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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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고개를 내렸다. 그러곤 훤히 드러난 허벅다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태헌은 처음부터 치마가 말려 올라갔던 걸 알았지만 굳이 짚어줄 필요를 못 느꼈다.
그러다 심기가 불편해진 김에 지적했다. 마땅치 않아도 예의 정도는 차려보라고.
치마 끝자락을 잡은 연서가 우물쭈물했다.
“왜.”
“저쪽 봐주시면 안 될까요?”
허리를 띄워 치마를 내려야 하는 과정이 불편했던지 연서가 간곡한 눈빛을 보내왔다. 태헌이 고개를 돌리자,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눈을 맞추고 인사해.”
“…그건.”
연서가 어물거렸다. 마치 원피스 지퍼를 올려줄 때처럼 태헌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도 몰랐던 가학심 따위가 고개를 내미는 기분이었다. 저 투명한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고 싶단 조악한 바람이 일었다.
아까 사무실에서는 시간을 절약하러 직접 나선 것뿐이었다. 그러나 연서의 목덜미가 붉어지는 걸 보고 돌연 충동이 일었다.
급기야 무릎을 굽히고 구두까지 신겨주었다. 이성적으로,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데 익숙한 태헌에겐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목걸이까지 채운 건 뭐였을까. 말랑하게 닿은 연서의 살갗이 부싯돌이라도 된 듯 태헌의 어딘가에 불이 확 번졌다.
무의식적으로 끌린 건가.
아니면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뇌가 미쳤던가.
설마 성욕은 아닐 테고. 성욕이란 단어를 끌어낸 것만으로도 웃음거리가 될 일이었다.
연서를 이용해 우 상무를 한 방 먹일 생각이었고, 그래서 그녀에게 적당한 다정함을 내세웠을 뿐이었다.
그래, 그런 거다.
태헌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연서의 발치에 무릎을 접고 앉아 수발을 들 의향이 있었다.
그의 자존심은 과정이 아닌 결론에 붙어 있었기에,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고개쯤은 아무렇지 않게 숙일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지레 겁먹고 피하려 드는 연서는 예상 밖이었다.
하기야 제가 무섭기도 하겠지. 강 여사의 안전에 악영향을 끼치는 짓을 선선히 할 만큼 머리가 꽃밭인 여자다.
태헌에게 돈으로 매수된 이상, 갑과 을의 관계를 정립했으니 그를 어려워하는 게 옳았다. 한데 가슴의 어딘가에서 싹 튼 불쾌함은 쉬이 가라앉을 기세가 아니었다.
점점 더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태헌이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건반 누르듯 두드렸다.
“도착했습니다.”
숲길을 지나 지예연의 정문이 보였다. 한옥과 현대식 건물의 장점을 따 만든 이곳은 회원제로 운영되었다. 상류층이 식사와 술, 유희를 즐기기엔 적당한 곳이었다.
커다란 연못이 강줄기처럼 길게 이어져 볼거리도 나쁘지 않았고, 바로 뒤엔 산이 있어 공기가 좋았다. 그리고 그 산에서 종종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간에 양질의 정보가 오갔고, 로비가 이뤄지기도 했으며 접대와 성을 사고팔기도 하는, 불법의 온상지기도 했다.
불법적 과정을 거쳐 합법을 위장한 이득을 취하는 건 태헌의 세계에서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기에 이곳을 찾는 데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운전기사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태헌이 미동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연서가 손잡이를 잡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마음만은 벌써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표정을 하고선 그와 눈을 마주치자 연서가 천천히 웃는다.
습관인가. 저렇게 간 빼놓고 웃는 것.
“도착했어. 내려.”
“네, 이사님.”
그녀가 제법 씩씩하게 대답해 태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우울한 줄만 알았더니.
그녀가 반대편 문을 열고 홀랑 차에서 내렸다. 한 공간에 있기 싫단 연서의 의지가 아주 잘 느껴졌다. 태헌은 문을 열어주는 운전기사를 저지하고 긴 다리를 바깥으로 빼냈다.
그가 재킷의 단추를 채우는 동안 연서가 수목과 어우러진 건축물에 시선을 빼앗겼다.
“우와.”
그녀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렇게까지 좋아할 풍경은 아닐 건데. 저 숲길 뒤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면 저 말간 얼굴이 어떻게 되려나.
“저쪽으로 산책로가 붙어 있나 봐요.”
연서가 차마 대놓고 말하진 못하겠는지 혼잣말을 가장해 중얼거렸다.
“가 보든가.”
“그래도 돼요?”
“사람 묻을 때 쓰거나, 도착적인 취미가 있는 남녀가 섹스하는 공간이긴 하다만 출입을 제한하진 않아.”
바람이 불며 연서의 앞머리가 해초처럼 흔들렸다.
“지금 가?”
하얗게 질린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아까도 말했을 텐데. 밖에선 내 옆에 서. 뒤에서 따라오는 짓 하지 마.”
“…네.”
“알아들었으면 옆으로.”
태헌이 옆을 눈짓했다. 조금 전 회사에서 연서가 죄인처럼 뒤따라오는 걸 옆에다 세웠다.
태헌이 젊은 여자와 동행하는 건 꽤 이슈가 될 만한 사안이었다. 연서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 저렇게 돌멩이 삼킨 거북이처럼 구는 거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연서를 못마땅히 지켜보다가 태헌이 걸음을 옮겼다.
“가지.”
기다리고 있던 직원의 안내를 받아 움직였다. 복도에 늘어선 미닫이문에선 한국의 정취가 담뿍 묻어났다.
