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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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는 듯 이른 장마가 시작되었다. 퍼붓는 비는 장례 기간 계속되었다.
관에 들어간 부친은 온기를 잃었다. 발인을 앞둔 조용한 새벽.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연서는 잿빛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현호는 스케줄이 있어 조금 전 떠났기에 지금은 연서 혼자였다. 미안해하는 현호의 등을 끝끝내 밀어낸 건, 미안함 때문이었다. 괜히 누가 알아봐서 그가 민망해지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등나무 벤치 밖으로 거세진 빗줄기가 지면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연서와 통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련한 아비는 그렇게 끝까지 연서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났다.
그럼에도 문식 때문에 웃었던 몇 안 되는 기억이 문득 문득, 수면 위로 떠 올라 괴로웠다.
“하…….”
한숨이 쓰디썼다. 그래, 이제 끝이야.
연서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하던 식당의 가스폭발 사고로 먼저 세상을 뜬 엄마를 생각하면 스스로 생명을 놔버린 문식이 비겁하기만 했다. 막대한 빚이 그녀의 삶을 틀어쥐고 겁박하는 삶은 문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누군가는 하루를 더 살고 싶어서 발악하는데, 문식은 책임을 회피하듯 세상을 등졌다.
더는 착한 딸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더니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버석 마른 가슴이 사막이 된 것 같았다.
몇 없는 조문객을 받는 동안 연서는 태연했다. 조문객이 고개를 갸웃할 만큼 그녀는 의무적으로 인사하고 자리를 지켰다.
공허해서 뭐라도 속을 채워 넣고 싶었다. 조금 전 육개장을 욱여넣고 나자마자 화장실에서 토해낸 터라 빈 곳이 헛헛했다.
이런 때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거나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연서 씨?”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빗속에서 들려왔다. 연서가 고개를 돌린 곳엔 남자 셋이 있었다.
이 새벽에 누구일까.
“네. 맞는데, 누구세요?”
문식의 손님인가 싶어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난 아버지이지만 조문객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를 빼앗을 순 없었다.
“다 큰 딸내미 하나 있다더니만, 낯짝이 썩 쓸만하네. 간호사 선생이라고 했지?”
“……누구세요?”
거친 말투에 연서가 경계하며 물었다. 약간 껄렁하고 덩치가 좋은 남자들.
이와 같은 분위기를 지닌 사람들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문식의 사채를 받으러 온 이들이 딱 이랬다.
선두에 선 남자는 뱀 같은 눈과 두꺼운 손을 가졌다. 얼굴에 난 자잘한 상처와 건들대는 자세가 불길했다.
“저 짝 하우스에서 나왔는데, 이렇게 말하면 알려나?”
“하우스요?”
남자가 포커를 치는 시늉을 했다. 연서의 등줄기로 오한이 서렸다.
“우리 문식이 형님이 돈을 앞 갚고 뒈져버렸단 소릴 들었네? 이제 우짤까?”
“빚이라면 제가 다달이 갚고 있어요.”
“우선 이거 보시고.”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연서 앞으로 차용증을 내밀었다. 연서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의지해 더듬더듬 글자를 읽어 내려가자, 남자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3억. 3억이고, 기한은 다음 달 말까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서류를 살피던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또 다른 빚이었다. 하나 문식에게 빚이 더 있단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없기야 없지. 한문식이가 없지.”
남자들이 낄낄거렸다.
“이제 우리 따님이 갚아야지?”
연서가 차용증을 남자의 가슴팍으로 돌려주었다.
“이제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모르는 일이라고요.”
“이렇게 떡하니 애비 장례식까지 치러주고 있으면서 왜 상관이 없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상속 포기하면 돼요.”
연서가 눈에 힘을 주었다. 빚이 더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고 이미 연서가 떠안은 빚만 해도 상당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상속 포기니 뭐니 이런 게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연서는 배짱을 부렸다.
그렇지 않으면 더한 지옥이 시작될 테니까.
“우리 선생님이 잘 모르시나 본데, 이거 돈으로 못 갚으면 따님이 몸으로 때워야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요즘 세상이 어쩌고 할 생각이면 꿈 깨. 뭐 혹여라도 어디로 내뺄 생각이거나 신고할 생각이면 대가리 깨질 준비는 해야 할 것이고.”
남자가 연서의 머리를 툭툭 밀었다. 그 힘에 휘청거리며 연서가 뒤로 밀려났다.
“손대지 마세요.”
“허쭈. 성격 봐라. 싫은데?”
남자가 보란 듯 쫓아와 연서의 머리를 여러 번 밀어뜨렸다.
“하지 마요!”
“그럼 우리 선생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해줘야지. 아야, 가지고 왔냐?”
“네. 형님.”
뒤의 남자 하나가 다가와 연서의 뒤에서 그녀를 꽉 껴안았다.
“읏, 놔요!”
발버둥을 치며 주변을 살폈다. 어두운 건물 뒤편이라 행인이 드물었다.
더군다나 새벽이라 도와줄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도 연서는 힘껏 소리쳤다.
“놔!”
“그것이야 선생 하기 달렸고.”
