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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11화 (11/85)

11화

*

“휴…….”

연서는 아이처럼 잠든 곱디고운 강 여사의 손을 살짝 쥐었다. 가끔 꿈을 꾸실 때 이렇게 손을 잡아드리면 다시 깊게 잠드시곤 했다.

우리 연서가 꿈에 찾아왔네, 하시며 웃는 얼굴이 선했다. 이런 좋은 분을 위해 헌신하지 못할망정, 정보를 팔아넘기고 있었다니.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어떻게 해서라도 속죄하고 싶었으나 강 여사에게 이 사실을 덜컥 실토할 순 없었다. 충격을 받을 수 있었고 이 일로 연서가 떠나버리면 강 여사는 다른 간병인을 맞이해야 했다.

태헌의 말대로 그 스트레스는 강 여사의 몫이었다. 연서 혼자 짊어져야 할 죗값을 그녀와 나눌 순 없었다.

아침에 승빈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연서는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을 섞을 수 없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우 상무의 아들인 이상 전처럼 막역하게 지내진 못할 거다. 그 사실을 새삼 확인받은 것뿐이다. 머리론 알겠는데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축축 처졌다.

“아가, 무슨 일 있는 게야?”

“일어나셨어요?”

연서가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서둘러 거두고 강 여사의 안색을 살폈다. 연서는 그녀가 일어나 기대앉는 걸 도운 뒤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 온갖 좋은 것을 달여낸 보리 색 물이 반쯤 사라졌다.

잔을 치우고, 강 여사의 입가를 살뜰히 닦았다. 나이가 들수록 청결에 힘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강 여사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뤄주고 싶은 바람이었다.

“어제 우리 장남 장혁이가 보내온 보약 때문인지 어째, 힘이 더 솟아.”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좋아하시니 마음이 더욱 착잡해졌다.

가만. 우 상무가 손에 들려 보낸 보약 성분 검사는 따로 안 해도 되는 거겠지?

태헌이 묵인한 걸 보면 괜찮단 뜻이지만, 불안한 마음이 완연히 가신 건 아니었다. 우 상무가 바보가 아닌 이상, 꼬리가 밟힐 짓은 하지 않을 터다. 혹시 모르니 약을 따로 챙겨 검사를 맡겨 볼까.

“그렇지 않아도 어제 우 상무님께서 선생님 걱정 많이 하시던걸요.”

“다 늙은 어미 걱정은 무슨, 그런 거 할 시간에 자기 일 잘하면 그게 효도인 게야.”

“선생님 아직 한창이셔요.”

“우리 연서가 그렇게 말하니까 청춘 같기도 하네.”

연서가 맑게 웃다가 강 여사의 앞머리를 살짝 넘겨주었다.

“우 상무님은……. 효심이 깊으신가 봐요.”

“아가, 혹시 태헌이한테 무슨 말을 들었어?”

“네?”

연서가 흔들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하고 당황한 티를 냈다.

“우리 연서는 이렇게 사람이 참되다. 그래서 할미가 좋아해. 다만, 속을 못 숨기니 걱정이야.”

괜히 우 상무의 칭찬을 늘어놓은 걸까. 강 여사의 눈매가 심상찮게 깊어졌다.

“그런데 연서야, 그리 사는 게 꽤 고달픈 거다.”

“선생님…….”

강 여사는 사람 좋고 정이 많았다. 그리고 아주가 가끔 눈치가 귀신 같았다. 그러니 이날까지 권위와 품위를 지켜낸 거겠지. 또한, 강 여사는 두루 관찰하는 것에도 능했다.

연서가 빚을 탕감하느라 수중에 돈이 없다는 걸 알아챈 강 여사가 몇억이나 되는 빚을 떡하니 갚아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녀를 말리느라 진땀을 뺀 연서는 그 뜻을 거절한 대신 용돈을 받았다.

