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아니, 착각일 거야.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선생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위로면 고맙고. 계속 비 맞을 생각인 건가?”
“저는 괜찮아요.”
“청승 떠는 게 취미야? 끌고 오기 전에 스스로 오는 게 모양이 보기 좋겠지?”
하여간 참 못됐다. 연서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그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단단한 가슴팍이 시야를 꽉 막아서자, 빗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뺨을 두드리던 빗방울이 사라졌는데 묘하게 더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연서가 시큰한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저도 용인에 가면 안 될까요? 얼굴만 뵙고 나올게요. 어려운 일일까요?”
강 여사를 만난 뒤엔 승빈에게 돌아가야 했다. 아니지,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와 만나서 얘기를 해야 했다.
우 상무가 나쁜 마음을 품었고 자신이 그를 도운 거나 마찬가지였단 사실을 강 여사에겐 비밀로 해줄 것을 확답받아야 했다.
승빈이라면 그녀가 빨리 죽길 고대할 터니, 말하는 편이 더 이롭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반으로 갈리는 듯한 흉통이 일었다.
승빈이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그런 건 싫은데.
승빈이 닿을 때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 끼쳤다. 그런 감각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지금 가봐야 동네북처럼 물어뜯길 텐데.”
“용인에 가족분들이 다 계신 건가요?”
“그래, 일단 씻으면서 숨 좀 돌려. 할머님 당장 안 돌아가시니까.”
연서는 고개를 숙여 다시금 제 모습을 인지했다. 강 여사에게 걱정을 끼치고도 남을 차림이었다.
고시원에 들러 옷을 가져와야겠다. 아니, 고시원에 들러도 이렇다 할 옷은 없었다.
차라리 사 입어야겠다. 돈은?
이제야 아까 승빈의 차에 가방을 두고 내린 게 생각났다. 역시 승빈을 먼저 만나야 할까.
“차로 가.”
“저는…….”
“의견 구하는 거 아니니까, 얌전히 타자.”
“어디로 가는데요?”
“여러 번 말하게 하는 것도 재주지.”
태헌이 연서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게 마치 침착해지란 조언처럼 느껴졌다.
연서가 방방 날뛰어도 강 여사의 건강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다. 차라리 그녀를 위해 무얼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생산적일 거다.
이 이상 태헌을 더 거절할 힘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태헌이 열어준 조수석에 올랐다. 차 문을 닫기 전에 태헌이 재킷을 벗어 연서의 무릎 위로 던졌다.
“감기 걸리고 싶지 않으면 입어.”
커다란 재킷을 품에 안은 연서는 머뭇댔다. 그의 재킷을 받는 건 두 번째였다.
“입혀줘?”
“입으려고 했어요.”
그의 물음에 연서는 얼른 팔을 끼워 넣었다. 태헌의 차에 그의 향수 냄새가 진하게 묻어났다. 향수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의 향은 어딘가 달랐다.
시원하고 중독적인…….
“이사님, 부조 많이 하셨던데…….”
핸들을 잡은 태헌이 기가 막히는지 작게 실소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장례식 비용 낼 수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더 달라고 하든지.”
“…….”
“나한테 한연서, 그 정도는 돼.”
“……그게, 무슨.”
“여기까지 달려오게 해놓고 모르는 척하지 마. 너 때문에 중요한 일정이 뒤로 밀렸어.”
가슴에 불이 붙은 것 같아서 연서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저는 그러라고 한 적 없어요.”
“이러니 정신 못 차리지.”
태헌이 핸들을 크게 감았다. 태헌이 이러는 이유가 성적인 호기심에서 기인한, 그저 욕망의 흐름이란 걸 알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우승빈이 다른 말은 안 해?”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었어요. 저 그냥 고시원에서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대답이 없는 거로 보아 연서의 바람은 무시되었다.
그의 차가 어디로 향할지 장담할 수 없는데, 고시원으로 가달라고 마냥 우기지 않는 건 태헌을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연서는 조심히 핸드폰을 열어 부재중 전화가 찍힌 승빈의 자취를 확인했다.
[연서야, 이러지 말자.]
[우 부장님,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얘기해요. 선생님께 다른 말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몇 번이나 지웠다가 쓴 메시지를 전송했다. 깊은 한숨이 흘렀다.
조용하게 질주하는 자동차의 진동에 몸을 맡기자, 우습게도 잠이 밀려왔다.
연서는 바위처럼 무겁게 짓눌리는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깊게 잠들었다.
*
그녀가 눈을 뜬 건 사위가 캄캄해진 뒤였다. 눈을 깜빡거린 연서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낯선 향이 난다 싶었는데, 태헌의 재킷을 푹 덮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운전석에 앉은 그가 보였다.
태헌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상가 건물에서 새어 나온 빛이 수려한 외모를 비추었다. 반듯한 생김새는 우태헌을 장식하는 중심 요소였다.
나쁜 사람인데도 고요하게 잠든 얼굴을 보고 있자 무언가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어났으면 올라가.”
