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승빈이 턱을 틀어 가까이 다가오기에 연서가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남자의 악력은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떠밀렸고 승빈이 마구잡이로 입술을 맞붙여 왔다.
승빈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더럭 겁이 났다. 어쩌면 태헌의 우려가 맞았던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시에 떠오른 오만한 얼굴에 더욱더 머리가 뒤죽박죽되어갔다.
기분 나쁜 접촉에 놀라 연서가 고개를 마구 저어 더러운 숨결을 피해내려 고군분투했다.
“흣!”
순간순간 불쾌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연서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하, 연서야.”
그녀가 반항을 멈춘 사이에 승빈이 입맞춤을 다시금 시도했다. 연서가 얼굴을 틀어버린 탓에 승빈의 치아가 연서의 여린 입술을 거세게 긁어버렸다.
“…읏!”
따끔한 통증이 밀려드는 동시에 어디선가 다급한 소리가 울렸다.
딩동. 딩동.
알림 벨 소리. 강 여사의 알림 벨이었다.
“가야, 흡……. 가야 해요!”
연서가 울먹이며 말하자 승빈이 입 맞추길 멈추고 그녀의 어깨를 그러잡았다.
“가야 해? 그럼 나랑 만나. 만난다고 하면 보내줄게.”
“보내주세요. 선생님 깨셨어요.”
“어제는 실수였다고 했잖아. 취했어. 많이 취해서, 그래서 너 생각하면서……. 하…….”
승빈이 작게 욕했다. 연서는 그 틈에 승빈의 가슴을 밀치고 달아났다.
*
입술을 문지른 연서는 일그러진 표정을 지우며 강 여사의 방으로 향했다. 그저 일어나셨단 알림인 줄 알았는데, 강 여사의 몸이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선생님!”
연서가 소리 지르며 미끄러지듯 그녀의 앞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강 여사의 몸을 뒤집고 목의 맥을 짚고, 눈꺼풀을 뒤집었다.
“선생님, 제 목소리 들리세요?”
다행히 아직 의식은 있었다. 다만 얼굴이 몰라보게 부었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알레르기 증상인 건가?
연서가 알기로 강 여사에겐 알레르기가 없었다. 그러나 면역체계가 약해지면 갑자기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기도 했다. 연서는 오늘 드신 음식을 재빨리 되짚으며 강 여사를 불렀다.
“선생님, 정신 차려 보세요. 선생님!”
“연서야, 할미 가슴이……. 답답, 흐으…….”
강 여사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연서는 조심히 강 여사의 옷을 걷어 등을 확인했다. 채찍 자국처럼 길게 홍반이 있었다.
“혹시 표고버섯 알레르기 있으세요?”
“흐으……. 조금, 예전에…….”
“조금이요?”
질문했으나 강 여사는 말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태였다. 갑자기 이렇게 쇼크가 올 정도면 알레르기 정도가 심하단 건데.
연서는 급히 머리맡의 서랍을 열어 의약품을 뒤졌다.
“항히스타민제, 에피네프린…….”
연서는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 될 만한 약이 없었다.
연서도 간호사이긴 하나, 강 여사에겐 저명한 주치의가 따로 있었고 그가 허락한 의약품만 상비할 수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연서는 단축번호를 눌러 다급히 운전기사를 호출했다.
“무슨 일이야?”
그때 열린 문으로 들어온 승빈이 심상치 않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놀라 물었다.
“병원으로 가야 해요. 알러지 쇼크예요.”
“뭐? 할머니!”
승빈이 놀라 달려왔다.
“바로 모실 거예요.”
“내가 할게. 옆으로 비켜 봐, 연서야.”
“아뇨, 경호팀이 올 거예요.”
곧장 강 여사를 안으려는 승빈을 저지하자, 그가 시큰하게 웃었다.
“나 할머니 손주야.”
“이런 때를 대비한 매뉴얼이 있어요. 저는 거기에 따라야 해요.”
만일의 사태를 위한 대처방안은 연서가 처음 병간호를 인수인계를 받을 때 강조 받았다. 그리고 그 질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니. 내가 직접 모실 거야.”
하지만 승빈이 뜻을 확고히 하자 연서는 그를 말릴 명분이 없었다. 어쨌거나 따지자면 이곳에서 이방인은 연서였으니까.
강 여사가 의사 표명을 할 수 없는 지금, 이 집의 지휘자는 승빈이었다. 승빈이 곧장 강 여사를 안은 채 뛰어나갔고 연서는 그 뒤를 쫓았다.
*
용인 시내의 대형병원.
강 여사는 응급실을 잠시간 거쳐 VIP 병실로 옮겨졌다. 많은 의료진이 다녀갔고, 긴급히 처치가 이뤄졌다.
승빈이 의료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표면적으로 연서는 간병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처음 병증을 설명할 때 빼곤 나설 자리는 없었다.
연서의 예상대로 강 여사의 병명은 아나필락시스 쇼크였다. 의사는 홍반의 형상을 보고 표고버섯에 의한 알레르기일 거라고 진단했다.
의식을 되찾고 호전된 강 여사의 팔을 물수건으로 닦으며 연서는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표고버섯의 행방을 계산 중이었다.
조금 전, 복희 이모님께 전화해 표고버섯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10년 전 강 여사에게 두드러기가 증상이 발현된 이후, 표고버섯은 일절 음식에 넣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혹시 보약인가? 어제 본가에서 보약을 가져왔다.
