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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20화 (20/85)
  • 20화

    *

    “녀석하고는.”

    우 상무가 혀를 차면서도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태헌이 어떤 자식이던가. 용인에 내려간 이상 이미 한연서를 제 편으로 매수했을지 몰랐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이 선생님의 건강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지난번 본가를 찾아온 연서가 갑자기 그런 걸 물었을 때 의심이 들었다. 혹시 태헌에게 뭘 듣고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아닐까.

    그동안 아무런 의심도 없이 꼬박꼬박 우 상무에게 정보를 갖다 바치지 않았는가.

    우 상무는 그날의 의심을 완벽히 거두지 않은 채였다.

    “그럼 그 처자도 네가 좋다더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승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연서 빚 많아요, 아버지.”

    “그래서, 네가 갚아주겠다는 거야?”

    연서에게 사채가 있단 건 알고 있었다. 이번에 죽었다던 그 무지렁이 아비가 진 빚. 그건 쥐고 흔들기 좋은 패인 건 분명했다.

    “궁지에 몰렸는데 어쩌겠어요. 연서는 좋든 싫든 저를 택하게 될 거예요.”

    하긴. 더는 내려갈 길 없는 곳이니, 재고 따질 여력이 없겠지.

    태헌이 아무리 한연서를 자신의 편으로 매수했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빚은 탕감해 주면서까지 그녀를 곁에 둘 이유는 없을 거다.

    결국 돈이 승리할 터였다. 돈이 돈을 부를 테고.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어디.”

    “고맙습니다, 아버지.”

    승빈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어른스러운 모습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마, 연서랑 약혼한다고 하면 제 앞으로 호텔 하나 정돈 더 받을 수 있을 거예요. 할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우리 연서 이름으로 호텔 지분 정도 사 주는 게 어떻겠냐고 저한테 물으신 적이 있거든요.”

    “그래?”

    이 말대로라면 적어도 승빈 앞으로 계열사 하나 정돈 떨어질 거다.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눈치 봐서 결혼까지 해도 좋다.

    증손주까지 만들면 또 모르지. 그 아이 앞으로 몫을 떼어줄지.

    한 번 다녀오는 거야 아무런 흠도 아니었다. 강 여사가 죽은 뒤 이혼시키면 된다.

    이제 강 여사의 건강이 나빠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강 여사가 죽고 나면 태헌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될 터였다.

    며칠 동안 머리를 누르던 무거운 것이 형체도 없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우 상무는 제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찾아올 생각이었다.

    *

    장례 절차는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정신없었다. 조의금을 털어 장례식 대금을 지불하고 화장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연서는 멍한 상태였다.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잘 와닿지도 않고, 자신이 무어라 하는지도 감지가 안 되는 그런 상태였다.

    다행히 아침에 연차를 쓰고 친구 지영이 달려왔다. 대학 동기인 그녀는 단숨에 절친이 됐을 만큼 성격이 활발했다.

    넋 나간 연서를 대신해 지영이 남은 일 처리를 도왔다. 화장을 참관한 뒤 유골함을 받았다.

    무슨 정신으로 상복을 벗고 지영의 차에 탔는지 기억이 없었다. 연서는 제 품에 안긴 유골함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남은 절차를 생략한 채, 지영과 단둘이 납골당으로 향하기로 한 건 잘한 일이었다. 더 비용이 드는 게 아까웠고, 인제 그만 못난 부친을 보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유골함을 아무 데나 두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평생 가슴에 밟힌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꾹 참아냈다.

    “출발할게.”

    “응.”

    지영의 말에 연서가 힘없이 대꾸한 후 조수석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미안하고 고마웠으나 그조차 내색하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연서야, 납골당이 어디라고 했지?”

    운전석에 앉아 내비게이션을 누르는 지영의 목소리에 재깍 반응하지 못하자, 그녀가 알아서 유골함을 안치할 납골당 주소를 찾아 입력했다. 이어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

    한동안 머뭇대던 지영이 연서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연서야.”

    “응.”

    “너 정신과 상담 한번 받아볼래? 나도 진료받은 적 있는 선생님인데 꽤 괜찮아.”

    “정신과?”

    창밖에 고정되어 있던 연서의 고개가 그녀를 향하자, 지영이 얼른 손을 휘저었다.

    “야, 그거 이상한 거 아니야. 상담하고 나면 마음 편해지니까 너한테도 추천하고 싶어서….”

    다시 앞을 바라본 연서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필요하면 말할게.”

    “꼭 말해. 알았지?”

    “알았어.”

    연서가 애써 웃자 그제야 지영이 조금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상담이라니, 그녀의 처지에 사치였다.

    “연차 쓰는 거 눈치 보인다며. 나 때문에 곤란했겠다.”

    “어휴. 선생님, 연차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겁니다.”

    잠시 눈을 붙이란 지영의 걱정에 연서는 눈을 내리감았다. 따끔따끔할 만큼 눈이 아팠으나 잠은 오질 않았다.

    슬픔보단 이제 빚을 어떻게 갚을지, 그 막막함에 숨통이 조여들 뿐이었다. 차라리 문식이 지옥으로 떨어지길 기도했다.

    끝까지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 이젠 원망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는 끝까지 몹쓸 아버지였다.

