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비서-13화 (13/85)

13화

*

“하…….”

대신 한숨을 토했다. 승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연서를 돌아봤다.

“연서야, 오늘은 회사에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다. 내일 서울 올라오면 보자. 연락 꼭 받고.”

연서는 대답을 외면했다. 승빈이 사라진 자리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벤치에서 일어난 연서는 허리를 숙였다.

“오늘 일은 제 불찰입니다. 변명할 여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쨌건 지금은 강 여사의 보호자가 태헌이니, 연서가 사죄해야 할 대상도 그였다.

“여긴 내가 있을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돼.”

“이사님이 병원에서 주무신다는 말씀이에요?”

“그래, 누가 또 찾아와서 장난칠지 몰라. 직접 지켜야지.”

누구든 선생님을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 있단 말일까. 연서는 마음이 씁쓸해졌다.

“그럼 괜찮으시면 저도 여기 있을게요.”

“겁먹고 피하는 줄 알았더니.”

“…….”

아침에 그를 피한 걸 알고 있는 투였다. 연서의 귓바퀴가 뜨끈해졌다.

“아니에요.”

“그래, 그럼. 그런 거로 해.”

짧게 말한 태헌이 기다리고 있던 신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에 대해 태헌이 더 캐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연서는 숨을 터뜨렸다. 알알한 입가를 문지르다가 울컥했다.

*

저녁 11시. 강 여사가 잠든 지 시간이 꽤 흘렀다. 고른 숨소리가 그녀의 안정을 드러냈다. 그렇다곤 하나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없어서, 연서는 베드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 슬슬 눈을 붙이긴 해야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시니 미리 체력을 보충해둬야 강 여사를 간호할 힘이 생길 터다.간병인은 체력이 우선이었다.

연서는 파티션 뒤의 보호자 베드를 바라보았다. 보호자 베드가 하나인 터라 연서는 소파에서 자야 했다. 조금 전 태헌에게 침대를 쓰시라 인심 쓰듯 말하자, 그가 옷가지를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혹시 생각을 잘못한 걸까. 손주가 있는데 괜히 눈치 없이 남겠다고 한 건 아니겠지. 어쨌든 강 여사를 돌보는 건 연서의 일이었다. 그녀의 걱정 때문에 병원을 나선들 마음이 편치 않았을 터였다.

연서는 물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욕실 쪽을 흘긋대다가 고개를 저었다. 강 여사가 있다곤 하지만 한 공간에서 태헌과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 편친 않았다.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라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더 힘들었다. 차라리 날을 새는 게 덜 피곤할지도 모르겠다. 태헌을 상대하는 건 긴장의 연속이었고 에너지가 쪽 빨리는 일이었다.

연서는 자판기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원한 음료라도 먹으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병실 입구로 향하던 연서는 욕실에서 나오는 태헌과 맞닥뜨렸다. 생각이 많아 물소리가 멎은 줄 몰랐다.

“아.”

허리에 수건만 두른 그는 나신이나 다름없었다. 화난 것처럼 두툼한 상체가 불시에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다. 당혹감에 머리가 쭈뼛 섰다. 태헌도 연서를 마주칠 줄은 몰랐던 눈치로 눈매를 약간 좁히고 있었다.

“어디 가.”

“죄, 죄송합니다.”

연서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그를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이 시간에 어딜 나가. 전화?”

“아뇨. 잠깐 자판기…….”

“한연서, 입술.”

“네?”

“우승빈이랑 얽히지 말라고 친절하게 경고 텐데. 너무 신사적인 방법이었지?”

연서가 걸음을 멈춘 채 어둠에 가려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어둑하게 조도를 맞춰놓은 병실이 꼭 올가미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연서는 차마 태헌을 바라보지 못한 채로 말했다.

“얽힌 게 아니라, 우 부장님께서 갑자기 찾아오신 거예요.”

“변명이 허접하고.”

“선생님이 쓰러지셔서 함께 병원에 온 거뿐이에요. 그리고 이런 설명 안 하고 싶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러세요?”

억울한 마음에 언성을 조금 높였다. 승빈으로 인한 오해가 억울했다. 연서라고 좋아서 그와 지저분하게 얽힌 게 아니었다.

승빈에게 험한 일을 당한 뒤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서럽고 불쾌한 마음을 아직 씻어내지도 못했는데, 태헌은 승빈에게 여지를 흘리고 있단 식으로 책임을 묻고 있었다.

“입술을 뜯겨놓고 그것뿐이란 말이 나오지.”

연서의 속눈썹이 깜빡, 어둠을 삼켰다가 뱉었다.

“그렇게 당당하면 이리 와서 얼굴 보여 봐.”

사적인 명령엔 아무런 힘이 없어야 옳았다. 이런 것까지 태헌의 말에 따를 이유가 없는데, 우습게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연서는 돈에 매수된 그의 말이었으니. 그가 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위치였다. 이런 게 실감 날 때마다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연서가 못 박힌 것처럼 미동하지 않자, 태헌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내는 작은 소리에 연서가 움찔했다.

“너 하나 말 듣게 하는 게 어려울까. 봐주고 있는 걸 착각하면 못 쓰지.”

또 협박이었다. 연서가 내리감았던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태헌에게서 짙은 바디워시 향기가 나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을 타고 흐른 물이 날렵한 턱선과 상반신을 따라 궤적을 그렸다. 연서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소, 소란 피우면 선생님이 깨실 거예요.”

“소란 피울 생각이야?”

“이사님 진짜 이상해요.”

“너만 고분고분하면 될 일이지.”

“실랑이 그만하고 싶단 말씀이에요.”

“그건 한연서 하기 달렸고.”

태헌에게 손목이 잡힌 연서는 수증기가 자욱한 화장실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읏, 아파…….”

