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흥분에 잠겨 탁해진 승빈의 눈동자가 더듬더듬 연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승빈이 점차 이성을 되찾는 과정을 관람하며 태헌은 속으로 웃었다.
“연서…? 너 연서야?”
“……우 부장님.”
“네, 네가 여기 왜 있어? 어떻게?”
“어……. 저, 저는.”
주저앉느라 연서의 무릎이 바깥으로 꺾여 있었다. 뽀얀 허벅지를 흘긋대며 승빈이 마른세수를 했다.
“이 모습은 또 뭐고. 너 대체…….”
승빈이 말을 하다 말고 헛숨을 내뱉었다. 뒤에 자리한 태헌을 발견한 거다.
“태헌이? 씨발…….”
혀를 찬 그가 반쯤 풀린 지퍼를 올리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여자를 일으켜 수습하는 꼴이 그리도 등신 같을 수가 없다.
“한연서.”
이 사태를 태연하게 관망하던 태헌이 목소리를 내자 연서가 벌벌 떨리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나.”
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일어나서 이리로 와.”
저 새끼한테 어서 보여줘야지, 한연서가 누구의 개가 되었는지.
그러나 연서는 쉽사리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승빈과 옷을 정돈하는 여자를 번갈아 살피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태헌아, 너 혹시 연서 데리고 장난하는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니에요!”
바락 소리를 지른 건, 우습게도 연서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밥을 사 주시겠다고 하셔서 온 거예요.”
“그런 것치고 우연이 너무한 것 같진 않아?”
승빈이 쓰게 웃다가 손을 저었다.
“아 미안, 연서야. 내가 많이 취했다.”
“…….”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 우리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게 낫겠지?”
승빈이 눈꼬리를 축 내리며 웃은 뒤 미닫이문을 쾅 닫았다.
이쯤 하면 될 터다. 이쯤 하면 이 태평한 여자가 지금의 사태를 깨달을 수 있는 충격 요법으론 충분하지.
태헌은 지금 이게 얼마나 개 같은 상황인지, 그리고 그녀가 누구의 아래로 굴러들어오게 되었는지 깨우쳐줄 필요가 있었다.
“일어나서 오라고 했을 텐데 뭐 하는 거야. 일일이 되묻고 부정하는 번거로운 짓, 그만해.”
태헌이 일어나 아직도 주저앉아 벌벌 떠는 연서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못 일어나겠어요.”
“뭐?”
“추, 충격받아서…….”
“하, 그 나이 먹도록 붙어먹는 거 처음 보나?”
“아는 사람이잖아요…….”
연서가 미약한 힘으로 태헌을 뿌리친 뒤 기다시피 하여 가방을 챙겼다. 일어난 후에도 비틀거리는 연서는 생각보다 더 허약했다.
아니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서는 마치 승빈에게 차이기라도 한 듯이 굴고 있었다. 기가 찼다.
“그 아는 사람이 우승빈이어서 실망한 건 아니고?”
“이사님, 그만 가요. 저 정말 안 되겠어요. 가고 싶어요.”
연서가 비척비척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태헌도 말없이 따라나서 신발을 신었다.
자갈이 밟히는 마당엔 어둠이 자욱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다.
간간이 풀벌레 소리가 흘러나왔고,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평온을 뚫고 연서가 뛰듯이 걸었다. 상처받은 발소리가 태헌의 신경을 쇠톱처럼 긁어 대고 있었다.
태헌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연서가 곧장 뿌리쳤다.
“놔 주세요.”
착각이 아니었다.
연서는 지금, 안간힘을 다해 태헌에게서 달아나고 있었다.
이게, 진짜. 누굴 더러워해.
“한연서, 여기에 널 왜 데려온 것 같아.”
“저 기 죽으라고 이러시는 거잖아요.”
연서가 붉어진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값비싼 옷과 구두, 정갈한 식사. 그런 것들이 꼭 태헌이 베푸는 알량한 동정 같았으며 연서 자신을 찍어누르기 위한 도구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연서는 바닥까지 내다 꽂힌 참담한 기분이었다. 태헌이 그녀를 정말 사람으로 대우했다면 이런 자리를 만들진 않았을 거다.
연서는 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차오른 눈물을 뺨으로 흘려보냈다.
“이제야 누구 밑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실감이 돼?”
“이렇게 안 하셔도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이사님 부르시는 대로 왔고요.”
“아니, 아직 넌 감도 못 잡았어.”
“손 놔주세요.”
태헌이 다시금 붙잡아 손을 붙잡아 단단히 쥐자 연서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태헌이 이러는 이유를 차분히 정리했다.
조금 전 승빈을 보고도 담담했던 태헌의 태도와 정황으로 미뤄 확신할 수 있었다. 승빈을 만나게 한 건 의도적이었을 거다.
그가 우 상무의 아들이니까, 거리를 두라는 뜻이겠지.
말로 해도 알아들을 텐데, 왜 이런 방식으로…….
하필이면 승빈이 여자와 그러고 있을 때 마주치게 한 연유가 뭘까. 태헌은 엄청나게 비뚤어진 사람인 걸까. 아니면 사람을 망가뜨리는 데 조금의 미안함도 없는 걸까.