    문득 도와달란 말이 어렵냐고 조소하던 태헌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힘없이 축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액정을 비추었다. 강 여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높은 톤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연서야, 그래 나다.

    “죄송해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연락할 정신이 어디 있었겠어. 그래, 다 끝난 게야?

    “네. 이제 거의 다 끝나가요.”

    유골함을 안치하고 사망신고만 하면 정말 끝이었다. 그조차 연서의 손으로 해야 하지만 장례식의 막바지에 다른 건 조금 홀가분했다.

    누구. 라고 묻는 지영의 입 모양을 보며 연서가 선생님이라고 대꾸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에 집중했다.

    -연서야, 며칠 푹 쉬어야 한다. 사람 잃은 빈자리를 어떻게 채우냐만은 그래도 잘 먹고 잘 자야 한다.

    “저 괜찮아요. 저녁 식사하시기 전에는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여긴 됐으니 한 며칠 쉬다 오거라.

    “제가 뵙고 싶어요. 선생님, 그러고 싶어요.”

    연서의 사무침을 읽었는지 강 여사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연서 어떻게 하누. 이 착한 것을 혼자 둬야 하니…….

    가뜩이나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공연히 걱정을 끼친 것 같아서 연서가 화제를 돌렸다.

    “검사 결과는 아직 안 나왔죠?”

    -그래, 다 괜찮다. 여긴 다 괜찮으니 내 걱정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라.

    “네. 그럼 이따 뵐게요.”

    전화를 끊자 뜨거운 것이 목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기분이었으나, 연서는 옆에 앉은 지영을 의식해 참아냈다.

    무너지면 안 된다. 지금 무너지면 끝없이 추락할 것 같아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놓으면 그대로 발밑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왜, 뭐라고 하시는데?”

    지영이 내용이 궁금했던지 핸들을 감으며 물었다.

    “그냥. 내 걱정하시지.”

    “그래, 우리 연서 걱정하는 사람 차암 많다. 그러니까 밥 좀 잘 먹자? 얼굴이 그게 뭐니.”

    “응. 그럴게.”

    연서는 하얗게 질린 손으로 새로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현호에게서 온 장문의 문자를 읽자 코끝이 찡해졌다.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해라.]

    괜찮다고 답장을 작성해 전송했다.

    그다음은 신 비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오피스텔 주소와 비밀번호입니다.]

    이런 동안에도 연서는 착실히 태헌의 그늘로 욱여넣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태헌일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신 비서에게서 온 메시지는 몇 개 더 있었다. 연서가 남은 글귀를 마저 읽어내렸다.

    [보약 성분 결과 나왔습니다. 예상대로 표고버섯이 미량 확인되었습니다. 한의원 직원 말에 의하면 우 상무 측에서 원한 약재로 약을 지었다고 합니다.]

    신 비서가 직접 연락해온 게 조금 의아했으나, 이어지는 말에 사고가 정지했다.

    [약을 지어간 사람이 우승빈 부장님이랍니다.]

    “하…….”

    뜨거운 숨이 토해졌다.

    [직접 약재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역시 우 상무와 한통속이었구나. 그 아비에, 그 아들.

    피가 섞인 가족을 해치려는 그들의 저의를 연서가 감당하기엔 너무 날카로웠다. 누군가 칼날로 쑤시는 듯 온몸이 따끔거렸다.

    한문식 같은 자들이 세상에 이렇게 많다니.

    그럼 이제 승빈에게 좋은 사람일 이유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차라리 잘되었다. 조금의 미안함도 없이 그를 거절할 수 있으니까.

    납골당이 눈앞에 보이자, 연서의 숨이 더욱 느리게 무거워졌다. 유골함의 무게가 쇳덩이 같았다.

    문식의 유골을 떠나보낸 후엔 채무에 짓눌리는 일만 남았다. 아니면 그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팽팽한 끈 위를 아슬아슬 곡예하는 기분이다. 언제쯤 이 생사를 건 등반이 끝이 날까.

    주차를 마친 지영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보닛을 돌아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거 이리 줘. 계단 많다.”

    “내가 들어도 돼.”

    “하이고, 그 팔로? 이리 줘. 그러다 떨어뜨릴라.”

    연서는 유골함을 맡기고 가방을 챙겼다. 그 순간 액정이 밝아지며 핸드폰이 울렸다.

    “지영아, 먼저 올라갈래? 잠깐 전화만 받고 갈게.”

    “누군데 그래?”

    “고용주. 먼저 가 있어. 금방 갈게.”

    “그래, 천천히 와.”

    시간을 확인한 지영이 절차를 밟기 위해 움직였고, 연서는 커다란 나무 밑으로 향했다.

    재앙이 닥친 와중에도 날씨는 참 예뻤다. 비가 갠 뒤 내리쬐는 햇살에 연서가 눈을 찡그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답은 나왔나?

    흘러든 목소리가 어두웠다. 우태헌은 목소리도 그와 같았다. 그래서일까. 음성만으로 마음이 검게 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불편하고 어렵지 않게 솟아날 구멍 같은 게 있긴 한지 묻잖아.”

    이어지는 음성이 어쩐지 달콤해, 간신히 붙어 있던 외줄에서 결국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쿵. 이상했다. 갈빗대가 아플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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