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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19화 (19/85)
  • 19화

    *

    욕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올려다본 태헌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 서 있다. 기막혀하는 것 같았다.

    “들어가서 옷부터 갈아입어.”

    “안 가실 건가요?”

    문식의 영정사진 앞에서 절하려고 온 건 아닐 터다.

    “갈아입고 나와. 나와서 얘기해.”

    “상중이라 자릴 비울 수가 없어요. 다음에 얘기해요.”

    연서가 힘없이 웃은 뒤 그리고 돌아섰다. 어느덧 시커먼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연서가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도와달란 말이 어려워?”

    등 뒤에서 태헌이 조소하듯 물었다.

    “아까 그치들, 혼자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집요하고 더러운 수법을 쓰겠지.”

    “솟아날 구멍이 있겠죠.”

    “그 밧줄이 내가 되어줄 거란 생각은, 못 하나?”

    애첩의 의미는 사랑하는 첩이다. 거기엔 오류가 있었다.

    연서는 그냥 첩이었다. 그가 이용하고 싶을 때 이용하는…….

    태헌이 몽정할 만큼 그녀에게 아래가 동했다면, 몸을 섞고 나면 시들해질 그쯤의 관계.

    결혼도 안 했으면서 첩부터 만들 만큼 대단하신 분이니, 분명 연서를 도와줄 수도 있긴 할 터였다.

    그러나 이건 말을 바꿔 말하자면 스폰이었다. 그가 돈과 도움을 건네면 연서는 몸을 내어준다.

    언젠간 파멸로 끝날, 남겨질 이가 누군지 시작부터 분명한 관계.

    그런 건 싫었다. 가난한 건 통장이지 그녀의 자존심이 아니었다.

    관계를 정립할수록 연서의 심장으로 아릿하고 찌르르한 통증이 흘렀다.

    “도와달란 말이 어려운 게 아니라, 이사님이 어려워요, 저는.”

    “어떤 점이.”

    “전부요. 전부 부담스럽고 불편해요.”

    연서가 뒤돌아 그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비딱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따위로 웃지 마.”

    태헌이 경고처럼 말했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태헌이 말없이 돌아섰다.

    그가 사라지고 한참 뒤에야 연서는 어깨에 태헌의 재킷이 둘려 있단 걸 깨달았다. 옷자락을 꼭 쥐고서 바람이 넘실거리는 속내를 단속했다.

    그에게 자꾸 빠져드는 건, 자신의 상황이 너무도 어두컴컴해서 그보다 더 어두운 태헌에게로 빠져들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보다 더한 막다른 길에 도달한들 태헌에겐 절대로 도움을 청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오로지 강 여사를 위해 그에게 묶여 있을 뿐, 다른 일로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겠다고.

    그래야만 했다.

    *

    고요한 아침. 전화를 받은 승빈이 벌떡 일어났다. 연서에게 붙여둔 수하에게서 연락이 온 터다. 잠기운이 단숨에 달아났다.

    “뭐? 태헌이가 거기에 갔어요?”

    -네. 직접 조문까지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채업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태헌이 찾아간 것도 놀라운데, 연서에게로 사채업자들이 찾아왔다고 했다.

    “얼마라고 했죠?”

    -3억이랍니다.

    “금액 맞춰서 송금하고, 영수증 확실히 받아요.”

    -3억을요?

    “그래요, 빠르게 처리 부탁합니다. 연서는 지금 발인 준비 중이죠?”

    -네. 이동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어요. 그대로 처리하고 다른 일 생기면 보고해요.”

    전화를 끊은 승빈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빚을 대신 갚아주고 그 부채감을 느끼게 하는 수법은 실상 흔했다. 문제는 태헌이었다.

    지예연에 함께 나타났을 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다. 한데 장례식까지 찾아갔다고?

    태헌은 누구에게든 다정다감한 성격이 못 됐다. 비서를 통해 조의금을 전하는 것만으로 유감의 뜻을 전할 순 있었을 터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설마 연서랑…….

    연서를 먼저 눈여겨 둔 건 승빈이었다. 멋모르고 착한 그녀가 귀여웠다. 얼굴이야 당연히 예뻤고.

    처음엔 한번 자 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얻고 싶어 말을 건네었고 연서는 순진하게도 금방 곁을 내주었다. 잘되어가던 연서와의 연애 사업이 이렇게 틀어진 건 태헌 탓이었다.

    “아니겠지.”

    되뇌어 보아도 여전히 찝찝했다. 과거를 되짚어보면 태헌은 언제나 승빈보다 앞서 있었다.

    안주할 때가 아니었다. 잠옷을 벗어 던지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바쁜 걸음으로 계단을 밟아 1층으로 내려갔다.

    승빈은 무례함도 잊고 부모님이 계시는 침실을 두드렸다.

    똑똑똑.

    제 힘이 닿지 않는 일이라면, 아버지 우 상무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아버지, 접니다.”

    “들어와라.”

    우 상무는 벌써 슈트를 갖춰 입고 넥타이를 고르고 있었다. 그의 성실함을 존경했다. 승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머니는요?”

    “숍에 갔어. 오후에 창립 기념 행사가 있지 않니. 무슨 할 말 있어?”

    “넥타이는 이게 낫겠어요, 아버지.”

    짙은 남색 넥타이를 건네주자, 우 상무가 그걸 건네받았다.

    “연서 말이에요.”

    “한연서 간호사?”

    안경알 너머로 우 상무의 눈가가 반응했다.

    “네, 아버지. 할머니가 연서 앞으로 유산 증여 생각하고 계시는 거 알고 계세요?”

