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비서-17화 (17/85)
  • 17화

    *

    연서의 옅은 신음에 시트를 짚은 태헌의 팔뚝이 경직되었다. 이 여자에게 욕정하고 있단 걸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개 같은 감각이 성욕이라고 판명한다면 복잡다단한 감정의 형체를 제법 논리적으로 정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이 붙은 거다.

    “책임져야지?”

    “이사, 으응……!”

    목덜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분명 같은 병실의 욕실을 사용했으니 비슷한 향기가 나야 하는데.

    꿀과 꽃을 퍼부은 것처럼 향긋하고 달았다. 태헌은 주저 없이 사슴 같은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붙였다.

    “흣!”

    여린 살을 씹고 뜨겁게 빨아들였다. 머리칼을 그러모아 옆으로 치우곤 선을 따라 입술을 차츰차츰 내렸다.

    스커트를 입은 연서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콧대를 연서의 살결에 파묻었다. 바닷물을 퍼마시는 것 같았다. 강렬한 충족감이 차올랐다가, 이내 갈증이 찾아왔다.

    잠시 숨을 고른 태헌이 넌지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봉긋한 가슴이 오르내리며 그를 겁내고 있었다.

    “나한테 의지해. 원하는 만큼 보살펴 줄 테니까.”

    “……이사님, 누가 보면.”

    “끝까지 그 소리지.”

    태헌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술을 집어삼켰다. 달게 익은 과육처럼 여린 입술을 맛보았다.

    한 입 두 입, 각도를 바꾸어 맛보며 이 조그마한 살결이 주는 향락에 속으로 혀를 찼다. 품위 없이 연서를 품 안에 가두고 끈질기게 입술을 물고 빨았다.

    “그만, 이사님. 밖에 사람이…….”

    어렴풋이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부탁을 해. 어지간하면 들어줄 거야.”

    “흣, 그럼 부탁할게요. 비켜…… 주세요.”

    태헌이 피식 웃으며 통통한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는 연서를 보며 골반을 맞붙였다.

    “이렇게 젖었으면서 비켜줘? 단내 풍기면서 어딜 가게.”

    “아……!”

    손이 스커트 안쪽으로 들어갔다. 얇은 속옷이 만져지자 태헌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어두운 골로 긴 손가락을 보낼 듯 말 듯, 고심하며 말랑한 살을 살살 어루만졌다.

    “스커트 속이 이렇게 달랑 속옷 한 장이면, 좀 더 개새끼 짓을 하고 싶지 않겠어.”

    “이사님, 읏!”

    축축한 속옷을 비켜 간 손가락이 엉덩이 아랫부분을 단단히 잡고 골반을 탁 올려 쳤다. 삽입한 것처럼 전율이 흘렀다.

    헤벌어진 연서의 입술에서 색색,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달뜬 호흡이 가까운 거리에서 오갔다.

    태헌에겐 이런 곳에서 뒹구는 취미는 없었다. 그런데 곧 삽입이라도 할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채신머리없이.

    태헌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오피스텔에서 자.”

    과열된 분위기를 인정한 태헌은 그만 물러나 시트를 올렸다.

    옆에서 연서가 옷을 추스른 뒤 한동안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태헌도 딱히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바지를 뚫을 것처럼 팽팽해진 성기를 실소하며 바라볼 뿐.

    머릿결을 정돈하는 소리가 사부작사부작 귓가를 짜증스레 떠돌았다.

    “이사님 애첩이란 게 이런 거예요?”

    연서가 조금은 울음이 섞인 한탄하는 목소리로 물어오자, 태헌도 궁금해졌다.

    한연서, 네가 대체 뭔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휘둘러대는지.

    “뭐가 궁금한 거야.”

    “이사님 동할 때마다 몸 내어주는 게 애첩이란 건지 궁금한 거예요.”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걸 보면 원색적인 욕구가 일 순위가 된 것 같다. 우 상무를 쩔쩔매게 할 작정으로 연서를 곁에 두려 결심한 게 엊그제인데, 고작 성욕 하나로 목적을 뒤바꾸다니.

    태헌은 진지하게 스스로를 힐난하고 싶었다.

    “그런 건, 뭘 내어주고 말해야지.”

    “그럼 지금껏 한 건 다 뭐예요?”

    고작 입 좀 맞췄다고 세상 끝난 것처럼 구는 연서가 탐탁지 않았다. 아직 그의 욕구는 손톱만큼도 해소되지 않았다.

    “입가심?”

    “하는 말마다 못된 거 알아요?”

    “솔직하게 말할까.”

    “아시겠죠. 모를 리가 없어.”

    연서가 울먹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네 다리 사이로 들어가서 허리를 흔들고 싶어. 여기서 벗고 싶진 않아서 참는 거고.”

    태헌이 건조하게 하는 말에 연서의 두 눈이 요동쳤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듣는 것처럼, 순진을 떠는 게 갈 길이 멀어 보였다.

    하기야 이지를 잃어가며 성욕에 정복당하고 있는 건 태헌뿐, 연서의 목적은 다를 터다.

    강 여사의 안전을 위한 거래에 담보 잡힌 것뿐이었다. 그를 인지하자 속이 비틀렸다. 태헌은 기어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한연서 씨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것 같은데. 너도 이딴 짓에 같이 어울려주고 있지 않아?”

    행위 자체를 거부하지 않은 것을 동의하듯 입술을 다물고 연서가 침묵했다.

    “…….”

