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하얀 피부와 크고 늘씬한 몸, 예쁘장한 얼굴을 한 남자가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서가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현호! 언제 왔어?”
현호와 호프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제 막 택시를 타고 그리로 가려던 참이었다.
“같이 가면 좋잖냐. 이 오빠는 차가 있단다.”
한 살 차이지만, 현호는 자신이 오빠란 걸 부쩍이나 강조했다. 물론 연서는 몇 달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친구로 여겼다.
“택시 타고 가도 되는데.”
“확 업고 간다.”
“그럼 나 편하게 가는 거야?”
“진짜 업어줘?”
현호가 콧등을 찡그렸다. 커다란 몸이긴 하나 체중 관리를 위해 풀떼기만 뜯어 먹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업혀 가는 건 양심 없는 처사였다.
“됐네요. 가다 쓰러져.”
“야이씨, 나 남자거든?”
“어, 그러세요.”
“쪼끄만 게 또 까불어.”
현호가 어깨동무한 팔을 내려 연서의 목을 장난스레 졸랐다. 연서도 지지 않고 그의 납작한 배를 와앙 물었다.
“아악! 미친, 진짜 물었어!”
“누가 머리 조르래?”
이십 대 후반의 장난치곤 유치했지만 가끔은 이렇게 생각 없이 웃고 떠드는 게 좋았다. 연서가 뽀르르 도망가고 현호가 당장 이리 오라며 쫓아왔다.
그때 연서의 가방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자 우태헌 이사님이란 글귀가 무섭게 번뜩였다.
*
태헌은 멈춘 차 안에서 해맑게 웃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을 툭툭, 내리쳤다.
연서가 웃고 있었다. 피부가 하얀 남자가 그 옆에서 함께 웃는다.
“백현호.”
소꿉친구와 백현호와 허물없이 가까운 사이인 걸 태헌의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우습게도 연서의 환한 미소를 보고 배신감 따위를 느꼈다.
왜?
한연서를 생각하면 의문만 가중된다. 해결되는 것 없이 문제만 쌓이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쪽에 능한 태헌은 그녀에 한해 사고가 마비된 것처럼 버벅거렸다.
아랫배에 기분 나쁜 벌레가 득시글한 기분이다.
그렇다면 긁어버려야지.
태헌이 핸드폰을 들어 연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달려드는 현호를 손으로 막은 연서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서서히 미소를 지웠다. 곤란한 양, 미간을 좁히다가 한숨을 폭 내쉬는 어깨가 작디작았다.
태헌은 그런 연서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억지로 전화를 받는 모습까지.
-여보세요?
뛰느라 가빠진 호흡을 숨기지 못하고 연서가 작게 헐떡였다. 태헌의 입술을 받아내느라 헐떡이던 그때처럼 숨소리가 가늘었다.
“보고해야지.”
-아, 방금 병원에서 나왔어요. 선생님은 식사도 잘하시고 검사도 잘 받으셨어요. 내일은 수면 내시경이 있고요.
주절거리며 연서가 현호의 큰 손을 피해 허리를 숙였다. 다시 슬쩍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전화를 받으면서도 연서의 시선은 현호를 향해 있었다. 두 사람은 아웅다웅 팔다리로 서로를 공격하고 방어했다.
태헌이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지병이랄 것도 없는데 골이 아파졌다.
“잠깐 만나. 병원 뒤쪽 편의점 골목이야. 차 번호 xxxx.”
태헌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여전히 연서를 보고 있는 채였다.
연서가 끊긴 핸드폰을 보며 기운차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저급한 행동을 본 태헌이 미간을 좁혔다.
“하여간 거슬려.”
한숨을 내쉰 태헌이 핸들을 감아 차를 돌렸다. 연서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10분을 기다렸을까.
창문을 살짝 열어둔 덕에 연서와 현호가 실랑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차에서 기다리라니까 그러네.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아니, 대체 누군데. 남자 만나냐?”
“선생님 아드님이라고 했잖아. 진짜 이러지 말고 먼저 차에 가 있어.”
“선생님 아드님이면 나도 인사 좀 드리자니까? 이거 뭔가 수상해, 어?”
“장난하는 게 아니라 정말 실례하면 안 되는 분이야.”
실례하면 안 되는 분. 어느덧 태헌의 존재는 연서에게 그렇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 것치고 실례 많이 하던데.
계속 투덕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구석진 곳에 주차해놓은 터라 그녀의 발소리가 우왕좌왕했다.
차를 찾는 모양인데 내려서 여기 있다고 말해주긴 내키지 않았다. 제 발로 찾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야 맞았다.
얼마간 기다리자 연서가 똑똑. 뒷좌석 창을 두드렸다. 태헌이 운전석 창을 내렸다.
“이쪽으로 타.”
“네.”
어깨를 움칠 떤 연서가 보닛을 빙 돌았다. 천천히 걷는 연서의 긴 머릿결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높게 묶을 땐 걸음걸이에 맞춰 총총 흔들리던 것이, 지금은 바닷물결에 녹은 것처럼 부드럽게 풀어져 있다.
조금 전 백현호와 말을 나눌 때도 저렇게 흐드러졌었지. 간호할 땐 묶었다가 평상시엔 늘어뜨리는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 손에 감기던 감촉이 떠올랐다.
달칵. 문이 열리고 연서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연서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용인 집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보았던 그 상냥한 미소와 비슷한 온도였다.