연서는 모든 게 신기한 모양으로, 주변을 흘긋댔다. 룸에 들어가자, 그녀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방과 방이 미닫이문으로 연결되어, 방 크기를 조정할 수 있는 구조였다.
태헌이 재킷을 벗어두며 말했다.
“보고 싶으면 천천히 봐. 본데없이 좀도둑처럼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돼.”
“…죄송합니다. 이런 덴 사실 처음이거든요.”
연서가 무슨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살짝 들뜬 얼굴로 속닥인다. 자리에 앉은 태헌이 물수건으로 가볍게 손을 닦고 미리 차려진 상차림을 훑었다.
“가리는 건 있어?”
“다 맛있어 보이는걸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전혀 먹고 싶단 표정도 아니면서. 하여간 비위 상하게 하는 데 도가 튼 여자였다. 예상대로 연서는 연신 깨작거렸고 태헌은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저, 이사님. 이제 말씀하셔도 돼요.”
“참을성 없게 굴지 말고 식사부터 해.”
“이런 곳엘 데려와 주셔서 감사한데요, 무슨 말씀을 하실지 무서워서 도저히 밥이 안 넘어가요.”
“한연서 씨, 내가 진짜 무서워?”
대답을 기다리며 태헌이 씹던 음식을 느릿하게 넘겼다. 뾰족한 목울대가 꿀렁이며 잘게 씹은 먹잇감을 배 속으로 빨아들였다.
“네…….”
“진짜 무섭다는 사람이 꼬박꼬박 말은 잘해.”
태헌이 지긋이 연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재잘댔다.
“우 상무님 일로 보자고 하신 건 맞죠?”
“그래, 무슨 얘기 했는지 말해 봐.”
한 수 접듯 태헌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기 무섭게 연서가 입을 뗐다.
“우 상무님은 평소와 같았습니다.”
운을 뗀 연서는 준비한 것처럼 냉큼 이야기했다.
“선생님 말수가 평소와 같으셨는지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고, 윤 여사님과 김 관장님, 유 대표님을 만나셨단 보고를 다시금 드렸어요.”
“우승빈 얘기는 안 했어? 본가로 함께 갔잖아. 그런 일은 처음이었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놀라 동그래진 눈이 어떻게 보면 순백의 도화지 같았다.
깨끗한 것을 망가뜨리고 싶은 미친놈들의 심리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 기이한 답답함이 치밀었다.
“우 상무 성격 생각하면 대충 둘이 어울리지 말란 소리를 했을 것 같은데.”
“…….”
“말해도 될지, 말지. 함부로 결정하지 말고 빼지 말고 전부 보고해.”
“네. 맞는 말씀이에요.”
맞긴 맞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짐승처럼 죽어가는 표정이고.
“그래서.”
“우승빈 부장님에게 주제넘게 다가가지 말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뭐라고 답했지?”
“우승빈 부장님과 따로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우 상무는 아직 강 여사의 속뜻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강 여사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성격이었다. 연서를 손주 짝이 되길 소원할 만큼 예뻐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연서에게 크게 한 몫 떼어줄 가망성이 컸다.
우 상무가 그 냄새를 맡았다면 승빈과 연서를 떼어놓으려 들진 않았을 거다. 연서를 이용한 뒤 버리면 몰라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반찬 위를 떠도는 연서의 시선이 무언가 하지 않은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더 할 말 있으면 해.”
“사실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겠지.”
태헌이 그럴 줄 알았단 식으로 말했다. 그동안 자신이 첩자였단 걸 것을 깨달은 연서가 우 상무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정말 우 상무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지 떠보고 싶었겠지.
“……선생님께서 손님을 만나며 스트레스를 받진 않을지 염려된다고, 이렇게 보고드리는 일이 선생님의 건강과 어떤 인과가 있냐고 여쭸어요.”
“그래.”
옆방에 다른 손님이 있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꽤 크게 났다.
보통은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방 두 개를 통으로 예약하는데, 오늘은 일부러 다른 방과 맞닿게 예약했다.
“안 놀라세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 상무가 한연서의 쓰임이 다한 걸 알게 된다 한들 별수 있나.”
“저를 내칠 수도 있다면서요.”
“못 하게 하는 방법이 있긴 해.”
태헌이 미끈하게 웃었다. 그러곤 연서 뒤의 방을 바라보았다.
“뒤에 문, 열어 봐.”
“이쪽 문을요?”
“그쪽이 마루와 연결되어 있어. 전부 열면 전경이 훤하지. 연못이 보일 건데 놓치기 아까운 광경일 거고.”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서가 일어났다. 그녀가 움직이자 원피스 아랫단이 팔락였다. 그 파동에 연서의 허벅지가 반이나 드러났다.
쭉 뻗은 다리는 하얗고 투명해 실핏줄이 내비쳤다. 태헌의 시선이 찰나 나른하게 풀어졌다가 짙어졌다.
드르륵. 문을 열어젖힌 연서가 멈칫했다. 그러다 뒷걸음질을 친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연서의 시선 안에서 두 남녀가 붙어먹고 있었다.
음음, 입을 맞추는 남자의 신음이 징그럽게 터져 나왔다. 그의 아래에는 반나체가 된 여자가 깔려 숨을 헐떡였다. 거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한껏 붙어 타액을 나누던 남녀가 타인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자기야, 흣, 문! 누가 있어!”
“아 씨발, 뭐야. 누구야.”
여자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남자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문을 보며 짐승처럼 맞닿은 신체를 비벼대던 남자가 허리를 세웠다.
그러곤 벌게진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연서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호감형의 얼굴, 둥근 눈매.
발정 난 금수 새끼는 바로 우승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