    넥타이를 매던 우 상무의 손이 멈추었다. 됐다. 부친이 반응하자 승빈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연서를 제 여자친구 삼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우 상무가 생각지 못한 길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가늘게 좁혔다.

    라온 기획 상무 우장혁. 그는 본디 야욕가였다. 야망이 많은 본성을 웃는 얼굴로 포장했다.

    반대로 그의 두 살 아래 동생 우이혁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기계 같은 사람이었다.

    이혁은 굳이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다.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을 내세우며 굳이 그를 감추지 않았다.

    언제나 당당했고 자신의 선택에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평판에 예민한 우 상무와는 상극이었다.

    웃는 얼굴의 아들을 바라보며 우 상무는 자신이 처음 동생을 의식하기 시작한 오래전을 떠올렸다.

    날 때부터 모든 것이 우월했던 동생은 세상의 찬사를 받았다. 장혁은 본능적으로 경쟁자가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들어맞았다.

    우 상무는 평생, 동생과 경쟁했고 번번이 패했다. 그 결과 아버지 강 회장은 그룹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세원 홀딩스를 이혁의 손에 맡겼다.

    라온 기획의 상무인 그에 비하면, 세원 홀딩스 부사장의 자리에 오른 이혁이 한참이나 앞선 것이다.

    철이 들기 전부터 세원을 위해 헌신할 꿈을 가진 우 상무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다.

    우 상무의 노고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강 회장은 늘 이혁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강 회장은 죽어서까지도 우 상무를 좌절시켰다.

    이혁을 빼닮은 태헌에게 강 여사의 보위를 맡긴 것이다. 그 대가로 태헌에게 많은 유산까지 상속했다.

    장남이 자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대체 왜.

    축적된 질문은 증오를 낳았다. 그리고 욕심과 탐욕을 부추겼다.

    강 여사의 유산까지 태헌이 물려받는 건 죽어도 못 봤다.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고 있노라면 자다가도 눈이 떠졌다.

    “아버지.”

    골몰한 우 상무를 부른 승빈이 옅게 웃었다.

    그래, 그에게는 저를 닮은 아들 승빈이 있었다. 영민하고 처신에 강한 우승빈.

    아침부터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에 무슨 일인가 했는데, 승빈은 뜻밖의 이름을 꺼냈다.

    한연서라니, 생각지 못한 패였다. 우 상무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산과 한연서의 상관관계가 식을 세우듯 줄다리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보약 일은 단단히 입단속 해두었습니다.”

    “그래, 당연히 믿는다.”

    “김 원장님이랑 우리가 하루 이틀 사이도 아니고 쉽게 입 열 사람 아닙니다. 혹여 추궁당해도 적당히 둘러대면 될 일이죠. 그리고 뭐, 들켜도 어쩔 거야.”

    승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떨었다. 여우 같은 면이 우 상무를 빼닮았다.

    강 여사의 보약에 표고버섯을 미량 함유 시킨 건 의도적인 짓이었다. 가벼운 두드러기를 유발하려 했다.

    용인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강 여사를 움직이게 하려면 무언가 색다른 증상이 있어야만 했다.

    두드러기가 올라온 강 여사가 주치의를 부르면 진단을 통해서 서울 병원으로 그녀를 데려올 작정이었다. 꽤 전부터 주치의는 우 상무의 사람이었다.

    오늘내일하는 노인네가 병원에서 기력을 빼면, 그 핑계로 유언장을 새로 작성하자고 꾀어낼 작정이었다.

    강 여사는 계속 졸라대면 그 원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려면 곁에 두어야 했다.

    기존에 쓴 유언장의 내용을 알진 못했기에, 우 상무에게 유리하게 다시 써야만 했다.

    강 여사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재산을 공평하게 나눴을 거였다. 그리고 그 공평함은 우 상무에게 불공평이었다.

    평생 부모님을 모시고 산 것도 그였고 장남도 그였다. 그러니 더 많은 것을 가져야 옳았다.

    “그래도 알레르기 쇼크가 일어날 줄은 예상 못 했다.”

    “태헌이가 신주 병원으로 데려갈 줄도 몰랐죠. 뒤통수가 얼얼합니다, 아버지.”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머리가 아프던 차였다. 아예 전원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빠르게.

    그 점이 애석했으나 승빈이 아침부터 괜찮은 이야깃거리를 가져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후 승빈은 강 여사가 얼마나 연서를 예뻐하는지, 그리고 승빈과 연서를 얽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이 났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마음이, 승빈이 말을 더할 때마다 방향을 굳혀갔다.

    강 여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닐 터다. 강 여사는 한 번 사람에게 마음을 쓰면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연서를 손주의 짝으로까지 생각한다면 그녀를 정말 마음에 들어 한다는 뜻이다. 승빈의 말대로 어떤 식으로든 연서에게 크게 한 몫 떼어줄 터였다.

    그래도 우 상무가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기에 약간의 조바심은 남아 있었다. 우 상무가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정말 확실한 거지?”

    “그럼요. 할머니 연서 없으면 안 되실 정도예요. 저한테도 연서 자랑만 한다니까요.”

    그 간호사가 굴러들어온 복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다르게 써먹었을 것을.

    “그게 사실이라면 둘이 약혼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어?”

    “약혼이요?”

    놀란 듯 되물은 승빈이 곧 화색을 띠었다.

    “그 선생이 그리 마음에 드냐?”

    “연서 예쁘잖아요. 고분고분한 맛도 있고요.”

    누굴 닮았는지 승빈은 여성 편력이 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가치를 발휘할 때였다.

    승빈이라면 어수룩한 간호사 선생을 꾀어내기란 어렵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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