또 한번은 강 여사가 너덜거리는 연서의 속옷 사정을 알아차리곤 수십 벌의 속옷을 선물했다.

“연서 너도 태헌이 아버지 알지? 우리 이혁이 말이다.”

“네.”

태헌의 아버지 우이혁은 세원 홀딩스의 부사장으로, 강 여사의 차남이었다.

“그 애가 제 형 장혁이랑 많이 다투고 살았다. 두 사람의 문제가 태헌이한테까지 이어진 게 누구 탓이겠누. 전부 다 부모 탓이지.”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연서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쭈글쭈글한 손이 주는 안정감이 얼마나 귀한지 몰랐다.

다정하고 따스한 온기를 지닌 사람인데, 아들인 우 상무가 감시하고 있단 게 믿어지질 않았다.

“태헌이가 장혁이를 탐탁지 않게 볼 거야. 그래도 어쩌겠어. 내 자식이니 내가 품어내야지. 그러니 연서 너도 너무 마음 쓸 것 없다. 지금처럼 있어 주면 된다.”

“…네.”

연서가 서글픔을 꾹 눌러 담고 그러마, 대답했다.

우 상무와 태헌의 싸움에 연서가 괜히 휘말린 정도로 생각하고 계신 듯했다. 다행히 자세한 상황은 모르는 듯하니 잠자코 강 여사의 말에 수긍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독였다.

강 여사에게 늦은 점심을 챙겨 드린 연서는 휠체어를 끌고 가볍게 정원을 몇 바퀴 돌았다. 연속극을 보시는 강 여사의 곁에서 다리를 주물러 드릴 때도 평화로웠다.

강 여사가 다시 낮잠에 든 시간이었다. 연서는 저녁거리를 준비하는 복희 이모님 곁에서 콩나물 다듬는 걸 돕고 있었다.

“저 왔어요.”

예고도 없이 불쑥, 승빈이 나타났다.

“어머, 오셨어요.”

식탁에서 일어나며 복희가 화답했다. 그녀가 아주 반가운 기색으로 물었다.

“저녁 드시고 가실 거죠?”

“네. 칼칼한 거 하나 해주세요. 갈치 조림, 그거 좋던데.”

“네. 알겠습니다. 요즘 무가 좋아요. 푹 삶아 드릴게요.”

“벌써 허기지는데요?”

승빈이 넉살 좋게 화답하자, 복희가 즐겁게 웃었다. 전이라면 연서도 함께 웃었겠지만, 차마 거짓으로도 웃어지질 않았다.

식당에서 음란하게 여체를 탐하던 모습이 뇌리에 깊게 박힌 터다.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연서는 나 좀 봐. 할머니 일로 할 얘기가 있어.”

“지금 말씀이세요?”

연서가 머뭇대자 복희가 어깨를 툭툭 쳤다.

“연서야, 두고 가. 이건 내가 마무리하면 돼. 어서.”

“…네.”

마지못한 연서는 의자를 끌며 천천히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설마 어제 일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온 걸까?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친근하게 느껴지던 승빈이 이젠 질 낮은 난봉꾼으로만 보였다.

“날도 좋은데 좀 걸을래?”

“선생님께서 곧 깨실 시간이라, 멀리 못 나갈 것 같아요.”

“그럼 저리로 가자.”

밖으로 향하려던 승빈이 발을 돌려 실내온실로 향했다.

건물의 외측에 만든 온실은 사방이 통창으로 이뤄져, 푸른 수목이 시원하게 비쳤다. 건강상 먼 곳까지 나가지 못하는 강 여사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온실 안에 알림 벨이 설치되어 있기에 강 여사가 호출하면 바로 달려갈 수 있었다. 강 여사의 침실까지 멀지 않기도 했다.

온실로 들어선 승빈이 둥근 테이블 옆에 놓인 철제 의자를 눈짓했다.

“앉아.”

“아뇨. 괜찮아요.”

“앉으래도.”

