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비서-21화 (21/85)
  • 21화

    *

    이 감정은 미움일 텐데, 그래서 가슴이 갑갑한 것일 텐데 왜 이리 떨리는 거야. 바보처럼.

    “곧 생기겠죠. 무슨 일이세요?”

    -잘 있나 확인차. 아직은 문제없어 보이네.

    연서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아직도 제가 살아 있네요.”

    미련하게도 문식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조차 없었다.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정말 힘들었으니까. 그러나 그러기엔 세상에 미련이 많단 걸 깨달았다.

    몇 안 되는 소중하고 좋은 이들을 불행에 빠뜨릴 만큼 연서는 모질지 못했다. 따뜻한 정을 나눠 준 강 여사와 현호, 지영까지.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떠날 순 없었다.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담대함이 연서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태헌을 상대로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쉬어. 간병할 사람은 많으니.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선생님 걱정돼서 편히 쉬지 못해요.”

    -너 보면서 조마조마할 사람도 생각해야지. 어른답게 처신해.

    연서가 무어라 항변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연서야.”

    음성이 들려온 곳에 승빈이 있었다. 차에서 내린 그가 언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냐는 듯 환한 미소를 띠며 연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전화 중이야?”

    밤색 격자무늬 슈트를 입은 그는 겉보기에 근사했다. 전이라면 그런 승빈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억지라도 웃어주고 싶지 않았다.

    연서가 힘없이 핸드폰을 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장례식 못 가서 미안해, 일이 바빴어. 같이 온 친구는 어디에 있어? 인사하고 싶었는데.”

    같이 온 친구라면 지영을 말하는 것일 터, 연서의 뺨에 솜털이 곤두섰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음?”

    연서가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제가 지영이랑 온 거 어떻게 아셨냐고 물었어요.”

    “그게 중요해?”

    조금 메시지를 통해 승빈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확인받은 뒤였다. 예전엔 부드럽게만 보이던 그의 미소가 악귀의 가면처럼 가증스러워 보였다.

    “친구는 먼저 올라간 거야?”

    승빈이 바짝 다가오는 바람에 연서가 핸드폰을 놓쳤다. 순식간에 남은 거리를 좁힌 승빈이 핸드폰을 주워 연서에게 내밀었다.

    “자.”

    짧은 순간 승빈의 시선이 액정에 닿는 걸 보고 말았다. 전화가 막 꺼졌는지, 우태헌 이사님이란 글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전화 상대가 태헌이었네.”

    승빈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변모한 것 같은 건 착각이었을까, 그가 다시 빙긋 웃었다.

    연서는 돌려받은 핸드폰을 서둘러 가방에 쑤셔 넣었다.

    “우리도 이제 가자.”

    승빈이 자연스럽게 연서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를 가요?”

    “장례식 다 끝났잖아. 돌아가야지.”

    “아직 안치 못 했어요. 그리고 이거 놔주세요.”

    연서가 끌려가며 말했다. 손목이 또다시 욱신대기 시작했다.

    태헌이 뜨겁다면 승빈은 차가웠다. 뱀에게 손목이 감긴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지는 온도였다.

    연서가 재차 팔을 비틀며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자, 승빈이 한숨을 쉬며 뒤돌았다.

    “연서야, 너희 아버지 한문식 씨 너한테 빚만 주고 간 사람이잖아. 이 정도 했으면 도리는 지킨 거야. 굳이 마지막까지 예를 갖출 필요가 있을까?”

    “……빚이 있단 건 어떻게 아셨어요?”

    “잠시 후에 내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거야. 나머지는 걱정하지 마. 알아서 정리할게.”

    “우 부장님, 이건 제 문제예요. 타인이 정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제가 할 일이라고요.”

    “아직도 화나 있네. 전에 그 일 때문이라면 사과했잖아. 마음이 그렇게 안 풀려?”

    아무렇지 않게 팔을 뻗어 껴안으려 드는 승빈에게서 바닥을 보고 말았다. 그는 아닌 척하며 연서를 짓밟고 있었다.

    그녀의 분노를 속 좁은 연서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화 풀래. 우리 그동안 좋았잖아. 한 번의 실수로 이러기야?”

    차라리 대놓고 멸시하는 태헌이 나을 정도였다. 승빈은 연서를 위하는 척하면서 그녀의 마음을 속단하고 있었다.

    “저 이제 부장님 안 볼 거예요.”

    “뭐?”

    결심한 투에 승빈이 기막히다는 듯 되물었다. 연서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확고한 뜻을 전했다.

    “당신이 싫어요.”

    싫어. 네가, 싫어.

    “싫어요, 너무.”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는 거절이었다.

    “들으셨잖아요. 저는 우 부장님이 싫어요.”

    강 여사에게 해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승빈은 멀리해야 해야 옳은 이였다.

    잠시 얼어붙었던 승빈이 지겹단 투로 한숨을 내쉰 뒤 담배를 빼 입술에 물었다. 찰칵, 값비싼 라이터가 작동하자 시뻘건 불씨가 달라붙었다.

    그 끝이 연서의 속처럼 훨훨 타올랐다.

    “연서 빚 많은 거 할머니도 아니?”

    “그런 건 왜 묻는 거예요?”

    “그럼 새 빚이 생긴 것도 아시니?”

    “……우 부장님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까부터 이상했다. 지영과 함께 있는 걸 알고 온 눈치던데…….

    그가 연기를 내뿜더니 연서에게로 걸어왔다. 메케한 담배 연기가 연서의 안면을 뒤덮었다.