남자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연서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 잭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가만히 있어야지. 예쁜 얼굴 다친다. 빚 못 갚으면 얼굴이라도 뜯어서 팔아먹어야 하는데, 쯧.”
“놔, 놔요!”
으읍, 소리를 지르자 입이 막혔다. 남자가 든 나이프가 점차 가까워졌다.
“읍!”
다가온 남자가 연서의 머리를 거칠게 휘어잡아 뒤로 꺾었다. 그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남자와 나이프를 번갈아 살폈다.
칼이 연서의 귀 뒤까지 들어왔다. 두피에 소름이 일어났다. 칼등이 슥슥 두피를 긁어내렸다. 연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카락이나 몇 가닥 자르는 건데 겁을 그렇게 먹으면 쓰나. 어? 다 잘하자는 뜻이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흐읍……!”
“이게 다 교육이지. 앞으론 말 잘 들어요, 선생. 안 그러면 다음엔 어디가 썰릴지 몰라?”
연서가 체념하며 숨을 삼킬 때였다.
“거기 누굽니까!”
남자의 뒤쪽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연서 씨? 혹시 한연서 씨입니까?”
신 비서님……?
“한연서 씨!”
신 비서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연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남자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 연서가 흐느꼈다.
“이사님, 여기입니다!”
신 비서가 반대편을 향해 소리치자 뒤에서 겁박하고 있던 남자가 혀를 차며 연서를 놓았다.
연서가 앞으로 쓰러지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쓸린 무릎이 따끔했으나,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얼른 일어섰다.
이사님라니, 태헌도 온 걸까?
대체 여길 왜 온 거지?
연서는 이런 끔찍한 상황보다, 이 끔찍한 상황을 태헌에게 들키는 게 더 악몽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바닥을 보이는 건 이미 충분했는데. 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사람이란 건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왜 번번이 태헌은 그걸 확인하고 자신을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걸까.
“뭡니까.”
연서의 바람을 저버리며 차가운 태헌의 음성이 들려왔다. 추적추적 진물처럼 내리는 비가 연서의 뺨으로 들이닥쳤다.
칼을 거둔 남자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연서에게 말했다.
“다음 달 말일이야. 거기 적힌 데로 입금하고 전화번호도 있다. 튀다 걸린 연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면 전화해도 되고.”
카악 퉤. 남자가 가래침을 내뱉고 돌아서자 뒤에서 지키고 있던 남자 둘도 함께 돌아갔다. 그들은 당당한 걸음으로 태헌과 신 비서의 곁을 지나갔다.
연서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등나무 천장 사이로 들이닥치는 빗줄기가 가시처럼 따끔거렸다.
“한연서 씨는 참 다양하게 사람을, 놀라게 해.”
서러움이 고인 연서의 눈두덩이 뜨끈했다.
“…이사님이 여긴 왜 오셨어요?”
“이렇게 청승 떨고 있을 걸 알았던가 보네.”
태헌의 말투는 이 순간을 더욱 서글프게 했다.
태헌이 다가와 연서의 손목을 잡으려는 순간, 그녀가 놀라 움찔댔다. 확연한 적대감에 태헌이 동작을 멈추었다.
“사연이 참 많아, 한연서.”
태헌의 뒤로 신 비서뿐만 아니라 그의 경호원도 몇 더 있었다. 이래서 그 남자들이 꽁지를 내리고 금방 도망갔구나.
그가 가진 힘은 아마 상상도 못 할 만큼이겠지. 연서가 무력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이사님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일어나.”
“왜요? 제가 이사님 애첩이라서, 그래서 신경 써 주시는 건가요?”
“일어나라고 했을 건데.”
“이것도 화대인가요?”
“입조심해.”
“이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되게 웃기네요. 자기는 맨날 막말하면서.”
연서는 태헌에게 자존심을 내세우고 싶었고, 바닥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가난한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까지 태헌의 종이 인형처럼 끌려다니고 싶진 않았다. 그가 휘두르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는 꼴이 얼마나 우습겠어.
태헌이 이런 마음을 알면 분명 비웃겠지. 위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더 납작해질 수 있나 자근자근 밟아대려 들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이보다 더 모질게 내치지 못하는 걸까.
강 여사의 안위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까 봐?
그에게 내쳐지면 우 상무에게 해를 입을까 봐?
아니다. 또 다른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다. 불쾌한 티끌 같은 것이 연서의 마음을 흐리고 있다. 그와 입을 맞춘 건 연서의 자의였다.
처음에는 분명 싫었다. 싫었는데…….
그가 만지는 곳곳이 뜨거웠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으리만치 황홀했다.
설마 욕정에 눈이 먼 걸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만져도 좋아야 하는 게 아닐까.
승빈이 입을 맞추려 들 땐 기를 쓰고 반항했으면서, 태헌에겐 그러지 않았다.
약점이 잡혀서 그렇다고 말하기엔, 명확히 해석할 수 없는 애매한 끌림이 있었다.
그래 이건, 끌림이었다.
깨닫고 나자 한탄이 흘러나왔다.
주제도 모르고.
“하…….”
이 모든 것은 우태헌 탓이었다.
“나쁜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