모르겠다. 도무지 태헌을 알 수 없었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머릿속이 캄캄하게만 보였다. 역시 그는 거북했다.
“이거 놔주세요.”
“함께 식사하러 온 입장인데, 한연서 씨 혼자 울면서 나가게 두면 내가 곤란해지지.”
“…….”
연서가 고갤 들어 그를 바라보았으나 흐릿해진 시야 때문에 태헌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사람 됐으면 나한테 맞춰. 격식이든 수준이든. 남자관계든.”
“남자관계라니요?”
“더는 우승빈이랑 얽히지 말란 소리야.”
태헌이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앞서갔다. 말소리가 소리가 난다 싶더니 한쪽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글우글 쏟아져나왔다.
앞서가는 남자와 끌려가는 여자를 향한 궁금증 어린 시선이 연서는 무척이나 따가웠다.
“이사님, 이러시면 사람들이…….”
“한연서가 누구 애첩인지 알게 되려나.”
“…네?”
“사촌이 한 여자한테 목맨다는 소문이 달가운 게 아니라면, 우승빈도 이제 함부로 못 나서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이사님…!”
“여기서 입이라도 맞출까. 그럼 이해가 되려나?”
연서가 겁에 질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띄엄띄엄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제가 이사님의 애첩……. 그런 거로 보여야 한단 말씀이에요?”
어째서?
스스로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졌다. 숨을 쌕쌕 내뱉는 연서의 입술 끝이 경련했다.
“우승빈이랑 사이 꽤 좋아 보이던데. 관계를 아주 끊어내려면 나랑 어울린단 인상 정돈 심어 줘야지.”
그러니까, 승빈과의 관계를 단절 내기 위해 태헌의 첩이 되어야 한단 그런 소리일까. 그래도 첩이라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치욕스러운 단어에 음란한 광경을 목격한 충격마저 새하얗게 잊게 했다.
“아뇨. 이렇게 안 하셔도 저 충분히 우 부장님과 자연스럽게 거리 벌릴 수 있습니다. 말로 하셔도 될 일이에요.”
“우승빈이 그렇게 해준다고 그래? 쉽게 보지 마.”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첩이니 입맞춤이니, 사촌의 치정이니, 모두 연서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주차된 차에 도착했을 때 연서는 힘껏 손목을 뿌리치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집엔 따로 가겠습니다.”
“한연서.”
“우 상무님 일, 처신 잘할 거예요. 우승빈 부장님과의 관계도 제가 알아서 멀리할 수 있어요.”
연서가 창백해진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굳은 손으로 넘겼다.
“그리고 우승빈 부장님과의 관계는 개인적인 거고, 이사님이 이런 것까지 관여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타. 버릇없이 굴지 말고.”
태헌이 차를 눈짓했으나 연서가 등을 돌렸다.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돌아갈 방법은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탁. 아프게 돌아간 몸이 다시금 태헌에게 딸려갔다.
“이사, 님!”
차 뒷좌석에 내던져진 연서 옆으로 태헌이 밀고 들어왔다. 제대로 앉지도 못해 엉망으로 흐트러진 그녀의 몸 위로 태헌의 시선이 어둠처럼 내려앉았다.
“실연당하고, 누구한테 화풀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이건 이사님이……!”
“그런 새끼인 거 알려줬으면 고마워해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여자랑 배 맞추는 새끼 걸러냈으면 너한텐 호재 아닌가?”
연서는 입을 다물자 그 틈에 차가 조용히 움직였다. 태헌의 말이 조금은 아팠다.
그래, 승빈이 잘해준다고 해서 그와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고 해서, 섞여들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오늘 승빈의 낯선 모습을 보고서야 연서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그간 승빈의 상냥함에 단단히 착각했던 거다. 승빈은 마음먹기에 따라 상대를 골라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몸을 섞을 수도 있었다.
연서로선 이해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 세계였다. 대체 뭘 꿈꿨던 걸까. 승빈에게 남몰래 연심이라도 품고 있었던 걸까.
주제도 모르고 들떴던 연서를 현실로 끌어다 준 건 태헌이었다. 그의 말대로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 태헌은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연서를 진창에 내던진 장본인이었다.
“속이 시원하세요?”
“네가 말귀를 알아들었다면, 그러겠지.”
연서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쥐었다. 우태헌, 그는 정말 미친놈 같았다.
*
다음 날 연서는 퉁퉁 부은 눈으로 윤해를 배웅한 뒤, 약을 정리한단 핑계로 다용도실의 냉장고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태헌이 출근한 뒤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낮잠 중인 강 여사의 옆을 지켰다. 태헌을 마주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오늘따라 강 여사의 아침 수면이 길었다. 그러나 별다른 이상은 없어서 건강이 우려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연서에게로 일부러 밀어내던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우 상무의 문제가 가장 골치 아팠다. 가슴 한편에 무겁게 똬리를 튼 죄책감은 우 상무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했다.
어제 처음으로 우 상무에게서 처음으로 서늘함을 느꼈다. 승빈의 얘기를 할 때, 그는 분명 연서를 경계했다.
가면이 한 꺼풀 벗겨진 것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우 상무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가설이 완벽해지고 말았다.
그동안 왜 몰랐을까. 바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