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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14화 (14/85)

14화

*

태헌이 맞닿은 몸을 더욱 붙여왔다. 연서의 다리 사이로 그의 허벅지가 밀려들었다.

“이래도 부추기겠다고.”

“이사님이 무슨 짓을 하셔도, 별로 겁 안 날 거예요.”

“그럼 해볼까. 나도 내가 무슨 짓까지 하려나 싶거든.”

“…이사님.”

딱딱하고 뭉툭한 것이 아랫배에 비벼지자, 연서가 눈을 끔뻑였다. 이게, 뭐지?

“내가 버린 걸 누가 줍는 건 용납이 안 돼서.”

“누굴 버려……. 읏!”

파고든 무릎이 연서의 다리 사이를 과감하게 비벼댔다. 연서는 얼굴이 새빨개져 그를 밀어내려 끙끙댔다.

그러나 밀려드는 쾌락이 거셌다. 점점 힘이 빠져 턱이 젖혀졌다.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강 여사님 생각해야지.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내 쪽이 편하다는 것 너도 알지 않나.”

“아!”

“우승빈이 우 상무를 배신할 수 있겠어? 핏줄보다 귀한 여자였으면, 아무 여자나 붙어먹고 다니진 않았겠지.”

허를 찌른 태헌이 무자비하게 그녀를 흔들었다. 연서의 허리가 발작하듯 휘었다.

괴롭다고 여기면서도 속절없이 휘말리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욕실에 가득 찬 수증기가 머릿속까지 들어찬 것 같았다.

“할머님이 예뻐하는 한연서 씨.”

“…읏, 협박쟁이.”

“입 벌려. 그 새끼한테 갈 생각 안 나게, 빨아줄 테니까.”

“나, 나쁜…….”

“그래, 나쁜 새끼지. 네가 내 밑에서 길 때까지 괴롭히고 싶어졌어.”

“미, 쳤어요?”

“몰랐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얼마나 입술을 맞추었을까. 연서가 잘못했다 애원하고 나서야 태헌의 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욕실 벽을 짚은 태헌이 녹아 물러진 입술을 어루만졌다. 연서가 헐떡이며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흐윽, 다시는 우승빈 부장님과…. 흐윽, 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지 않을게요.”

“그래, 잘할 수 있잖아.”

“흣, 네.”

“거짓말하면 못 쓰는 거 알아두고.”

“알았, 어요. 알겠으니까….”

연서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가락이 뜨거웠다. 연서는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황급히 올리며 그의 흥분을 외면했다.

거대한 반응을 과시하는 그것을 배반하듯 태헌은 무표정했다. 여전히 느긋했다. 그런 점까지 억울하고 서글펐으나 연서는 그를 거스를 수 없단 깨달음을 얻었다.

어쨌건 강 여사님에게 도움이 되려면 그의 바짓가랑이를 꽉 잡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자존심을 챙기려던 반항은 굴복이란 결과를 낳았다.

*

어젯밤, 우 상무는 자정이 되기 전에 먼저 연락을 해왔다.

국한 병원이 아닌 신주 병원으로 옮기는 태헌의 저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연서가 대답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태헌이 보고 들은 그대로 말하라 했으니, 가감 없이 대답하긴 했지만 우 상무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혹시 의심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승빈과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연습장을 들추는 것처럼 울적했다. 아픈 강 여사에게 혹여 나쁜 소리가 흘러 들어갈까 봐, 승빈에게 힘껏 대항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 여사는 태헌의 바람대로 전원했다. 연서는 강 여사의 짐을 이것저것 정리를 하느라 오전 내내 바빴다.

강 여사가 낮잠 든 시간. 연서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윤해에게 자리를 맡기고 병원 1층으로 내려왔다.

ATM기를 이용해 거액의 이자와 얼마 되지 않는 원금을 계좌 이체했다. 사채 이자의 납기 기한이 오늘이었기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됐다.”

이체 완료 글자를 보자 가슴에 얹혔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다. 태헌이 준 봉투엔 5천만 원이란 큰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돈에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괘념치 않고 빚을 갚는 데 쓸지, 아니면 태헌에게 돌려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돈을 쓰면 정말 강 여사를 두고 거래를 한 게 되어버릴까 봐, 양심이 아팠다.

그러나 까마득한 빚을 생각하면 염치란 걸 버리고 싶어진다.돈은 사람을 때론 악하게 만들었다. 연서의 부친이 그랬다. 그를 닮고 싶지 않았기에 주저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곳을 벗어나 야외 벤치로 향한 연서는 생각난 김에 부친 한문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3개월 전 인천의 한 알코올 중독 전문 병원에 입원했다. 술에 취해 흉기 난동을 벌였고, 감금되다시피 병원행 신세가 되었다.

통화음이 길게 이어졌다. 곧장 전화를 받지 않으니 걱정이 앞섰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닐까. 어디서 뭘 하느라 안 받는 거지.

순간 숨을 헐떡이며 문식이 전화를 받았다.

-어어 그래, 연서. 우리 딸.

“치료 중이었어? 전화를 늦게 받네.”

-아니 잠깐 사람들이랑 얘기 좀 했다. 밥은, 먹었어?

누가 그러던가. 술만 안 먹으면 착한 남편, 착한 아빠라고.

한문식도 그랬다. 술에 취하지만 않으면 다정한 사람이었다. 웃기는 소리지.

“어, 그리고 방금 그거 보냈어.”

-우리 딸이 고생했다. 못난 아비 만나서 매번 고생만 하고.