    “너도 날 이용해. 나도 성에 찰 때까지 애첩으로 한연서, 잘 만나볼 테니까.”

    열 오른 성욕은 해소하면 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대상이 한연서에 한한다는 게 문제였으나, 곁에 두어 취하면 그조차 문제가 되진 않는다.

    태헌은 바지런히 합리화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는 감정 변화를,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순간순간을, 다른 것으로 착각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이해가 안 돼요. 우 부장님이랑 제 사이를 정리하겠다고 이사님이랑 입까지 맞춰야 하는 건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

    태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로 뺐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 같아?”

    연서가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이사님, 저랑 자고 싶으세요?”

    일평생 수절하다시피 살아온 그에게 성욕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지적당한 것처럼 태헌은 가슴이 싸늘해졌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연서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오피스텔 키 안 받으면 화내실 거죠?”

    “받게 될 거야, 괜히 힘 빼지 마.”

    “그럼 주세요.”

    연서는 선의라도 베푸는 양 굴었다. 그녀의 손에 키를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그녀의 핸드폰 벨 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밝고 산뜻한 대중가요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클래식과 연주곡에 익숙한 태헌에겐 소음공해 수준이었다. 그 덕분에 탁하게 고인 공기가 서서히 걷혀갔다.

    “받아.”

    발신인을 확인한 연서가 미간을 좁혔다. 붉어진 눈매에 달린 눈물을 슥슥 닦은 후 그녀는 통화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문식이 입원한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이 시간에 왜 전화를 했지. 아빠가 또 사고를 쳤나. 연서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뗐다.

    “여보세요?”

    들려온 건 간호사의 목소리였다. 격앙된 음성이 휘몰아치듯 쏟아져나왔다.

    간호사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핸드폰을 쥔 연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 뒤 연서가 힘겹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핸드폰을 끊자, 태헌의 시선이 느꼈다. 무언의 질문을 받았으나 연서는 그를 외면했다.

    지금 그에게까지 상황을 이해시킬 재주와 여력이 없었다. 성적 요구까지 서슴지 않는 태헌이나, 그런 태헌에게 마땅한 거절조차 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자신이나.

    두 사람의 관계가 비논리적으로 치달아가는 걸 깨우쳤다. 그와 동시에 올바른 선로로 돌아오기 어려울 거란 걸 인지했다.

    그의 입맞춤과 손길은 마약처럼 연서를 쾌락에 절여놓았다. 그의 말대로 젖어 들어 거부하지 못하는 자신이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화 내용에 따른 대처가 더 시급했다.

    “가 봐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피스텔까지 타고 가. 태워줄 테니까.”

    “아뇨. 괜찮아, 괜찮아요.”

    연서가 창백하진 뺨을 바르르 떨었다. 단단히 마음먹어야 하는데, 이런 때일수록 정신 차려야 하는데…….

    “한연서.”

    태헌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연서는 비틀거리며 차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멍하니 걸어갔다.

    현호. 현호……. 그녀가 찾는 건 백현호였다.

    그러나 골목이 미로처럼 어지러워 돌연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연서가 쭈그려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모래알이 되어 죄 쓸려간 것처럼 전신이 후들거렸다. 토악질이 치밀었다.

    “연서? 연서야.”

    저쪽에서 현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연서! 너 왜 이러고 있어?”

    거친 목소리를 내며 다가온 현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우자, 연서가 끈 풀린 연처럼 그에게로 풀썩 안겼다.

    “뭐야, 왜 이래. 무슨 일이야?”

    크게 묻는 현호가 유일한 버팀목인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게 또 서글퍼서, 연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연서는 눈을 맞추고 표정을 살피려는 현호를 흐릿한 시야로 담아내며 말했다.

    “…아빠가.”

    “아저씨가 왜. 또 사고 쳤어?”

    “죽었대.”

    죽었대, 현호야.

    “……뭐?”

    놀란 현호의 두 팔을 붙잡고 연서가 허탈하게 물었다.

    “어떻게. 이제 어떻게 해, 현호야?”

    “하, 씨발……. 그게 무슨 소리야?”

    “자살했대. 손목을 그었대. 유리 조각으로 화장실에서…….”

    연서가 눈가를 찡그렸다. 말을 하다 보니 문식의 마지막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자리 잡아 갔다.

    “아빠가 병원에서 나오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그러지 말랬어.”

    연서의 작은 등을 꽉 끌어안은 현호의 팔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그게 왜 네 탓이냐. 하…….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나오라고 할걸. 그냥……. 말 들어줄걸.”

    힘없는 목소리가 자책을 떠안고 흔들렸다.

    연서가 태헌과 입을 맞추며, 그의 손길에 반응하는 동안. 속절없이 그에게 몸을 내맡기는 미련한 자신에게 의문을 품는 동안, 문식이 죽어갔다.

    끊임없이 태헌을 되새기고 그가 남긴 열기와 분노 미움을 되새기는 시간 동안, 문식은 자살 충동을 느꼈던 거다.

    “현호야, 내가 죽인 거야.”

    “그딴 소리 하지 마! 연서야, 제발 연서야…….”

    맞닿은 현호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잘못한 건 난데 왜 네가 그래.

    “같이 보내드리자. 그러면 되는 거야.”

    현호는 저도 놀랐으면서 연서를 다독이려 들었다. 연서가 눈을 내리감았다. 암전뿐인 세상은 너무 싫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

    흐윽,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힘없이 무너지는 그녀를 안아 든 현호의 걸음이 빨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