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태헌의 지시에 덩치 좋은 가드가 나섰다. 그가 가운데 앉은 남자에게로 다가가 입을 막아둔 헝겊 뭉치를 꺼냈다.
“으어헉!”
잠시간 기절했던 남자가 깨어났다. 피투성이의 남자는 맨발이었다.
제 양말이 시뻘건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던져지자, 남자의 흐려진 동공이 진동하듯 흔들렸다.
“왜, 왜 이래! 빌려 간 돈을 받으려던 것뿐이야!”
성큼 한 발 앞으로 다가간 태헌이 돌연 남자의 머리칼을 잡아 뒤로 꺾었다. 고개를 한계까지 당기자 남자의 안구가 돌출되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커헉, 컥!”
“그럼 돈만 받아야지.”
“커흑! 놔, 놔줘!”
“어쩔까. 난 머리카락 가지곤 성에 안 차는데.”
태헌이 휘어진 목을 부러뜨릴 듯 툭툭, 손끝으로 남자의 목울대를 쳤다. 눈깔이 뒤집힌 남자의 입에서 허연 침이 줄줄 흘렀다.
칼을 들고 여자를 겁박하는 종족이라니, 후져도 너무 후졌다. 태헌이 남자가 앉은 의자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남자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둥댔다.
배를 뒤집어 깐 벌레처럼 무력한 발버둥이었다. 태헌은 표정 없이 그를 주시했다.
이런 일에 태헌이 직접 나선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질한 허드렛일까지 직접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태헌이 직접 행차한 건, 장례식장 등나무 아래서 마주한 연서가 마음에 박히도록 처량했기 때문이다.
고작 이딴 것들에게 당해서 벌벌 떨던 한연서.
불쌍한 건가. 그럼 동정인가?
성욕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불쾌한 기분이 태헌을 잠식했고, 이리로 걸음 하게 했다. 하여간 사람 복잡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그 유일함이 성가셨으나 즐기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지루하고 무료한 세상이 한연서로 인해 한 부분 알록달록해졌고, 태헌은 자연스레 그리로 눈을 두었다.
언젠간 잿빛이 되어 사라질 터니, 그전까지 조금 어울리면 되는 거다.
다만 연서가 자의로 제 곁에 머물길 바랐다. 시한부 관계에 굳이 필요 없는 부분인지 모르겠으나, 연서가 마지못해 끌려오는 건 영 재미가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 도와달란 말 정도는 해야지.
그녀의 삶에 개입할 여지를, 연서 스스로 원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정리하니 성욕의 해소보다는 연서가 스스로 손을 뻗길 기다리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아 헛숨이 흘렀다.
태헌이 발을 돌려 다른 남자 앞에 섰다.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얼굴이 터진 남자는 연서를 뒤에서 결박했던 이였다.
연서를 으스러뜨릴 듯, 더러운 팔로 구속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머리가 없으면 몸에 새겨주는 게 확실히 빠르지.”
콰당. 두 번째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간 충격으로 신음을 흘리는 남자를 연서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와달란 말이 자존심보다 무거운 여자이니, 아마 폭력에도 면역이 없겠지.
이러지 말라고 태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거다.
멍청하고 순진한, 어디 가서 호구 잡히기 딱 좋은 한연서.
그런 연서를 지키려는 양 직접 뛰쳐나온 태헌의 꼴도 우습긴 매한가지였다.
“이사님.”
잠시 통화를 위해 밖으로 나갔던 신 비서가 돌아왔다. 짙은 삭막함에 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게 태헌의 곁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이사님, 알아봤는데 한연서 씨 빚을 벌써 갚았답니다.”
태헌이 바닥에 뒹구는 남자를 눈짓하며 물었다.
“3억이라던데. 그걸 한연서가 무슨 수로 갚아. 혹시 백현호?”
“그게 아니라……. 우승빈 부장님 쪽 같습니다.”
우승빈? 태헌의 미간이 느리게 좁아졌다.
개 같은 수작이지. 연서 주위를 빙글대는 거로 보아 쉽게 물러나진 않을 거로 생각하긴 했다.
잠시 고뇌한 태헌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미국 아니, 중국이나 동남아 쪽으로 자리 알아보죠.”
“죄송하지만, 무슨 자리를…….”
“우승빈 승진시켜요. 눈앞에서 치우란 소립니다.”
“네. 이사님.”
수초 뒤에야 신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승빈을 멀리 보내란 뜻을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연서, 우승빈이랑 같이 있습니다. 놓치지 말고.”
“네, 이사님.”
태헌이 구둣발을 들어 잔인한 소리가 날 때까지 남자의 손가락을 짓밟았다.
연서를 압박했던 그 손가락을.
“으으윽!”
비명에 찬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다음은 어깨였다.
*
“하!”
연서는 숨을 헐떡이며 인도에서 내려와 단숨에 도로를 횡단했다. 신고 있던 슬리퍼를 잃어버려 발바닥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 전 연서는 하는 수 없이 승빈의 차에 올랐다. 그러나 병원과 반대로 움직이는 걸 보고 있자니 초조해졌다.
기회를 엿보다 차가 잠시 정차한 사이에 도망치듯 뛰어내렸다. 멀리서라도 좋으니 강 여사의 얼굴 한 번만, 잠깐이라도 뵙고 싶었다.
문식이 죽었을 땐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 질식할 듯 다가오고 있었다. 당장 강 여사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아서….