연서가 울 듯이 중얼거리자 태헌이 잡힌 팔을 들었다. 멍이 든 연서의 손목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가 짙게 가라앉은 시선을 보였다.

“내가 남긴 자국 달고서, 입은 다른 새끼랑 맞추고.”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난잡하게 노는 거 좋아하면 말을 하지 그래. 얼마든지 채워줄 수 있는데.”

“난잡한 거 안 좋아해요.”

“그 새끼가 생각보다 더 쓰레기인 건지. 아니면 한연서가 먼저 매달린 건지 궁금한데.”

맹수 같은 시선이었다. 물어뜯길 것 같은 날 선 질책이 연서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태헌을 향해 꼿꼿이 들어 올린 목덜미가 아려왔다.

승빈에게 실연당한 주제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그에게 재차 매달린 것처럼 보인 걸까.

태헌에게 비치는 한연서라는 사람의 수준이 알 만했다. 승빈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웃고 있는 거겠지.

제멋대로 판단해 연서의 가치를 값싸게 매긴 태헌은 누군갈 판단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반면 연서는 그가 매겨준 가치를 반박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태헌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너무 분했다. 연서가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네. 즐거웠어요.”

내리감은 눈을 다시금 똑바로 떠 그 구덩이 같은 시선을 마주했다.

“즐거웠냐고 물으신다면 네. 즐거웠다고요.”

왜 이렇게까지 대답했을까. 못된 태헌에게 그에 상응하는 말대꾸라도 해보고 싶었던 걸까. 연서는 폭주하고 있단 걸 알면서 멈출 수가 없었다.

“답이 되었나요?”

“즐거웠다고.”

“이사님이 싫어하실 거 생각하니까 더 짜릿하던걸요.”

“건방 떠는 것도 귀엽긴 하다만.”

“사촌끼리 여자 하나 두고 싸운다고 소문나는 거, 저는 아무 상관 없어요.”

“도는 넘지 말아야지. 한연서.”

“이사님도 월권하지 마세요. 저는 어디까지나 선생님 건강만……. 흣!”

연서의 멍든 손에 태헌의 입술이 닿은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손목에 입술을 붙고 형형한 눈으로 연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서가 손목을 비틀어 빼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거슬려 미치겠네.”

입술을 떼 낸 그가 읊조렸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잘 짜인 상체 골로 모여드는 물방울과 자욱한 습기, 남자의 낮은 목소리.

어디론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탁한 분위기는 연서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점차 서 있는 것조차 힘들다 느껴졌다.

“가르침이 약했나 본데 이번에 잘 배워 봐.”

“놔…….”

“배우고 나서 우승빈 그 새끼한테 가서 전해. 누구 것에 손을 대려고 했는지.”

연서의 등 뒤로 축축한 타일이 닿았다. 그녀가 떨리는 눈꺼풀을 채 닫기도 전에 태헌이 예고 없이 짓쳐 들었다.

“흐읍!”

뜨거운 숨결이 입술을 뒤덮었다. 질주하는 용암처럼 빠른 속도로 열기가 밀려들었다.

긴장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잡은 그가 연서의 턱을 들어 올렸다. 벌어진 입술 틈을 비집고 혀끝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뜨겁고 말캉했다.

처음 느끼는 타인의 살덩이는 입안이 꽉 찰 만큼 버거웠다. 묵직한 양감이 연서의 혀를 채어갔다. 불쾌해야 맞는 건데, 그런 감정을 느낄 새가 없이 휩쓸리기 바빴다. 진득하고 농밀한 교류는 태헌이 품은 어두운 동공보다 더 아득했다.

끈적한 소음이 꽃씨처럼 터져 나왔다. 태헌이 달아나려는 연서의 혀를 잡아채어 깊게 빨아들였다. 아릿한 통증과 간지러운 쾌락에 연서가 앓는 숨을 내쉬자, 태헌이 보란 듯이 입천장을 쓸고 혀의 뿌리까지 치댔다.

숨을 쉬는 법을 몰라 그의 맨 가슴을 두드려 놔달라 애원했다. 재차 요구하자 태헌이 연서의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당기는 것으로 답했다.

“으흡…!”

각도를 바꾸어 다시 입이 맞물렸다. 잠깐 사이에 들이마신 산소가 금세 혼탁하게 흐려졌다.

“아흣, 아흐…….”

언어가 되지 못한 신음이 태헌에게 부딪혀 흩어졌다. 연서가 한계에 달했을 무렵 그가 입술을 물렸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쏴대야 하는데. 그럴 힘도 없어 바보처럼 그에게 몸을 맞대고 쌕쌕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게 고작이었다.

“좀 깨달았으려나.”

“제가 흣, 싫다면요?”

태헌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섰다. 화난 걸까.

그게 뭐라고 연서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 오만한 남자의 감정을 건드는 일에 성취감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가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나빴다. 못되고 모질었다. 그러니 나도 이 정돈해도 되잖아. 나도 자존심이 있단 걸 보여줄 수 있잖아.

“저는 누구의 애첩도 안 될 거예요. 사람 우습게 보지 마세요.”

“할머님 곁에 남고 싶다며. 그럼 노선 정확히 해야지. 아니면 우승빈 노선으로 바꿔 타고 싶어졌어?”

“우 부장님한테 매달리면, 선생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죠.”

연서가 여전히 가쁘게 숨을 쉬며 그를 향해 따졌다. 승빈과 태헌은 분명 기 싸움 중이었다. 그 희생양이 된 연서는 부조리함에 대해 반항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자신이 가여우니까. 선택권 없이 태헌을 따라야 하는 스스로가 보잘것없으니까.

“선택은 제가 하는 거예요. 이사님 마음대로 하시는 게 아니라.”

“사람 돌게 하는 재주가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