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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8화 (8/85)

8화

*

신 비서는 재차 머리를 조아리며 태헌의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주의 깊게 행동하겠습니다. 이번과 같은 일 없을 겁니다.”

“30분 내로 한연서 씨가 입을 만한 옷 준비해요. 저녁 식사는 지예연에서 합니다. 별채 끝방으로 잡아요.”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신 비서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그가 물러가자 적막이 내리 앉았다.

“이사님, 제 옷은 왜…….”

가뜩이나 옷차림에 위축된 터라 연서는 옷을 가져오란 지시가 예민하게 들렸다. 태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끌어왔다.

“들었을 텐데. 저녁 식사하고 용인으로 갈 거야. 옷차림 제한이 있는 곳이라 갈아입는 거고.”

“죄송하지만 저는 선생님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야 해요. 그리고 옷까지 바꿔 입고 싶지 않습니다.”

“우 상무 일에 대해 의논해야지. 앞으로 한연서 씨가 어떻게 처신할 건지도 얘기하고.”

“그런 거라면 집에 돌아가서 하면 안 될까요?”

“한연서, 지금 내가 권유하는 것 같아?”

날카로운 음성이 닿고 나서야 연서는 그의 눈가에 자리 잡은 피곤함을 알아차렸다.

귀국한 지 사흘이라고 했었지. 벌써 책상에 앉아 결재하는 걸 보아 태헌은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바로 업무에 투입된 것 같았다.

어제는 용인까지 달려왔으니 그도 사람인데 아무렴 힘에 부치겠지. 그런 때일수록 심기가 불편할 거다.

이런 사람에게 따져봐야 더 모난 말만 돌아올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만년필을 굴리는 태헌의 옆모습은 얄미울 만큼 잘나 보였다.

“가서 앉아. 정신 어지러워.”

결재판을 들추는 태헌이 차갑게 말해, 부쩍 지친 그녀는 터덜터덜 소파로 돌아와 걸터앉았다.

아까는 쉽게 잠들었는데 태헌과 한 공간에 있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 비서가 다시금 노크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옷이 준비되었습니다.”

“거기 두고 가죠.”

“네, 이사님.”

“10분 뒤에 차 대기시키고.”

“네.”

신 비서가 쇼핑백 꾸러미를 연서의 앞 테이블에 두고 나갔다.

“저기서 갈아입고 나와.”

태헌이 가벽 뒤의 공간을 눈짓했다. 연서의 의견은 듣지 않겠다는 듯 그가 약간 누운 자세로 눈을 감았다.

콧대를 주무르는 긴 손가락을 바라보던 연서는 체념하고 가벽 뒤로 향했다.

작은 세면대와 간이침대, 스타일러와 옷장이 보기 좋게 자리한 공간이 그녀를 맞이했다. 연서는 스툴 위에 쇼핑백을 내려놓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연서는 꼴이 참담했다. 장식품 하나하나, 전부 값비싸 보이는 공간에 이질적으로 박혀 있는 그녀는 정말 속된 말로 촌스러웠다.

태헌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법했다. 그러니 옷을 사 오라고 한 거겠지.

분명 비싼 식당으로 갈 텐데, 거기서도 모난 돌처럼 튈 생각이 아니라면 그의 뜻대로 옷을 갈아입는 게 나을 터다.

연서는 포기하고 쇼핑백을 열었다. 쇼핑백은 총 세 개로, 가장 큰 쇼핑백을 먼저 풀자 옷 상자가 들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것이라 입기에 엄두가 안 났지만, 토를 달았다간 태헌이 더 노골적으로 비웃을 것 같았다.

네이비색과 크림색이 조합된 원피스는 클래식하면서 고루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허리선이 강조되어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동시에 입도 벌어질 만큼 고급스러운 상표를 만지작거리며 연서는 찰나 고민했다.

정말 이 옷을 입어도 될까, 확신이 안 섰다.