    고개를 숙인 승빈이 연서의 귀에서 속살댔다.

    “내가 그 비밀 지켜줄게.”

    “비밀, 이요?”

    “그러려면 우리 연서 많이 노력해야겠네?”

    소름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연서는 메마른 눈을 깜빡거렸다. 물러나 담배를 한 번 더 빨아들인 승빈이 말했다.

    “가자.”

    “아뇨.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참 이걸 말을 안 했네. 할머니 이번 검사에서 뇌종양 판정받으셨어.”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뒷골이 묵직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악성 뇌종양이고 위치가 안 좋아서 수술은 어렵다던데.”

    연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죠?”

    “왜 거짓말을 하겠니.”

    승빈의 한숨이 담배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어지러운 형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발밑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갑, 갑자기 왜요? 여태 괜찮으셨잖아요. 아무런 징후도 없었어요! 그런데 왜? 선생님이 왜요?”

    “난들 알겠어? 그렇지 않아도 이 일로 집안 발칵 뒤집혔어.”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방금도 통화했는데. 분명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목소리도 평소와 같았는데…….

    “얼마 못 사실 거야. 길어야 두 달.”

    승빈은 자비가 없었다. 연서의 희망을 모조리 말살시키며 확인 사살했다.

    “아니야…….”

    연서가 울먹이자 승빈이 난감하다는 듯 이마를 긁었다.

    “연서는 장례식 해야 한다고 입단속 시킨 거야.”

    “뵈어야겠어요. 지금 얼굴 뵈어야겠어요.”

    연서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우선은 지영에게 전화를 걸어 마무리를 부탁했다. 그러곤 다시 일어서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문식이 스스로 내버린 생을 강 여사에게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부조리함이 서러워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 병원으로 가봐야 연서 너 이리저리 채일 거야. 괜히 고모들한테 걸리면 네 탓이라고 머리채 잡힐지 몰라.”

    고모들이라면, 강 여사의 딸들이었다. 몇 번인가 용인 집을 방문했을 때 얼굴을 본 적 있었다.

    승빈의 말대로 호락호락한 성격들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강 여사를 보는 일을 미룰 순 없었다. 당장 얼굴을 뵙고 그녀의 안위를 확인해야만 했다.

    “할머니는 연명 치료 대신 용인 집에서 지내고 싶어 하셔. 조만간 용인 내려가시니까 그때 봬.”

    “하지만…….”

    “할머니 생각해서 참아. 연서야, 너까지 들쑤시면 마음이 편하시겠니?”

    연서의 숨이 쌕쌕, 시큰하게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 강 여사에게 좋을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았다.

    “서울에 내 아파트가 있어. 당분간 거기서 지내.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네 걱정 많이 하셔.”

    “우 상무님이요?”

    “너 아버지 끄나풀이잖아.”

    연서는 음식을 잘못 삼킨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네가 우리 아버지에게 정보를 퍼다 나른 걸 할머니가 아시면 어쩌실까. 충격이 꽤 크실 거야? 가뜩이나 몸도 안 좋으신데…….”

    연서는 모르고 한 일이었다. 하지만 몰랐다고 해서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상황을 전부 알게 되면 또 쓰러지시겠지? 두 달이 뭐야 그 자리에서 넘어갈걸?”

    승빈은 지금, 명백한 협박을 하고 있었다.

    내 손을 잡아. 잡지 않으면 강 여사에게 모조리 털어놓을 거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강 여사가 그걸 알길 바라?

    태헌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서를 옥죄었다.

    “사실이 밝혀지면 우 상무님도 곤란한 거 아닌가요?”

    “그래, 그러니까 이왕이면 할머니한테 좋은 모습을 보이자는 거야.”

    승빈이 담배 냄새가 나는 손으로 연서의 젖은 뺨을 닦아냈다.

    “응? 연서야, 내 말 들어.”

    손길이 역겨웠다. 크고 가지런했던 누군가의 손과 자꾸만 비교되었다.

    *

    재건축을 기다리는 허름한 건물 안. 먼지로 얼룩진 창문에서 희미하게 햇볕이 들어왔다. 오래된 사무실 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태헌의 번쩍거리는 구둣발이 오염된 바닥을 누르며 천천히 움직였다. 구둣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의자에 묶인 남자들이 양말에 틀어막힌 입으로 끙끙 소리를 냈다.

    얼굴이 퉁퉁 부은 그들의 몸에는 구타의 흔적이 가득했다. 기절한 채로 신음을 흘리는 거다. 그러나 태헌은 그런 것엔 관심이 없었다.

    까맣게 죽어버린 액정을 바라보다가 이너 포켓에 핸드폰을 넣었다. 연서와의 전화가 말없이 끊겼다.

    매끄럽게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간 핸드폰 너머에 연서가 있었다. 승빈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함께.

    붙여둔 자석의 보고에 의하면 연서는 발인을 마치고 이지영과 함께 납골당으로 향했다. 혼자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친구라도 함께 있으면 의지가 되려나, 싶었는데 우승빈이란 불청객이 끼어든 듯싶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린 연서의 낯이 자꾸만 어른거려 기분이 뭣 같았다. 병 걸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치솟았다. 발갛게 물든 귓바퀴에서 나던 풋내를 떠올리면 아랫배에 열이 몰리기 일쑤였다.

    그녀에게 성욕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말끔히 해소하기 전까진 연서를 내칠 순 없었다.

    태헌은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야 하는 성미였고, 이런 찝찝한 기분으로는 연서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못했다.

    “깨워.”

    태헌이 짧게 명령하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