물수건을 쥔 손이 멈추었다. 표고버섯을 섭취한 뒤 12시간 이후부터 가려움과 홍반 증상이 나타난다. 타당성 있는 접근이었다.
우 상무가 일부러 그런 거라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 상무는 범법자였다. 등허리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생각에 잠긴 연서를 향해 기운을 차린 강 여사가 그만하라 손짓했다.
“아가, 난 됐으니 이제 좀 쉬어라. 응?”
“괜찮아요. 선생님,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왜 연서가 죄송하누. 그리고 놀라긴 우리 연서가 더 놀랐지.”
“제가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그냥 운이 없었던 게야.”
“선생님 드신 걸 차근차근 되짚어볼게요.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
표고버섯에 대한 건 진작 인지했다면 더 조심할 수 있었을 텐데.
“10년 전에는 두드러기 정도로 지나가서 크게 염려하진 않았다. 나이가 드니 갑작스레 악화되기도 하는구나. 쯧, 늙은이 때문에 괜한 사람들 가슴만 졸였어.”
“그런 말씀 마세요. 얼른 털고 일어나셔야죠. 선생님.”
“그래, 연서 말이 맞다. 얼른 일어나야 걱정을 안 끼치지.”
똑똑똑.
“들어오세요.”
연서가 물수건을 치우며 대꾸했다. 문이 열리고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헌이었다. 그의 곁엔 전에 보았던 신 비서도 함께였다. 그는 강 여사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큰 사모님. 저는 이사님 모시는 비서 신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 들어와요.”
“이런 일로 찾아뵈어 유감입니다. 쾌차하십시오.”
신 비서는 정중하게 숙였던 허리를 편 뒤, 연서에게도 고개를 짧게 숙였다. 연서도 비슷하게 인사했다.
강 여사는 저벅저벅 걸어들어오는 태헌을 좇아 눈을 좁혔다.
“회사 일은 어쩌고 온 게야?”
“시간 냈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되시면 전원부터 하시죠.”
“하루 이틀 있다 돌아가면 될 일이다. 굳이 소란을 피울 일이 아니야.”
“국한 병원 말고, 신주 병원으로 갈 겁니다.”
국한 병원은 연서가 근무했던 병원이자 세원 그룹에서 후원하는 병원이었다. 당연히 강 여사는 국한 병원에 통원 중이었다.
“그럴 것 없대도. 이리 가까이나 와라. 할미 얼굴 좀 보여줘라.”
태헌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곁에 다가가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그의 긴 다리가 불편하게 접힌 광경이 오늘은 어쩐지 밉지 않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태헌을 피해 다녔는데, 그를 보자 우습게도 안심이 된 터다. 비록 팔에 멍을 남긴 나쁜 놈이지만, 적어도 승빈만큼 추접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다.
무력한 연서에 비해 태헌은 힘이 있었다. 이런 때 강 여사에게 연서보단 태헌이 훨씬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전체적으로 다시 검진받고, 안정 취하셔야 합니다. 앞으론 이런 일이 다시는 안 생기도록 철저히 관리도 해야겠죠.”
“됐다. 검사는 얼마 전에도 받았다.”
“검사 결과를 속이는 데 일조한 병원에서 나온 결과를 믿으란 겁니까.”
“그리고 할미는 용인 집이 편해. 병원 들어가면 없던 병도 생기는 것 같아.”
강 여사가 그녀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병원을 좋아하지 않았다. 웬만한 증상은 주치의만 호출해 치료했고, 병원을 잘 찾지 않았다.
강 여사가 유독 병원에서 생기를 잃어가는 걸 알기에, 연서도 큰 문제가 없다면 그녀가 용인 집에 머무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연서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이 얘길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
병원 복도 벤치에 앉아 피곤한 눈가를 누르는데, 머리 위로 승빈의 음성이 구정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연서야, 많이 피곤하지?”
“아뇨, 괜찮아요.”
“자책하고 있나 했는데 설마가 맞네.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
“조금만 늦었어도, 선생님 정말 큰일 날 뻔하셨어요.”
연서의 잘못이었다. 간병인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
“입술 찢어졌네. 괜찮니?”
승빈의 손가락이 불쑥 연서의 입가를 어루만졌다. 조금 전 승빈을 피하려다가 난 상처였다.
미지근한 손길에 놀라 고개를 확 들어 올리자 승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고 있었다. 괴상한 표정이었다. 연서는 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까 그 일은 없던 거로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연서야.”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 없었으면 해요. 또 그러시면 가만있지 않을…….”
그때였다.
“무슨 일.”
태헌의 목소리였다. 그가 승빈의 뒤에서 나타났다. 서늘한 표정을 지은 채 해명하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 뒤로 돈 승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소식 빠르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 연서가 말한 거야?”
“말 듣는 게 어렵나.”
태헌의 눈길이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는 연서에게로 닿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짧게 닿았다가 떠났다.
“할머님은 내일 서울 모시고 갈 거야. 신주 병원으로 갈 거고.”
“신주 병원?”
승빈의 눈썹 한쪽이 위로 올라섰다.
“검사 결과에 장난질하는 병원을 어떻게 믿을까.”
“태헌아, 국한 병원이랑 세원이 어떤 사이인지 알면서 그래? 너 그러는 거 알면 아버지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회장님 돌아가시면서 할머님 거취 나한테 맡겼고, 모두 동의했지. 변호사 불러줘?”
태헌이 단조로이 묻자, 승빈이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