여자였다. 경호원인가?
연서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읽어내려 애쓰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이사님께서 보내셨습니다. 한연서 씨를 용인댁으로 모시란 명령입니다.
“이사님이요?”
-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연서는 얼른 문을 열었다. 용인이란 말에 경계심이 바로 흐려졌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신뢰가 갈만한 차분한 인상이었다. 연서가 예의를 차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김현영입니다.”
깍듯이 인사한 그녀가 현관 앞에 손을 모으고 섰다.
“들어오셔서 잠시만 기다리겠어요? 차가 있나 찾아볼게요.”
연서가 손님맞이를 하려 분주하게 움직이자, 현영이 난감한 얼굴로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래도…….”
“아닙니다. 천천히 채비해 주십시오.”
꼼짝도 하지 않겠단 의미로 아예 정면을 보고 선 현영의 뜻이 확고해 보여 연서는 그쯤하고 물러났다.
재빠르게 씻고 단정해 보이는 옷을 골랐다. 슬랙스에 크림색 블라우스, 단화를 신고 현영과 함께 오피스텔을 나섰다.
오피스텔 내부는 어제 스치듯 봤을 때보다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준비된 차 또한 연서가 선뜻 오르기 겁날 만큼 값비싼 외제 차였다. 모든 것이 연서와 겉돌고 있었다.
태헌이 내어주는 모든 것은 아마 쭉 이럴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연서와는 섞일 수 없는 호화스러운 것들.
“왜 그러십니까.”
조수석 문을 열고 기다리던 현영이 물었다. 연서가 굳은 채 움직이지 않자 다시 권했다.
“타시면 됩니다.”
어차피 연서는 용인으로 가야 했다. 혼자서 못 갈 길은 아니지만, 태헌이 보낸 차를 타면 조금이나마 당당하게 강 여사 알현을 요청할 수 있지 않을까.
연서는 기꺼이 불편한 배려를 감수하기로 했다.
“감사해요. 문은 제가 닫을게요.”
“네.”
딱딱한 대답을 내놓은 현영은 연서가 차에 오르는 걸 보고 난 후에야 운전석으로 향했다. 상사를 모시는 게 몸에 밴 사람 같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깍듯할 필요가 없단 걸 현영은 알까. 모른다면 알려야 하지 않을까.
연서는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몸을 뒤척이며 차 내부를 훑었다.
어제 태헌의 차와 전에 운전기사가 몰던 차, 그리고 이 차는 모두 다 다른 모델이었다. 차를 옷처럼 바꿔 타는 재벌들의 세계를 이해할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거다.
연서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용인으로 향하는 내내 긴장했다. 그리고 용인 집이 가까워질수록 강 여사의 걱정으로 가슴이 까맣게 물들어갔다.
병이 급작스레 진행되는 경우는 종종 봐왔으나, 막상 강 여사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자 세상이 참 무심하다 생각 들었다.
왜 하필 선생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수술이 불가한 상황. 더군다나 대수술을 받기엔 강 여사의 면역력이 좋지 않았다. 알레르기 쇼크로 병원을 찾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연서의 머리가 무거워졌다.
문식을 보내고 연이어 가슴 아픈 소식을 듣는 게 실은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어젯밤 태헌의 유혹을 두 눈 감고 받아들이려 했었다.
바보 같아.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기……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편하게 부르십시오. 저는 세원 그룹 경호팀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럼 김 비서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김 비서님, 용인 집에 일가분들 많이 와계실까요?”
“계속 찾아오시긴 하는데, 오래 머무르진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강 여사는 지금, 오래 함께 한 윤해와 함께 있을 거다.
병원에서 들은 바로는, 윤해의 아들이 곧 자취를 시작할 거라고 했다. 그럼 윤해도 용인으로 올 터다.
이제 연서의 간병은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식과 손주들이 함께 있다면 더욱이 연서가 나설 자리는 없었다.
만나 뵐 순 있겠지…….
창밖 풍경에 집중하려 했으나 퍼붓는 비 때문에 시야가 불분명했다.
오르막 위에 우뚝 선 용인 집이 드디어 눈앞으로 당도했다. 마음이 급해진 연서는 대문 앞에서 고개 숙여 배웅하는 현영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용인 집은 며칠 전과 변함없었음에도 연서는 오랜만에 돌아온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뭉근해졌다.
고향을 찾은 것처럼 푸근하고, 그리운 감정.
그리고 이곳에서 아마 강 여사는 여생을 마감하겠지. 그날이 부디 멀리 있길. 연서는 잠시 눈을 감고 소원했다.
현영이 쥐여준 우산 너머로 남자의 슈트 하의가 눈에 들어왔다. 네이비 정장과 진한 브라운 옥스퍼드.
천천히 우산을 들자 버건디 넥타이를 맨 승빈이 눈에 들어왔다. 연서의 다갈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가 본래 크기로 돌아갔다.
“연서야, 핸드폰 꺼 두고 행방불명 되면 어떻게 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