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그릇을 치우고 양치질까지 마치고 나자,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헌의 모습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연서는 공연히 태헌의 주변을 거닐었으나 그는 태블릿에 시선을 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서가 작게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들어가서 잘게요.”
말을 마치자마자 연서는 도망치듯 뒤돌았다. 혹여 태헌이 감당하기 어려운 말을 할까 봐 미리 선수 친 것이다.
닫힌 방문을 열려는데 순식간에 뒤로 태헌이 다가왔다. 손잡이를 쥔 하얀 손 위로 태헌의 커다란 손이 겹쳤다.
열리던 문을 도로 닫은 그가 연서의 몸을 돌려세웠다. 가느다란 허리를 잡은 팔에 강제성은 없었으나 연서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태헌이 연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짙은 시선이, 그의 향기가, 위압감이 온 세포를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과연 두려움뿐인 감정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온통 태헌과 연관되어 있었다.
다른 걱정거리가 산더미인데, 자꾸만 태헌이 그 모든 것을 밀고 들어온다.
너 어쩌려고 그래, 연서야.
태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른 데서 구르지 마. 이건 경고야.”
“우승빈 부장님…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래,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
“저는 긁은 적 없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한연서가 긁은 적이 없는데 부스럼이 생긴 거면, 내 잘못이기도 하지. 내 사람 제대로 못 챙긴 거니까.”
“내 사람이요?”
되묻는 연서의 목소리가 꽃잎처럼 흔들렸다. 태헌의 표정이 부쩍 불쾌해 보였다.
그래도 무표정한 것보다 이편이 나았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태헌은 멀게만 느껴졌다. 승빈을 경계하는 태헌이 어째서 희망처럼 느껴지는 걸까.
내 사람이란 단어에 헛된 바람을 품으려는 바보 같은 자신을 깨달은 연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어쩌려고 그래. 닿지도 못할 미친놈에게 끌려서 뭘 어쩌려고 그래.
이건 미움이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거야.
피가 날 만큼 꽉 다물린 연서의 입술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기어코 잇새에서 말랑한 살갗을 떼어낸 그가 젖은 안쪽 살을 살살 문질렀다.
옅은 숨이 전류처럼 흘렀다.
“누가 괴롭히거든 나랑 잤다고 해.”
“…네?”
“앞으로도 잘 거고 쭉 섹스할 사이라고, 그렇게 말하라고.”
“무슨…….”
“앞으로 용인 집에 사람이 많이 찾아올 거야. 너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을 거고, 우승빈이 알짱댈 건 뻔하지.”
“정말 이사님 애첩 행세라도 하라는 거예요?”
“쉬운 일이야.”
연서의 두 눈이 작게 요동쳤다. 그러니까 승빈이 아닌, 태헌과 만나고 있다고 모두 앞에서 공공연하게 말을 하란 소리였다.
그것도 그냥 섹스 파트너로서.
“모두에게 제가 이사님이랑 자는 사이라고, 그렇게 말하라는 그런……. 말도 안 돼요. 대체 누가 믿겠어요.”
태헌이든 승빈이든, 연서에겐 가당치 않은 상대였다.
“우승빈이랑 네가 시시콜콜 사랑싸움이나 하고 있단 소리가 들리는 건, 괜찮고?”
“사랑싸움이라니…….”
“갖다 붙이면 뭐든 말이 안 되겠어. 그러니 나와 놀고 있다고 해야지. 한연서는 내가 고용한 내 사람이지 않나.”
내 사람이란 의미를 이제 깨달았다. 논다는 말에 탄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심장이 따끔했다.
미쳤구나, 한연서.
“…진짜로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고 어떻게 해요?”
연서가 따지듯이 물었다. 기막히다는 듯 태헌이 실소했다.
“너와 섹스하는 게 어렵겠어.”
태헌은 독을 품은 유리 꽃 같았다. 손을 대면 중독 끝에 자멸할 게 뻔한 예쁜 독.
그 유혹적인 자태에 손을 대보고 싶은 마음이 바람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연서는 그에게 끌리고 있단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파멸로 가는 길로 순순히 접어들기에 연서는 세상의 이치를 잘 알았다. 어쩌면 뼈저릴 만큼.
저 예쁜 유리 꽃이 어떻게 찔러올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재벌 3세와 잠깐 노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쯤 머물렀다가 사라질 존재. 그게 한연서의 위치였다.
분수를 잘 안다는 건 쓸데없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연서는 우태헌의 공식적인 애첩이 되고 싶은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싫어요.”
“너한테 선택권은 없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 부장님이랑 이사님, 저한텐 다를 거 없어요.”
“다를 게 없어?”
“저는 선생님 때문에 이사님 곁에 붙은 거예요. 적어도 이사님은 선생님을 해치지 않을 테니까요.”
“값어치 없는 자존심 세울 바에 도와달라고 빌어. 그게 더 귀엽겠네.”
태헌이 비웃듯이 말했다. 연서를 바라보는 태헌의 눈빛이 아까부터 집요했다.
검고 깊은 물처럼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길이 없는 숲과 같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 숲처럼 태헌은 싸늘하고 자비가 없었다.
그 가운데 연서는 조난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에게 속절없이 빠져들고 있단 사실을 곧 들킬 것만 같아서 먼저 눈을 피했다.
하지만 태헌이 연서의 턱 끝을 정면으로 가져왔다.