바깥쪽에서 태헌의 구두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연서는 얼른 옷에 몸을 욱여넣었다.

마른 편이라 사이즈에 문제는 없었으나 허리 뒤쪽부터 목덜미까지 연결된 지퍼를 닫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용을 써보았으나 브래지어 선까지 지퍼를 여미는 게 그녀의 한계였다. 뻣뻣한 몸이 원망스러웠다.

“아직 멀었어? 시간 다 되었는데, 얼마나 기다려야 해.”

태헌의 목소리가 제법 가까운 곳에서 들려와 연서가 허둥댔다.

“아니, 아니요. 다했는데….”

“다했으면 나와.”

“그게 아니라…….”

태헌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연서는 서둘러 벗어둔 옷을 정리해 쇼핑백에 넣은 뒤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태헌이 가벽 안쪽 공간으로 들어왔다. 입구에 멈춰 선 그가 널브러진 나머지 쇼핑백을 눈짓했다.

“구두랑 액세서리도 있을 텐데. 그것까지 갖춰. 어디 불편해?”

앞을 움켜쥐고 있는 연서를 향해 그가 물어왔다.

“……퍼가.”

“뭐?”

“지퍼가 안 닫혀요…….”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한 연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막막한 공기가 서늘하게 마른 등을 감쌌다.

바닥으로 내리깐 연서의 시선 안으로 태헌의 구두가 들어섰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 그가 연서의 등 뒤로 다가섰다.

“이, 이사님!”

“머리 잡아.”

연서는 황급히 몸을 돌려 뒤를 가리려 했으나 그가 어깨를 쥐는 게 더 빨랐다.

“아……!”

“이대로 나갈 거 아니면 말 들어. 시간 끄는 거 질색이니까.”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흩어진 머리칼을 모아 어깨 한쪽으로 모아 내렸다.

“……네.”

지이익. 지퍼가 매끄럽게 올라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맨살에 스치듯 태헌의 손가락이 닿았을 땐 놀라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냥 지퍼를 닫아주는 거야. 그런 거야.

연서는 과민 반응을 하지 않으려 입술에 힘을 주고 긴장감을 꾹 참았다.

“앉아.”

“…….”

“거기 앉으라고, 한연서 씨.”

태헌이 조금 거칠어진 목소리로 명령했고, 연서는 떠밀리듯 스툴에 앉았다. 쇼핑백에서 구두를 꺼낸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신발이 조금 클 것 같은데, 정 불편하면 나가는 길에 다시 사고.”

“아뇨. 괜찮아요. 대충 신어도 돼요.”

“그럼 그러든가.”

태헌이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는 모습을 보던 연서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제 발목을 쥐고 있었다.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할 수야 있겠지. 꾸물꾸물, 시간 축내면서.”

“제가 빨리할게요. 정말이에요.”

“그럴 거였으면 벌써 끝내지 않았겠어?”

태헌이 슬쩍 시선을 올리며 굼뜬 그녀를 질책하는 투로 말했다. 예리한 턱선과 날카로운 눈매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어 연서는 조금 더 겁을 집어먹었다.

“발.”

연서는 사리듯 뒤로 당겼던 발목을 채어간 태헌이 사무적으로 운동화를 벗겼다.

문득 양말을 내려다본 연서가 소스라치듯 놀라 발을 뒤로 뺐다. 병아리, 병아리 양말이었다.

“뭐 하는 거지?”

“이건 제가 할게요.”

연서가 필사적으로 발을 사수했다. 꾸물꾸물 양말을 벗어 한쪽으로 놓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발목을 가져가 구두를 신겼다.

발등에 병아리 부리 모양이 그대로 찍혀 자국이 남은 걸 봤을 땐 혀를 깨물고 싶었다. 정작 태헌은 관심 없는 눈치라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사실인지 태헌이 빠른 손놀림으로 작은 쇼핑백 안을 열었고 주얼리 케이스 속에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머리카락 치워.”