“하아…….”
숨을 몰아쉬며 병원을 올려다본 연서는 걸음을 빨리했다. 승빈도 아마 연서가 이리로 향한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그가 도착하기 전에 가야 했다. 협박받는 처지이니, 끝까지 달아나진 못하겠지만 단 30분이라도 시간이 필요했다.
연서를 알아본 간호사가 웃는 얼굴로 물어왔다.
“왜 다시 오셨어요? 아, 뭐 두고 가셨구나?”
“안녕하셨어요.”
“병실 아직 정리 안 했으니까 얼른 가 보세요.”
“정리라니요?”
연서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방금 퇴원하셨잖아요?”
“선생님이, 퇴원하셨다고요?”
“네. 강순미 환자분 조금 전에 나가셨는데……. 혹시 모르셨어요?”
“아….”
연서가 울 듯이 웃었다. 그런 큰 병을 진단받고선 이렇게 빨리 퇴원하다니.
용인 집에서 남은 생을 정리하신다는 게 정말이었구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치료해보시지도 않고 이렇게 덜컥.
통증이 심하실 텐데 어떻게 참으시려는 거지.
한꺼번에 많은 감정이 들어 어지러웠다. 연서는 비틀거리며 옆을 짚었다.
삶의 끝을 선고받은 환자들이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큰 비용을 들일 만큼 넉넉하지 못해서, 혹은 손을 쓸 수 없어서. 고통을 짧게 끝내고 싶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생을 정리하는 데 쓰고 싶어서.
강 여사도 아마 비슷한 이유로 빠른 퇴원을 강행했을 터다. 병원을 좋아하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집으로 향했겠지.
하지만 이런 결정을 강 여사의 자식들이 쉬이 수긍했다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뭐라도 해보려 노력하지 않은 걸까, 왜.
“정말 유감입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멍하니 선 연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 간호사가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사라졌다.
병원 복도에 오도카니 선 연서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혼자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렇게 병실을 눈앞에 두고 연서는 돌아섰다. 눈물을 참느라 콧대가 시큰하게 아렸다.
다시금 강 여사에게 전화했으나 핸드폰이 꺼져 있단 말이 기계적으로 돌아왔다. 다섯 번이나 전화를 걸고선 통화를 포기했다.
퇴원 후 용인으로 가시지 않고 자식들의 집으로 가셨을지도 모른다. 본가에 가셨을지도 모르지.
가족끼리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으실 거야.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려 연서가 재빨리 액정을 확인했다.
우태헌 이사님.
연서의 눈이 조금 더 젖어 들었다.
*
잠시간 소강되었던 장맛비가 재개되었다. 연서는 병원 로비에서 빠져나와 먹구름이 낀 하늘을 힘없이 올려다보았다.
주차장을 끼고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태헌이 병원 아래로 내려오란 말과 함께 통화를 종료한 터라 말 잘 듣는 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빵-
클랙슨 소리에 연서가 다급히 인도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차가 물웅덩이를 밟고 쌩하니 지나간 탓에 물이 거칠게 튀었다.
하반신이 몽땅 젖어버린 연서는 허탈하게 웃었다. 우산 없이 걷고 있어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오늘 아침 지영이 가져온 검은 셔츠와 슬랙스가 새 옷인 게 무색하게 후줄근해져 있었다. 맨발로 거리를 달리고 비를 맞고 물을 뒤집어썼으니 멀쩡할 수가 없었다.
이 꼴을 태헌에게 보여야 한다니. 그의 비웃음이 벌써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모르는 사연이 또 있는 건가?”
태헌의 목소리에 연서의 고개가 들렸다. 커다란 장 우산을 쓴 태헌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사님…….”
“아니면 할머님 때문에 넋 놓고 다니는 거야.”
“서, 선생님이 정말 선생님이 아프신 건가요?”
“그래. 우승빈한테 들었나 보네.”
한 가닥 희망이 사라졌다. 연서가 괴로움을 참고서 물었다.
“우 부장님 만난 건 어떻게 아셨어요?”
“사채업자가 네 목만 노리는데 감시라도 해야지. 아는 사람이 산송장 되는 건 나라도 꺼림칙해.”
무언가 울컥했다.
“제 행방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여기 또 있었네요.”
“누구와 비교하는 걸까.”
약간 성난 것 같은 말투였다. 태헌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제 목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앞으론 감시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지.”
태헌이 의외로 선선히 대답했다.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졌다. 태헌은 우산 아래의 그늘로 눈짓했다.
“이리 와.”
하도 자연스러워 연서는 하마터면 그리로 달려갈 뻔했다.
“선생님 왜 벌써 퇴원하신 거예요? 그럼 지금은 어디 계세요?”
“용인 집. 그 고집을 말릴 사람이 있나.”
“선생님이 정말 그러자고 하셨어요? 치료 더 안 받으시겠대요?”
“그래.”
태헌의 무표정이 언제나처럼 무섭고 불편했으나 연서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가족분들도 동의하신 거예요? 그래도 통증이 심할 텐데, 처치는 어떻게 하실 거래요?”
“할머님 뜻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막겠어. 죽음을 앞두었다는데 감히 어떻게 훈수 둬. 아니면, 내가 할머님 고집을 꺾고 입원을 강제해야 했나?”
대답이 꼭 태헌도 답을 찾지 못한 것처럼 들렸다. 마치 그도 혼란스러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