“머리 굴려 봐야 시간 낭비야. 여기 편한 길이 있는데 왜 다른 데서 솟아날 구멍을 찾아. 쉽게 가면 될 것을.”
“저는 이사님 인형이 아니에요. 이사님도 저랑 얽히는 거 득 될 거 없잖아요.”
“네가 가진 모든 불행, 나한텐 별것 아니야. 이래도 이해가 안 돼?”
연서가 가진 불행의 가장 큰 축은 빚이었다. 문식이 남긴 어마어마한 사채.
“제가 이사님한테 빚을 갚아달라고 하고, 그리고 섹스를 하면…….”
그렇게 되면? 태헌에게 도움을 받고 나면, 그 이상 의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이야 자존심을 지키려 바락바락 버티고 있으나, 숨기고 싶던 곳까지 태헌이 침투한다면 연서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말 것이다.
수많은 빚, 외로운 인생,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청산해줄 우태헌.
그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태헌이 시궁창 같은 인생에서 건져 주길, 그의 숲에 자신을 받아주길 소망하게 될 거다
그의 도움을 받고 몸을 내어준 뒤엔 이 알량한 자존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다.
그리고 연서는 언제 그에게 버림받을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겠지.
좋아한다는 거, 사랑한다는 거. 되게 구질구질한 거잖아.
외로움에 사무칠 결말이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해.
언젠간 태헌의 세계에서 쫓겨날 게 뻔한 길을 굳이 택할 만큼 연서는 여유롭지 못했다. 생각을 마친 연서는 뒷걸음질을 칠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에게 끌릴수록 쉽게 끝나버릴 이 관계가 깊어지는 게 두려웠다. 인정하고 나자 가야 할 길이 더욱 확실해지는 것 같다.
차라리 태헌이 더 못되게 굴었으면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연서가 팔을 뻗어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자, 태헌이 순순히 물러났다.
“이사님은 우 부장님이 저랑 얽히는 게 싫으신 것뿐이잖아요.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할게요.”
“난 욕구를 풀고, 넌 도움을 받고.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그렇게 빙빙 돌 일이야?”
욕구. 그의 성욕을 풀 대상에 불과하단 확언이었다. 눈물이 찔끔 고이고 마음이 쓰렸다.
“저 별로 안 헤퍼요. 그래서 이사님한테 못 드리겠어요.”
태헌과 승빈은 한 끗 차이였다. 승빈이 강 여사의 건강을 두고 협박한다면 태헌은 연서의 처지를 두고 압박해왔다.
강 여사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는 보장만 아니면 태헌도 볼일 없었다. 어차피 연서에게는 그게 그거인, 괴로운 일이었다.
“입 맞출 때마다 엉겨 붙던 건, 그건 너 아니었어?”
태헌이 천천히 연서의 한쪽 골반을 어루만졌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연주하듯 여자의 둥근 골반을 따라 하느작댔다.
“하지 마?”
“이사님.”
“그래, 네가 말해 봐.”
높은 콧날이 연서에게로 가까워졌다. 충분히 밀어낼 시간이 있었음에도 연서는 그러지 못했다. 차양 같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입술을 떨었다.
밀어내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눈빛 한 번에 이렇게 쉽게…….
“말 못 하지.”
“…….”
침묵이 신호였다. 태헌이 입술을 집어삼켰다. 내내 생각났던 뜨거운 감촉인데 새삼 낯설었다.
그리고 반가웠던 것 같다. 서툰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태헌의 향기, 그리고 짜릿한 돌기가 돋은 혀끝을 향해 연서가 입술을 열었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살끼리 비벼졌다. 아슬아슬 닿을 듯 말 듯, 서로의 코끝이 비켜났다. 윤기를 가득 머금은 입술이 그가 문지르는 대로 밀려났다가 벌어졌다.
우승빈과 다를 게 없는 우태헌인데, 그래야만 하는데 왜 당신의 체온에 한없이 작아지는지.
심장이 이토록 아프게 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지.
연서가 앓는 숨을 흘렸다. 그가 빈틈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그네를 타던 어느 날, 푸른 하늘을 뒤덮으며 나타난 남자. 갑자기 들이닥친 그는 연서의 하늘이 파랗지만은 않다는 걸 깨우쳐주었다.
입맞춤이 달콤할수록 마음을 졸였고 그에게 반응하는 만큼, 그 끝이 두려웠다.
그럼 오늘만 딱 오늘만.
연서가 힘없이 늘어뜨렸던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에 감았다. 태헌이 숨을 길게 쉬며 입술을 슬쩍 떼어냈다.
연서는 뒤꿈치를 들고 그의 가슴팍에 체중을 내맡겼다. 무엇이 뭉개지는 줄도 모르고 쌕쌕, 달아오른 숨을 내보였다.
“허락?”
잠긴 목소리로 태헌이 그렇게 물어왔다. 태헌은 늘 여지를 남겨두었다. 넘을 듯 말 듯, 어느 일정한 선 너머에서 연서를 시험했다.
마치 언제 연서가 손을 뻗으려나 기다리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아마 언제든 자신이 만든 선을 넘을 수 있단 자신감이 있을 터다. 그러니 이토록 여유로운 것이고.
하긴 조급함이란 단어는 태헌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 관계가 이보다 조금 진전된다면 그를 끊어낼 자신이 없는 연서와는 분명 다른 부류였다.
상처 입을 게 뻔한 사랑을 시작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