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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15화 (15/85)

15화

*

연서는 빼꼼히 고개만 내밀어 태헌의 동태를 살폈다. 병원에서 빠져나온 태헌은 신 비서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운전기사가 직접 열어주는 세단에 올라탔다. 그 순간 태헌과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깜짝이야…….”

연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멀어지는 세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매처럼 잘 빠진 차체가 유연하게 도로로 미끄러져 가는 모습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죄지은 것도 아니고 왜 숨었을까. 연서는 기둥 뒤에서 빠져나오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또 마주쳤다간 무슨 말을 들었을지 몰라.

태헌은 폭력적이었으며 독단적이고 권위적이었다. 뻔뻔한 면도 있었다. 통틀어 재수 없단 말이 가장 적절했다. 그리고 연서는 그런 그를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강 여사를 생각하면 태헌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만약 태헌이 귀국하지 않았다면, 어제 같은 경우에 우 상무가 나타나 강 여사를 마음대로 휘두르려 했을 거다.

이곳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우씨 일가가 들이닥쳤다. 병문안이라기보단 소란스러운 도떼기시장과 닮아 있었다. 그럼에도 강 여사는 오랜만에 새끼들 얼굴을 봐서 좋다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우 상무는 신주 병원이 아니라 국한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간 강 여사의 건강을 책임져온 병원이 따로 있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옮길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그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태헌은 대쪽 같았다. 태헌이 할머님을 모시는 건 자신이라며, 권리를 침범하지 말라 못을 박았다.

모두가 불편한 기색으로 물러났고, 병실 한구석에서 연서는 안도했다. 우 상무의 손이 닿지 않는 편이 강 여사에겐 안전했다.

이번 일로 태헌에게 가졌던 불신이 걷혔다. 강 여사에겐 그가 필요했다.

“휴…….”

인제 그만 올라가자.

걸음을 옮기려는데 다리가 휘청였다. 불현듯 어젯밤 주저앉으려던 자신을 강하게 붙들었던 단단한 팔뚝이 생각났다.

맞닿은 모든 곳이 뜨겁던 남자. 나쁜 아이를 벌주듯 그는 노골적으로 연서를 다그쳤다.

그의 몸짓과 손이 닿은 곳, 입술을 헤집던 방식이 왜 자꾸만 떠오르는 걸까.

“무슨 욕구 불만이야?”

연서는 괜스레 입술을 손등으로 비볐다. 알싸한 통증이 남은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고개를 털어냈다.

우태헌은 애첩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을 가지고 노는 나쁜 놈일 뿐이었다.

*

달리는 차 안에 조용한 엔진소리와 피아노 연주곡이 기묘하게 어우러졌다. 베테랑 운전기사가 부드러이 방지턱을 지났다.

조수석에 앉은 신 비서가 작게 헛기침한 뒤 운을 뗐다.

“보약은 바로 성분 의뢰 맡겼습니다. 오늘 오후면 나올 겁니다.”

뒷자리에 앉은 태헌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혹시 안 들린 건가 싶어 신 비서가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말씀하신 자료 준비됐습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이리로.”

“네, 여기 있습니다.”

신 비서가 서류 봉투를 내밀자, 태헌이 그를 건네받았다. 태헌은 봉투를 열며 무심하게 말했다.

“보약 성분 결과 나오는 대로 한연서 씨에게도 연락하고.”

“한연서 씨에게요?”

“가장 궁금할 겁니다.”

이번에 본가에서 가져온 보약의 성분 의뢰를 해보자고 한 건 연서였다.

표고버섯은 10년 전에도 강 여사의 등에 아주 작은 두드러기를 일으킨 적이 있다고 했다. 미미한 증상이었고 바로 호전되어 이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도 했다.

태어나 지금껏 본가에서 한시도 떠난 적 없는 우 상무라면 알고 있을지 모르지.

사람을 보내 보약 성분 검사 의뢰를 맡겼다. 다만 부질없는 짓일 터였다. 연서가 하도 간곡하게 청해 들어줬을 뿐이다.

보약 성분에서 표고버섯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우 상무가 알레르기가 있는지 몰랐다고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다. 태헌도 몰랐던 사실이니 가능한 일이다.

우 상무의 저열한 수법에 화가 났다. 아무리 금수만도 못하다지만, 모친에게 해를 끼칠 약을 갖다 바칠 줄이야. 저를 낳아준 사람을 못 알아보는 짐승 새끼는 이미 사람이길 포기한 것과 다름없었다.

태헌이 귀국한단 소리에 우 상무는 부랴부랴 움직였을 거다.

이제 와 강 여사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자질을 의심받는 건 태헌이었다. 태헌에겐 강 여사를 무사히 보필할 의무가 있었고, 그 대가로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강 여사가 천재지변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실수로 인해 건강이 나빠진다면 그건 태헌의 책임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우 상무는 변호사를 선임해서라도 유산을 회수하려 들 터였다. 더러운 싸움이 되겠지.

순간 보약을 조심스레 내밀던 연서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태헌을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그래도요, 한 번만 검사해주시면 안 될까요?」

「결과 나온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이사님이, 이사님이 해결해주시면 되잖아요.」

누구 머리 위에 앉으려 들어.

어젯밤 입술을 빨렸다는 것을 광고하듯 제법 빨갛게 부은 입술을 웅얼거리는데, 또다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연서의 입술을 취한 건 역시 충동이었다. 계산 없는 충동. 그런 건 태헌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연서에게 승빈을 떼어내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 왜. 연서를 굳이 품 안에 가두고 달아나지 못하게 했나. 번잡한 방법으로 살을 섞어가며.