콜록콜록. 아비의 잔기침 소리가 연서의 귀에 걸려들었다.

“감기야?”

-아니. 그냥. 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그런다.

“혹시 모르니까 검사받아 봐.”

-내 몸은 내가 안다. 바깥바람 좀 쐬어야 낫는 병이야.

“그래도 좀만 버텨봐요. 아직 퇴원은 이르다고 하시잖아.”

문식이 개차반이긴 하나, 그를 완전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문식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가 사채업자에게 끌려가 몹쓸 꼴이라도 당하면 그 멍에를 짊어지게 될까 봐서.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린 순 없어서, 그런 마음으로 그를 대신해 돈을 갚고 그를 부양하고 있었다. 이런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가고 싶어 죽겠다. 연서야, 아빠 이제 나가도 돼. 술 안 마실게. 응?

“전에도 그러셨잖아요. 그래놓고 3일도 못 가서 술 드셨으면서.

병원에 입원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애원하기에 속는 셈 치고 퇴원을 결정했다.

그러나 퇴원한 문식은 술을 마셨을 뿐만 아니라 도박판으로 향했다. 결국 도박 빚만 불어난 꼴이 되었다.

-여기 너무 힘들어. 사람들도 모질고……. 밥도 영 아니야.

“아빠.”

-그리고 이제 나도 돈 벌어서 빚도 갚아야지. 언제까지 딸한테만 의지할 수 없지 않아?

이런 때만 책임감 있는 아빠인 척. 문식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 가정을 책임진 건 엄마였고 그 후엔 할머니였다. 지금은 두 분 다 세상을 떴다. 연서는 그녀들이 일찍 생을 마감한 게 꼭 문식의 탓 같았다.

거기다 다사다난한 연서의 상황까지 더해지니 암흑에 갇힌 것처럼 미래가 갑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원인을 짚으려 할 때면 이렇듯 불행한 과거만 선명해졌다. 가여운 엄마 생각만 짙어졌다.

“딱 한 달만 더. 한 달만 버텨 봐요. 아빠가 잘해야 나도 힘내지.”

-연서야, 아빠가 너무 힘들다.

축 가라앉은 그 말이 무겁게 파고들었으나, 연서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식으로 감정에 호소한 뒤 사고 치는 수법은 평생 당해온 일이었다.

또 넘어가선 안 된다. 문식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문식의 담당의도 이번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이만 끊을게요. 전화 들어와요.”

연서는 대답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친구 현호의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백현호는 소꿉친구로, 연서와 다섯 살 무렵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 초중고를 함께 다닌 가족 같은 사이였다. 현호가 패션모델로 활동하면서부터 전처럼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사이는 여전히 돈독했다.

대학교 입학금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을 때 현호가 선뜻 돈을 빌려주었고, 서울로 상경할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현호는 친구 그 이상,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요즘처럼 힘에 부칠 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이기도 했다.

연서만큼 사는 게 팍팍한 친구 지영에겐 어려운 속사정을 선뜻 얘기하기는 어려웠기에 현호가 유일하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였다. 연서가 밝은 얼굴로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통화가 길다. 누구랑 연애질이야?

“현호 너 일본 갔다고 하지 않았어?”

-온 지가 언젠데. 오는 날도 몰라주냐. 섭섭하게.

현호 특유의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익숙함이 느껴져 마음이 금방 편해졌다. 연서가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는 날 말도 안 해주고선.”

-어제 왔어. 아, 이번엔 진짜 죽을 뻔.

요즘 들어 기획사에서 스케줄을 무리하게 잡는다며 투덜대더니, 이번에도 강행군이었나 보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종일 몸을 만들고,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직업이니 스트레스가 극심할 터다.

현호가 안쓰러워 연서가 눈꼬리를 축 내렸다.

“당분간 푹 쉬어. 많이 힘들었겠다.”

-서울 언제 올라와? 아니면 내가 한 번 내려가?

현호는 종종 용인까지 찾아와 넉살 좋게 강 여사와 밥을 먹고 돌아가고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좀 그래. 서울이긴 한데…….”

-서울 어디? 뭔 일 있냐?

“자세한 건 말하기 어렵고, 그냥 병원이야.”

-여사님 많이 안 좋아?

눈치 하난 빨라선.

“아니이, 괜찮으셔. 나 내려가기 전에 볼 수 있으면 보자.”

-언제 내려가는데?

글쎄. 그건 태헌의 손에 달린 일이었다. 검사 결과가 좋아도 쉽게 내려가지 못할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정해지면 말해줄게.”

-그래, 병원 밥 맛없을 건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문자 남겨.

“랍스타?”

-진짜 사 간다?

연서가 장난이라고 웃었다.

-당분간 한가한데 아저씨한테 한번 가볼까?

“아니, 그러지 마.”

연서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문식에게 딱히 좋은 감정도 없으면서 현호는 그녀 병문안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곤 했다.

“정말 그러지 마. 너한테 면목 없기 싫어.”

-어. 일부러 없게 하려고. 나중에 너 탈탈 털어서 벗겨 먹으려고 그런다.

연서가 또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현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래도 가라앉은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하늘을 바라보던 연서는 병원 밖으로 빠져나온 누군가를 보곤 얼굴을 굳혔다.

그였다. 재앙의 군림자.

“현호야, 이만 끊어야겠다.”

-어, 그래. 문자 해. 자주 해라.

“응.”

연서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몸을 숨겼다. 태헌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욕실에서의 그 짓이 잊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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