백현호와 있을 땐 이렇게 웃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가. 그녀의 가식적인 미소에 심기가 비틀렸다. 연서에게 일일이 반응하는 일이 문득 번거롭게 여겨졌다. 차라리 눈에서 치워버릴까.
강 여사의 상심이 크겠지만, 다른 인력으로 대체 못 할 자리도 아니다. 그럼 이 불쾌함이 사그라들까.
아니. 이 여자가 알랑대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편이 더 답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러 혼돈 속에서도 태헌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거슬리는 게 있으면 빠르게 치우든, 해결하는 게 옳은데 연서는 그게 되질 않았다. 결국 예외를 만들기 위해 연서를 찾아왔음에도 태헌은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사님?”
다시금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낮은 탄식을 삼켰다. 그래, 어디까지 거슬리나 궁금하긴 하니까.
태헌이 이너 포켓에서 꺼낸 카드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단단한 사각형 물질에 연서의 다갈색 눈동자가 닿았다.
“받아.”
“이게 뭔가요?”
“오피스텔 키.”
“이걸 왜…….”
연서가 선뜻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병원에서 7분 거리고, 주소는 신 비서가 메시지 남겼을 거야. 휴무일엔 이곳에서 지내도록 해.”
“숙소 같은 건가요?”
숙소라니. 단칸방 같은 고시원 생활에 익숙한 연서의 머리에서 나올 만한 단어였다.
“이틀마다 고시원으로 돌아갈 거 아니면 사용해. 서울에 다른 거처가 있는 것도 아니던데.”
연서의 눈매가 차츰 아래로 내려갔다.
“감사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갈 데 있어요.”
“어디. 백현호 집?”
“이사님이 현호를 어떻게 아세요?”
연서의 두 눈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그게 불쾌하면서도 만족스러웠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초등학생처럼 가학적으로 그녀를 들쑤시고 싶단 마음이 불거졌다.
“할머님을 맡겼는데 한연서 씨 신변 정돈 알고 있어야지.”
“그러네요. 하지만 오피스텔 키는 안 주셔도 돼요.”
“난 줘야겠는데.”
“거처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깨를 옹송그리고 할 말은 다 하는 연서가 기특하면서 같잖았다.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끝도 없이 회오리치고 있다.
“한연서 씨 안위도 내 업무 중 하나야.”
“지나친 참견… 아닐까요.”
“참견?”
참견이라니. 일개 사용인을 위해 오피스텔을 알아본 게 참견이었나.
충분한 보상이라고 여겼다.
“그럼 화대라고 생각하든지.”
차 내부가 정적에 휩싸였다. 정작 폭탄을 내던지 태헌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연서가 흐린 눈으로 태헌을 쏘아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너와 몸 맞댄 게 좋았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
“…좋았, 다고요?”
“이런 일에 공치사할 이유 있나. 그날 너도 좋았을 텐데. 젖었잖아. 아니야?”
“이……!”
연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이유 모를 충만감이 가슴에 가득 찼다.
이런 저열한 감정이 제 안에 도사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는데. 연서를 마주할 때마다 타락한 불모지를 개척하는 것 같다.
태헌의 밑이 뻐근하게 당겼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렇게 못되게, 그러세요?”
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못된 거 싫으면 키 받아.”
“싫어요. 화대라면서요.”
“그럼 그냥 보너스라고 생각하든지.”
“전에 받은 것도 많습니다. 과분할 만큼이요.”
5천만 원을 얘기하는 건가. 통장 내역을 조사해 손도 못 댄 걸 확인했고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였다.
백현호가 주는 거액은 턱턱 잘만 받으면서, 이쪽은 거부하는 연서의 줏대가 코웃음이 나올 만큼 하잘것없었다.
비루한 자존심, 그거 꺾는 거 뭐 어렵다고.
“돈 받은 만큼 할 일을 하면 돼.”
“그래서 말인데 그 돈은 돌려드릴게요. 아무래도 너무 찜찜…….”
태헌이 긴 팔이 조수석 헤드레스트 뒤를 감쌌다.
“찜찜한 건 하지도 않았는데, 아직.”
태헌이 순식간에 시트를 젖히며 그 위로 올라탔다. 바둥거리는 연서의 뒤통수에 손바닥을 대고 충격을 완화하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이 겁먹은 게 분명했다.
“이사님, 여기선…….”
태헌이 아니라 주변을 경계하는 걸 봐선 붙어먹는 것 자체가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병원 욕실에서 입을 맞출 때도 처음엔 바르작대더니, 행위에 열이 오르자 자각 없이 스스로 혀를 내밀어 태헌을 가지고 놀았다.
“누가 볼까 봐? 누구.”
태헌의 가슴이 흉포하게 부풀어 올랐다. 어두운 차 내부 따위, 누가 얼굴을 들이밀고 보지 않는 이상 어둠에 잠겨 눈에 띄지 않았다.
백현호가 소식 없는 한연서를 찾아 돌아다니지 않는 이상, 들킬 리 없는 밀회였다.
“너만 조용히 하면 될 건데.”
“이사님…….”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 아랫배로 고인 것 같다.
“내가 이 나이 먹고 몽정을 했어.”
날 선 눈빛과 다르게 연서의 입술을 훔치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쪽, 찰기 있게 달라붙었던 입술 새로 여린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로 뺐다고. 느끼는 것 없어?”
귓불을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