승빈이 손목을 잡는 순간이었다. 연서가 저도 모르게 팔을 확 빼냈다. 어제 태헌에게 잡혔던 팔이 화끈거린 터다.

“연서야.”

“죄송합니다. 아파서요.”

팔목을 돌리며 연서가 어색하게 대꾸하자, 승빈의 눈매가 돌연 가늘어졌다.

“너 팔이 왜 이래?”

“네?”

“팔이 왜 이러는데?”

승빈이 화난 목소리로 연서의 팔뚝을 잡아 올렸다. 헐렁한 긴팔 소매가 스르르 젖혀지며 멍든 손목이 나타났다.

“손자국……. 이거 뭐야?”

“아…….”

연서가 곤혹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태헌에게 잡혔던 손목이 아침에 보니 이렇게 멍들어 있었다.

하나 태헌과 실랑이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 연서야, 이거 설마 태헌이 자식이 그런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연서가 팔을 당기며 부정했다.

“아니긴. 너한테 이런 짓 할 놈이 그 자식밖에 더 있어? 어제 함께 있었잖아.”

“그냥 넘어질 뻔해서 잡아주신 거예요.”

“그걸 믿으라는 거야?”

막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화를 삭이듯 승빈이 마른세수를 했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어제 거기 식당엔 왜 온 거야? 태헌이가 혹시 무슨 협박이라도 했어?”

승빈은 태헌이 나쁜 짓을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는 투였다. 그래, 태헌이 어떤 사람인지 집안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

그가 얼마나 위험하고 독단적인 인간인지, 승빈에게서 다시금 확인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이사님께서 이번에 저를 처음 보신 거라 식사 권하신 거예요. 면접 비슷한 자리였어요.”

“그럼 왜 하필 내가 있는 지예연이었을까?”

“그거야 저도 모르죠.”

“태헌이 그런 데 좋아하지도 않아. 그런데 딱 맞춰 등장했잖아. 이게 우연 같아?”

하. 승빈이 한숨을 쉬며 입을 가렸다. 혼란스러운 기색이 그의 낯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복잡한 건 연서도 같았다.

“연서야, 나는 어제…….”

“어제 일이라면 못 본 거로 할게요. 노크 없이 문을 연 건 제 잘못이에요. 죄송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연서야.”

다시 연서의 팔을 잡으려던 승빈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연서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연서가 곧장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승빈의 입매가 살짝 뒤틀렸다.

“연서 너, 지금 나 피하는 거야?”

“네. 오지 마세요.”

“…뭐?”

“이 이상 다가오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요.”

“부담? 우리가 그런 거 느낄 사이였니?”

순간 승빈이 화가 난 것처럼 거침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연서를 구석으로 몰았다.

연서의 등이 차가운 유리에 닿았음에도 승빈은 멈추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옆으로 피하려는 연서의 어깨를 잡아 그가 고정했다. 그런 그가 거북했다.

“얘기 들어줘. 어제는 실수였어. 정말이야.”

“…그런 거 저한테 해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 부장님.”

“내가 너 좋아해.”

“…….”

“진심이야. 몰랐다고 하지 마.”

순간 속이 역해진 연서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너도 나 마음에 들어 했잖아. 아니야? 난 우리가 마음이 통한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거짓말.”

승빈을 동경한 건 사실이나 이성으로 본 적은 없었다. 좋은 사람, 따뜻한 사람으로 느껴 호감을 가졌던 것뿐이었다.

연서가 바르작거리며 어깨를 잡은 승빈의 손을 밀어내려 애썼다.

“정말 아니야? 그럼 왜 그렇게 놀랐니. 연서 너, 나 보고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놀랐잖아?”

“그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놀랐을 거예요. 제발 비켜주세요.”

“태헌이가 그래? 내가 그런 바람둥이니까 마음 떼라고? 왜? 태헌이가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왜 네 주인인 양 구는데? 어?”

“놔……. 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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