연서가 팔을 들어 목을 덮은 머리칼을 한쪽으로 모으자, 그가 뒤쪽에서 팔을 둘러왔다.

그의 까슬한 슈트 소매가 살갗에 살짝살짝 닿을 때마다 연서의 호흡이 끊겼다.

반면 태헌은 덤덤하게 하얀 목덜미에 목걸이까지 채운 뒤 커프스를 밀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쯤 하고 나가지.”

태헌의 사무실을 나오기 전, 연서는 전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어정쩡하게 선 연서의 모습은 예뻤지만 그래서 어색했다.

단 몇 분 만에 사람을 바꿔버릴 수 있는 태헌에게 거듭 놀라버렸다.

전신이 간지러웠다. 자신이 아닌 듯한 모습을 보자 난 대체 뭘 하는 걸까, 하는 회의감이 찾아오는 건 덤이었다.

*

연서는 회사를 나오는 순간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태헌의 운전기사가 모는 차에 오른 후엔 정수리를 뚫은 것처럼 김장감이 고양되었다.

생전의 우 회장과 독대할 때도 이만큼 불편한 적이 없는데, 태헌의 곁에선 숨조차 마음껏 들이켤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글픔과 불쌍함은 달랐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헌의 앞에선 모든 게 창피하고 위축되었다. 조금 전 그와 회사 로비를 걸어 나올 땐 먼지가 되고 싶었다.

집중된 이목이 그녀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태헌이 사 준 옷으로 애써 포장했으나 알맹이는 가난한 빚쟁이란 걸 그들이 아는 것만 같았다.

왜일까. 왜 이렇게까지 주눅이 드는 거지?

그의 오뚝한 콧날을 흘끔거리던 연서는 차 뒷좌석에서 녹초가 되어 축 늘어졌다. 마치 가시덤불에 갇힌 조난자가 된 심정이었다.

어서 용인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면 얼마간은 그에게서 해방할 수 있을 테니.

태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사람을 쉽게 조종할 수 있는 무형의 리모컨이 그에게 있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를 거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하…….”

연서의 작은 한숨이 태헌에게도 닿았다. 눈을 내리감고 있던 그의 안광이 그녀를 향했다.

그의 잘난 얼굴을 정면으로 맞대자 위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시위하는 거면 더 못 들어주겠는데.”

“네?”

세상의 마지막 날처럼 한숨을 폭폭 내쉬면서 몰랐다는 듯 묻는 붉은 입술이 참, 어리숙했다. 태헌의 기준에 그녀는 참으로 이상한 여자였다.

“한숨을 몇 번째 쉬는 건지.”

“제가 한숨 쉬었어요? 죄송해요. 습관이라서…….”

“거짓말 티 나.”

“…네, 죄송합니다.”

태헌은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순간 근심 어린 낯으로 우울하게 창가를 보던 연서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숲의 골목이 끝나고 시작되는 푸르른 전경을 본 그녀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우와…….”

불편하다는 티를 숨기질 못하듯, 놀란 것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그러지 못하는 건지 연서는 투명한 생명체 같았다.

태헌에게 굳이 잘 보일 마음이 없단 것도 아주 잘 투영되고 있었다. 연서 같은 인간상은 태헌의 근처엔 흔치 않았다. 아니, 어쩌면 없겠지.

태헌에게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않는 부류는 그럴 필요 없는 위치의 인사라든가 그의 경쟁자 정도로, 아주 소수였다.

먹이사슬의 바닥에서 겨우겨우 빌붙어 생존하는 주제에 태헌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는 건 연서가 유일한지도 몰랐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새 감탄을 거둔 그녀가 물어왔다. 무섭다는 낯빛을 하고서 태헌의 모든 행동에 촉각을 내세우는 꼴이 같잖고 하찮았다.

“있으시면.”

“…하셔도 돼요.”

서로 얽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연서가 대꾸하기에 태헌도 대답해주었다.

“치마 올라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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