정립되지 못한 감정들이 불순물처럼 둥둥 떠다닌다. 그녀는 생각만으로 태헌을 짜증스럽게 했다.

태헌은 상념을 떨치고 신 비서가 내민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연서에 대한 상세한 조사 내용이 서류에 담겨 있었다.

연서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것만 조사했기에 추가 정보가 필요했다. 사람을 들일 땐 이력을 철저하게 확인하는 게 규칙이었다.

다만 태헌이 직접 사용인의 정보를 이렇게까지 확인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보통 이런 건 인사 책임자가 도맡았다.

서류의 내용을 천천히 훑었다. 그녀의 주소지 늘한빛 고시원에 눈이 박였다. 고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고시원에서 지낸다고.

소꿉친구 모델 백현호에서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 함께 초중고를 나왔다.

“백현호, ING 소속이네.”

“네. 김대웅 대표님이 운영하십니다.”

태헌의 이종사촌 사돈댁 처남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것 같지만 이 바닥은 본디 한 다리 건너면 다 얽히고설킨,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등록금을 도움 준 게 확실한 거고.”

“네. 통장조회를 해보니 그렇습니다. 종종 한연서 씨 통장으로 거액이 입금된 정황이 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릴 때마다 백현호 씨가 도움을 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분이 더욱 저조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한연서가 가난한 게 추잡스러워서? 아니면 동정이라도 해서?

그것관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불쾌한 씨앗이 어느덧 넝쿨이 된 것처럼 폐부를 조이기 시작했다.

“조만간 김대웅 대표와 자리 만들죠.”

“네, 이사님.”

“한연서 쪽으로 자석 하나 붙이고, 오피스텔 하나 알아봐요. 병원 근처로.”

“네.”

신 비서는 이유를 묻지 않고 대답했다. 그게 그의 할 일이었다. 병원이 점차 멀어졌다. 태헌은 피곤함을 느끼며 잠깐 눈을 감았다.

*

강 여사의 건강 검사는 며칠에 걸쳐 대대적으로 이뤄질 예정이었다. 오늘은 간단한 초음파검사가 있었다.

다행히 강 여사의 혈색은 어제보다 훨씬 좋았다. 연서는 부지런히 움직여 병원에 둘 강 여사의 물건을 정리했다.

“연서 씨, 이사님이 이틀 쉬고 나오라네.”

간이 싱크대에서 수건을 빨던 연서가 윤해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네?”

“이사님 전화 왔는데, 오늘부터 자기랑 나랑 이틀씩 교대하라고 하셔.”

윤해 측으로 태헌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연서는 고민하다가 전부터 묻고 싶던 걸 입 밖으로 조심히 꺼냈다.

“이모님, 혹시…… 이사님 따로 만나신 적 있나요?”

“귀국하시고?”

“네.”

윤해가 우 상무의 사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알레르기 유발 식품을 모친에게 먹일 만큼 악독한 자라면 주변 사람을 여럿 매수하고도 남았다.

“어어, 만났지. 용인 내려가시기 전에 찾아오셨을 거야. 큰 사모님 서울 오시면 다시 일해달라더라고 하셨지? 왜?”

그럼 윤해는 완벽히 태헌의 사람이란 거구나.

태헌이 윤해를 만나 그냥 부탁만 했을 것 같지 않았다.

“왜 그러는데?”

눈빛이 묘하게 달라진 윤해를 보니 자신처럼 큰 대가를 받은 게 맞는 듯했다.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걱정하지 마. 나 큰 사모님이랑 무려 20년이야.”

윤해가 푸근하게 웃었다. 돌연 윤해가 조금 더 어리고 미혼이었다면 하는 가정이 세워졌다.

그래서 윤해가 승빈의 관심을 받았다면 태헌이 제게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똑같이 했을까.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은밀한 곳을 비비며 승빈과 얽히지 말라고 형형한 경고를 했을까.

윤해에게도 똑같은 패악을 부리는 태헌을 상상해보자 목 안 어딘가가 따가워졌다.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꺼림칙했다.

“연서 씨?”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 했어요.”

“그러게 좀 쉬어. 그러다 연서 씨가 쓰러질라.”

“말씀은 고맙지만 여기 계속 있을래요.”

갑작스러운 휴가였다. 쉰다고 해서 마음이 놓이는 것도 아니었다.

“에이, 여기 둘이나 필요 없어. 간호사님도 계시고 주변에 다 세원 사람들이야.”

안팎을 지키는 경호팀도 있으니 연서가 걱정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이사님 뜻이 그러신데 우리가 어떻게 해? 따라야지.”

“그건 그러네요.”

연서가 힘없이 웃었다.

저녁 식사를 하시는 것만 보고 간다는 게 어느덧 8시였다. 강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도 몇 번이나 더 뒤를 돌아보았다.

손을 흔들며 쉬고 오라는 강 여사가 눈에 아프게 밟혔다. 윤해를 두고 너무 걱정하는 모습이 또 예의는 아닌 것 같아서 연서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야 했다.

밤이 깃든 병원 밖의 공기는 꽤 시원했다. 연서는 캄캄한 밤하늘을 보며 택시를 잡기 위해 공원 쪽으로 향하는 샛길로 빠졌다.

그때였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머리 위쪽에서 들려왔다.

“앞 좀 보고 다니라니까. 또 넘어져서 울라고?”

“어?”

어깨에 팔을 척 올린 남자는 다름 아닌, 현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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