태헌이 눈을 뜨며 말했다. 잠든 줄 알았는데, 그의 목소리는 깨어 있던 듯 멀쩡했다.
“여긴 어디예요?”
“오피스텔.”
필로티 주차장 같았다. 결국 이리로 왔구나. 연서는 물러날 길이 없는 걸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했…….”
연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태헌이 차에서 내렸다. 연서도 서둘러 차에서 내려 공동현관 앞에 선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태헌이 앞에 서기만 했는데 문이 열렸다. 로비엔 보안요원이 여럿 있었다.
두 사람을 향해 프런트 직원이 인사했다. 연서가 알고 있는 오피스텔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저 혼자 들어갈 수 있어요.”
태헌은 대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설마 집까지 따라오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는 현실이 되었다. 태헌은 집주인인 걸 과시하듯 직접 12자리의 비밀번호를 해제했고 연서는 그 뒤를 불안하게 쫓았다.
오피스텔 내부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고급스러웠다. 주방과 다용도실을 지나자 거실이 있고, 양쪽으로 문이 하나씩 있었다.
태헌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시계를 풀어 아일랜드 식탁 위에 얹었다.
왜지? 연서의 시선을 느낀 그가 돌아서 말했다.
“우승빈 얘기 마무리된 거 아니야. 거짓말할 생각 말고 솔직하게 말해.”
태헌이 뭔갈 아는 것처럼 추궁하자 입이 말랐다. 그가 협박했다고. 그래서 볼품없이 부탁까지 했다고 말하면 태헌은 뭐라고 할까.
정말 말을 해도 될까 고민하는 사이 태헌이 말을 덧붙였다.
“또 입이라도 맞췄어?”
“…그게 궁금하신 거였어요?”
“전적이 있는데 그럼.”
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마치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늠하려는 눈빛이었다.
“네 입으로 그랬지, 다시는 우승빈이랑 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연서는 억울했다. 승빈을 만난 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목에 힘을 주었다.
“했으면요?”
“헤프게 굴면, 곤란한데.”
“우 상무의 일로 협박받았어요.”
“겁대가리를 상실했고.”
태헌의 날카로운 목울대에 초점을 맞춘 연서는 젖은 몸을 살짝 떨었다. 순간 그녀의 몸이 붕 떠올랐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춥다고 시위하면서 친절은 싫어?”
태헌이 성큼성큼 걸어 침실로 들어섰다. 바닥이 생각보다 멀었다. 놀란 연서가 살고자 그의 몸을 붙들었다. 태헌이 작게 웃는 것 같았다.
침실 안쪽의 욕실에 그녀를 내려준 태헌이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말했다.
“씻고 나와. 옷장 열면 옷 있을 거고.”
태헌이 욕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하아…….”
승빈의 일로 죄인이 된 것처럼 간을 졸이다니. 태헌에게 절대로 도움을 청하지 않겠단 다짐을 했으나, 그 경계가 모호했다.
우승빈의 일은 제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태헌도 연관된 일이니 도움을 청해도 되는 걸까.
“몰라, 모르겠어…….”
연서는 호화롭기 짝이 없는 욕조에 걸터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양심과 도덕, 가책과 알맞은 선. 감정과 이성이 제멋대로 뒤엉켜 연서를 몰아세웠다.
그리고 태헌은 엉망이 된 벽을 허물고 자꾸만. 자꾸만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껴안아 버렸어.”
조금 전 태헌에게 바짝 달라붙어 욕실로 이송된 신세를 뒤늦게 타박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태헌이 문을 따고 들어올 것만 같아 물을 틀고 그 아래로 몸을 욱여넣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살갗으로 퍼져나가자 몸이 노곤해졌다. 연서는 간단히 씻고 가운을 걸친 채 문을 빼꼼히 내밀었다.
태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심하고 침실 벽 한쪽을 채운 옷장을 밀었다. 여러 벌의 옷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태그를 제거하지 않은 새것뿐이라 선뜻 입기 꺼려졌으나, 가운만 입고 나갈 순 없었다. 고민하던 연서는 적당한 홈웨어를 찾아 걸쳤다.
밖으로 향하자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상을 치르는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한 터라 위가 요란하게 요동쳤다.
태헌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가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식사부터 해.”
아일랜드 식탁 위엔 따뜻한 전복죽과 반찬, 물과 식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태헌이 직접 용기 뚜껑을 열고 반찬을 놓아둔 걸까.
기다란 손가락으로 펜대나 서류가 아닌, 반찬 뚜껑을 열었다는 게 영 상상이 되질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이사님은요?”
“한연서 씨나 많이 먹고, 정신 좀 차립시다.”
“…….”
말을 해도 꼭 밉살스럽게 했다. 속으로 투덜거린 연서는 높은 스툴에 걸터앉아 죽을 떠먹었다.
한입 먹자마자 입맛이 확 돌았다. 연서는 허겁지겁 빈속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